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도 더 전에 남편과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불꽃축제를 관람한 적이 있다. 그땐 불꽃축제가 연례행사로 자리 잡기 전이었던가, 지금처럼 백만 명씩 몰려들고 아침부터 텐트 치며 자리 경쟁을 하던 시절이 아니었다. 한강공원을 데이트 코스로 자주 이용하던 우리는 그날도 큰 준비 없이 공원에서 놀다 저녁 7시쯤 부터 시작되는 불꽃축제를 1열에서 관람하게 되었다. 그땐 작은 초를 켜두거나 크리스마스 전구가 깜빡거리는 것만 봐도 가슴이 왠지 몽글거리던 시절이었기에 불꽃놀이를 함께 직관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상상도 못했던 시절이었다. 추운 강바람을 맞으면서도 나눠 낀 이어폰과 서로의 체온에 의지해 해가 지기만을 기다렸던 것 같다.
어두운 밤하늘에 불꽃축제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쏘아지고 화려한 불꽃쇼가 시작되었을 때 우와...이건 정말이지 온몸의 감각을 깨우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시공간으로 들어선 느낌이 들었다. 내 일상 속 시시한 것들은 모조리 사라지고 마치 이 세상에 우리 커플만 주인공으로 존재하게 된 느낌이랄까. 다양한 형태와 색의 불꽃들 가운데 나를 가장 황홀하게 했던 것은, 하늘 높은 곳까지 유유히 올라가던 불씨 하나가 갑자기 어느 지점에서 1-2초 정도 사라졌다가 펑! 소리와 함께 엄청난 별비를 쏟아내는 그런 불꽃이었다. 불꽃이 퍼져나가는 그 원의 반경이 어마어마해서 주변을 환하게 비추던 순간은 세상도 그 아름다움에 잠시 숨을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하나의 점에서 뿜어져 나온 불꽃들이 미세한 별처럼 하늘을 수놓다가 서서히 반짝이며 머리 위로 비처럼 쏟아지던 그 순간, 아마도 우린 마법에 걸렸던 것 같다.
20년이 훌쩍 지난 어제, 추억도 되살릴 겸 아이들과 함께 즐거운 감정을 느끼고 싶어 늦은 오후 지하철을 타고 이촌 한강공원으로 나섰다. 여의도 한강공원은 이미 백만 명이 운집한데다 차량 통제, 지하철도 운행도 건너뛴다고 하길래 조금 멀더라도 안전하게 불꽃축제를 보자 싶어 이촌으로 갔는데 역시 사람이 많았다. 열심히 살핀 덕에 그럭저럭 좋은 자리를 잡아 불꽃축제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리는데 뭔가 이전과는 다른 낯선 기분이 들었다.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첫 불꽃이 쏘아 올려지고 일본, 이탈리아, 우리나라 순으로 불꽃축제가 시작되자 사람들은 와아, 함성을 지르며 핸드폰으로 열심히 담기 시작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불꽃이 터지는 내내 서로를 꼭 껴안고 있는 연인들이 유독 많이 보였다. 피식 웃음이 나면서 저들도 20년 전 우리처럼 간절한 소원을 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랑 꼭 이루어지게 해주세요, 내 삶도 저 불꽃처럼 화려하게 빛나고 싶어요, 초라한 내 인생에도 환한 빛 비추어주세요, 간절한 마음일까 싶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환호하고 행복해 하는 사람들 속에서 점점 더 차분해지는 나를 보자니 ‘이건 또 뭐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여의도 한강 공원처럼 불꽃이 바로 머리 위에서 터지지 않아서 그런가? 20년 사이 로맨틱 세포가 다 죽은 건가?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다 보니 아이들 데리고 집에 갈 걱정부터 드는 현실 아줌마가 된 건가? 여러모로 되짚어 보지만 불꽃 앞에서 차분해진 내 맘을 설명하기엔 충분치 않다고 느꼈다.
축제가 끝나 공원을 빠져나가는 엄청난 인파를 피해 이촌 한강 공원을 조금 더 거니는데 ‘불꽃보다 아름다운 장면이 내 삶에 이미 많았는 걸’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불꽃축제 내내 들뜨지 않던 이유를 찾고 있던 내게 마음 깊은 곳에서 먼저 진실의 답을 찾아 올린 것이다. 정말? 내 삶이 그랬던 거야? 곰곰히 되씹어 보는데 맞네, 불꽃 같은 극강의 화려함은 없지만 그보다 더 오래, 뭉근하고 은은하게 빛을 발하던 시간들이 많이 있었네 하며 끄덕이게 된다. 한 사람을 오래 사랑한 시간, 나를 내어 놓고 상대를 받아들이던 시간, 원치 않았지만 멈춰서 기다려야 했던 시간, 우리가 되기 위해 손을 잡던 시간은 모두 불꽃처럼 화려하진 않았지만 내 인생 곳곳에 온기를 건넨 환하고 아름다운 시간들이었다. 내 인생에도 불꽃처럼 화려하고 환한 빛이 깃들길 바랬던 20대 시절을 다 보낸 나는, 어느새 내가 만나는 이들의 얼굴과 삶에 환한 빛이 깃들길 바라는 40대 후반이 되어있다.
나는 지금도 영혼이 깨끗한 이를 만나거나 진실로 닮고 싶은 이를 만날 때면 속에서 파밧! 불꽃이 인다. 절대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결코 넘을 수 없을 것 같던 산을 넘어선 순간에도 감동의 별비가 내리곤 한다. 실은 생의 매 순간 내 안에서 불꽃을 이어왔다는 사실, 내 삶에 불꽃보다 아름다운 순간이 많았다는 발견은 20년 만에 찾은 시시한 불꽃축제가 건넨 새로운 발견이었다. 이런 발견이라면 가족 모두와 늦은 시간까지 고생한 보람이 있는 거다. 강 바람맞으며 기다리고, 지옥철로 되돌아왔어도 보람 있는 시간인 거다.
* 매달 13일 ‘마음 가드닝’
글쓴이 - 이설아
<가족의 탄생>,<가족의 온도>,<모두의 입양>을 썼습니다. 세 아이의 엄마이자 입양가족의 성장과 치유를 돕는 건강한입양가정지원센터 대표로 있으며, 글쓰기 공동체 <다정한 우주>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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