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서는데 공기가 무겁다. 분명 아침에 나설 때만 해도 아이 셋과 남편 모두 해맑은 얼굴이었는데, 저녁 6시에 재회한 남편은 머리에 작은 뿔이 난 악동처럼 씩씩거리고 있다. 큰 녀석 둘은 방에서 볼멘 목소리로 얼굴 없는 인사를 건네고, 나의 귀가만을 기다렸던 막내가 시무룩한 얼굴로 인사를 한다. 옷을 갈아입고 막내의 이름을 부르니 방문을 빼꼼 열고 들어오는 녀석의 눈시울이 이미 빨갛다. 두 팔을 벌리자 내 품으로 달려와 훌쩍 훌쩍 울기 시작하는 녀석. 형아 친구들이 와서 놀다가 사이다를 왕창 쏟았는데 그게 책상 서랍까지 다 들어가서 아빠가 엄청 화냈다며 사건의 개요를 전한다. 내 그럴 줄 알았지. 익숙한 시나리오다.
엄마가 없는 동안 집안 분위기가 냉랭해지는 경우의 수는 몇 없다. 남편은 큰 결정은 대인배처럼 하면서 이런 유의 작은 일(주로 집이 어질러지거나 더럽혀지는 상황)에선 자주 평정심을 잃는데, 느긋한 대충 대장 둘째가 쏟아진 사이다를 대충 닦고 노는 모습에 결국 폭발한 것 같았다. 끈적해진 방과 책상 다 드러내고 닦아냈으니 얼마나 화가 많이 났을꼬. 위의 두 녀석은 아빠를 오랜 세월 경험한지라 남편의 큰 소리에도 그리 상처받지 않지만(아빠는 뒤끝 없는 사람이란걸 안다) 어린 막내는 이 상황이 무섭기만 했나보다.
“완아, 아빠가 화내서 무서웠어?”
울고 있는 아이의 등을 쓰다듬으며 묻는데 세차게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럼 문제를 일으킨 형한테 화난 거야? 그것도 아니란다. 그럼... 엄마가 같이 없어서 슬펐어? 절레절레. 오늘따라 아이 마음 명중시키기가 어렵다. 그럼 완이가 얘기해 줄래, 무엇 때문에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고개를 들고 눈가를 문지르며 감정을 추리던 막내가 한참의 침묵 뒤에 말을 이었다.
“모두들 좋았는데.... 오늘 오후에 아빠랑 게임도 했고, 형아 친구가 와서 신났고, 누나랑도 재밌었는데.. 흑흑.”
‘모두가 좋았는데’로 시작된 막내의 첫마디가 의외다. 화를 낸 아빠가 싫다든가, 말썽 일으킨 형이 밉다든가의 단순한 감정이 아닌, 상황 전반과 가족의 상태 모두를 아우를 때에야 나올 수 있는 감정의 묘사 아닌가.
“오늘 모두들 좋았는데... 갑자기 그런 일이 생겼고... 아빠는 화가 났고... 나는 어려서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 엉엉”
속상했구나. 단순히 무서운 것도, 화난 것도, 짜증이 난 것도 아닌, 이렇게 마무리된 상황에 속이 상한 거였구나. 분명 모든 것이 좋았는데, 아빠랑도 좋았고 형 누나도 즐거워서 행복한 토요일 오후였는데 느닷없는 사건으로 인해 모두의 얼굴이 험악하게 바뀐 이 상황을, 열한 살 짜리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는 어려서 뭘 어떻게 할 수 없었다’는 고백에서 상황을 어떻게든 정돈하고 가족의 마음을 잘 연결하고 싶었던 어린 마음이 읽힌다. 아직 어리고 단순해서 그 마음을 조금만 문질러주면 금세 풀어질 거란 생각했던 내가 틀렸다. 그 작은 마음 안에 삶의 아이러니, 인생의 느닷없음, 사랑하는 이들을 향한 복잡한 감정이 가득 차올라 아이도 모르는 사이 여러 갈래로 섬세한 길을 낸 것이 보인다. 더 이상 몇 개의 단어로는 설명이 안되는 깊고 복잡한 여러 얼굴의 감정이 아이 안에 싹을 틔우고 있다.
“완이가 속상해서 눈물이 났구나. 아빠랑 형이랑, 누나랑 너무 좋은 토요일 오후였는데 갑자기 이런 일로 모두의 기분이 상하면서 망쳐진것 같아 속상했구나.”
아이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정말 그랬겠다. 살다 보면 가끔 원치 않은 이런 일이 생기더라. 엄마라도 너무 속상했을 거 같아. 가족 모두가 속이 상했으니 지금은 모두에게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아. 우리 중 누구도 일부러 마음을 상하게 하려 한 사람이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 조금 지나면 마음이 풀릴 거야."
품에사 가만히 듣던 아이는 마음속 부유물이 가라앉는지 훌쩍거림도 잦아든다. 가만히 심장소리를 들으며 안겨있던 아이가 슬그머니 몸을 움직이더니 옆 침대에 벌렁 드러눕는다. 가만히 천정을 바라보다, 몸을 옆으로 뉘여 침구에 베인 엄마 냄새도 맡으며 뒹굴거리다 어느새 맑아진 얼굴로 일어나 앉는다.
“엄마, 이제 됐어요.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몰라보게 자란 아이의 마음. 맑아진 얼굴로 방문을 나서는 열한 살 마음이 기특하다. 마음이 하나의 얼굴이 아닌 날은, 선명한 시야를 얻기까지 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 것 같다. 조금 더 템포를 늦춰 마음을 어루만져야 하는 날인 것 같다.
* 매달 13일, 23일 ‘마음 가드닝’
글쓴이 - 이설아
<가족의 탄생>,<가족의 온도>를 썼고 얼마 전 <모두의 입양>을 출간했습니다. 세 아이의 엄마이자 입양가족의 성장과 치유를 돕는 건강한입양가정지원센터 대표로 있으며, 가끔 보이지 않는 가치를 손에 잡히는 디자인으로 만드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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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입양가정지원센터 www.guncen4u.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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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용
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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