독일에 온 후 사계절을 온몸으로 맞고 있다. 실제로 이 곳의 사계절이 더 뚜렷해서는 아니다. 실내 냉난방 시스템이 한국에 비하면 굉장히 불편하고 비싸기 때문이다. 한여름에 에어컨을 트는 곳도 거의 없고 한겨울에도 그다지 따뜻하게 난방을 틀지 않는다. 바닥 난방이 아닌 라디에이터를 트는 곳이 대부분이라 난방을 틀어도 그다지 따뜻하지 않고, 여전히 발은 시려서 집에서도 양말과 털신을 신어야 한다. 이렇게 서늘한 추위를 견뎌야 함에도 불구하고 난방비는 한국의 몇 배를 지불한다.
무엇보다 올 겨울은 더욱 추워질 예정이다. 러시아가 독일 가스 공급을 중단했고, 그간 러시아에 가스 의존도가 높았던 독일의 가스비는 무섭게도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뉴스마다 전기 요금과 가스 요금을 4배에서 10배까지도 오를 거라며 겁을 주는 바람에 가뜩이나 아껴 트는 난방을 더욱 아껴야 한다. 옷을 다섯겹씩 껴입어도 추위가 가시지 않아서 결국 집 안에서 입을 두꺼운 털옷을 주문했다. 침대에는 찬 공기를 막아주는 난방 텐트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 지독한 추위로 벌벌 떨 때마다 한국이 그리워진다. 한국에서는 어딜가나 실내에만 있다면 계절이 주는 더위와 추위를 느낄 새가 없다. 여름에는 가디건 하나는 입어야 견딜 수 있는 차가운 에어컨이 있고 겨울에는 너무 두꺼운 스웨터를 입었다간 답답해질 수밖에 없는 후끈한 실내 난방이 있다. 한겨울 추위를 뚫고 집에 들어가면 따뜻한 바닥 난방으로 사르르 몸을 녹일 수도 있다. 어떤 건물에 들어가도 한여름에는 춥고 한겨울에는 따뜻하다. 사실 나 역시 이러한 쾌적함과 안락함 없이 산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사람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한국만큼 계절을 견디기에 좋은 곳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다가 문득 한국의 시원한 여름과 따뜻한 겨울이 지속될 수 있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부쩍 안 하던 고민을 하게 된 건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재난들이 점차 나의 일상에 스며들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의 뉴스를 보면 현실감이 없을 만큼 국제적인 재난 상황이 코앞에 닥친 듯하다. 전세계를 잠식한 코로나 바이러스부터 러시아의 전쟁으로 인한 물가 상승, 유럽은 여름 내내 가뭄과 폭염으로 앓았다. 지난 몇 년간 모든 사람이 마스크를 쓰고, 백신을 맞고, 때론 비행기가 뜨지 않고 가게들이 문을 닫으며 일상이 멈춰버렸다. 독일에서 우크라이나 수입 비중이 높았던 해바라기씨유는 마트마다 사재기가 심해 구매 제한 규정도 생겼다. 이제는 러시아의 전쟁으로 폭주하는 에너지 비용을 아끼기 위해 안 그래도 추운 겨울을 더 혹독하게 버텨야 한다.
예측할 수 없는 변수와 그로 인해 일상이 완전히 달라진 경험들은 스스로에게 이전에는 해본 적 없던 질문들을 안겨줬다. 정말 한국에서 누린 쾌적한 온도의 비용을 언젠가 우리 모두가 치르게 되는 건 아닐까. 갑작스러운 재난 상황을 맞이했을 때 기꺼이 비용을 치를 만큼 에너지가 넉넉한 것도 아니기에 쾌적한 한국의 냉난방 시스템도 어쩌면 원치 않게 멈춰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다.
처음 독일에 왔을 때 놀랐던 건 한여름의 식당과 카페에서도 에어컨을 틀지 않는다는 거였다. 36도 더위에도 사람들은 선글라스와 파라솔로 햇볕을 가릴 뿐 더운 공기를 즐기는 듯 야외에서 땀을 흘리며 앉아있었다. 당연히 옷차림은 어깨를 훤히 드러낸 옷들이 많았고, 남자들 중에는 상의를 아예 벗고 다니는 사람도 꽤 보였다.
더 놀라운 건 겨울의 풍경이었다. 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은 두꺼운 털 부츠, 귀마개, 털모자를 자주 쓰고 다녔다. 한국에 비해 방한용품을 착용한 사람이 훨씬 많이 보여서 처음에는 ‘저렇게까지 꽁꽁 가릴 만큼 춥지는 않은데?’라는 생각도 했다. 한국의 추위에 비하면 내가 사는 주의 겨울은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일이 많지 않아서 실외 온도만 비교하면 오히려 이 곳이 따뜻했기 때문이다. 나중에서야 독일은 실내를 들어가도 겉옷을 벗기 어려울 만큼 추운 곳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대부분 실내에서도 겉옷을 그대로 입고 있어야 한다. 바깥과 온도 차이가 거의 없기 때문에 하루종일 찬 공기 속에서 버티려면 두꺼운 옷으로 무장을 해야했다.
11월부터는 급격하게 해가 짧아지기 때문에 크리스마스 즈음에는 4시만 되어도 캄캄해진다. 해가 지면 도시마다 광장에는 크리스마스 마켓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리고, 푸드 트럭 앞에서 글뤼바인(따뜻한 와인) 한 잔씩 마시며 두세시간씩 이야기를 나눈다. 그 모습은 얼핏 낭만적이고 가슴을 들뜨게하는 설렘을 주지만, 준비 없이 갔다가는 뼛속 깊이 스며드는 추위에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급히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귀까지 완전히 덮는 털모자, 목도리, 겹겹이 껴입은 옷, 장갑, 발목까지 오는 털부츠를 신으면 얼마든지 크리스마스 마켓을 즐길 수 있다. 실내에도 자리가 충분히 있지만 크리스마스 마켓의 낭만을 즐기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겨울 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길거리에 북적북적 몰려있다.
“와. 진짜 여름은 여름답고 겨울은 겨울답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감탄하며 하는 말이다. 더위든 추위든 아랑곳 않고 온몸으로 맞는 느낌이랄까. 여름에는 길거리가 마치 해변가인듯 과감한 노출을 즐기고 겨울에는 스키장도 아닌데 방한용품이 일상적인 이 곳의 풍경은 때론 계절만의 감성이 가득해 낭만적이지만 전혀 쾌적하지도 안락하지도 않다. 매우 불편하고 힘들다. 하지만 또 못 견딜만큼은 아니다. 에어컨과 보일러가 문명적이고 현대적이라 믿었던 나에게 처음에는 이 곳이 원시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에너지 부족과 기후 위기라는 재난이 갑작스러운 사고처럼 우리를 위협할 때, 이 불편함이 우리 스스로를 지킬 방법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뜨거운 여름과 혹독한 겨울 속에서 계절 그대로를 느끼는 것. 불편하고 괴롭지만 어쩌면 가장 자연스러운 이 방법에 조금씩 익숙해질 필요도 있지 않을까.
* 글쓴이 - 메이
유학생 남편과 함께 독일에서 신혼 생활을 꾸리며 보고 듣고 경험하는 이야기. 독일에서의 첫 사계절을 보내며 익숙해진 것들과 여전히 낯설고 새로운 것들을 관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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