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님 안녕하세요.
지난 레터를 보내드린 날 강릉에 큰 산불이 났습니다. 산불이 민가까지 번지고, 화재로 인한 소실 규모도 커 복구 작업을 계속하고 있지요. 아무쪼록 피해 지역의 정상화가 하루빨리 이뤄지길 바랍니다.
오늘 보내드릴 잊혀진 여성들 63번째 레터는 우울증과 여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시작할게요.
* 관련 사건 정황 설명의 묘사가 불편할 수 있습니다. 참고 부탁드립니다.
며칠 전 한 고등학생이 SNS 라이브 방송을 켜고 강남의 빌딩에서 투신하여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의 라이브 방송에 접속해 있던 20여 명의 사람 중 일부가 경찰에 신고하였으나 학생의 목숨을 구하지는 못했습니다. 투신 직전까지 한 20대 남자가 학생과 같이 있었고, 남자는 온라인 사이트에서 학생과 투신 모의를 하고 당일 처음 만난 것으로 경찰은 밝혔습니다.
해당 학생이 우울증 커뮤니티 사이트(디씨인사이드 우울증 갤러리)에서 활동하였고, 사이트 내 특정 무리의 이용자들에 의해 범죄 피해를 당했다는 의혹이 여러 기사에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이번 사건으로 인해 우울증 커뮤니티 사이트 내의 우울증을 앓고 있는 미성년자 여성을 대상으로 한 남자 유저들의 성적 착취가 만연하게 발생하고 있다는 목소리들이 높아지고 있죠.
우울증은 오랫동안 인간과 함께했지만, 질병이라기보다는 개인적 실패나 약점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특히 여성들의 슬픔, 불안감 그리고 우울감은 ‘히스테리적’이거나 ‘미친’ 여성들의 특징으로 치부되었죠. 19세기에 우울증 증상을 보인 여성들은 그들의 감정 및 신체 증상을 묘사하는 ‘히스테리아’라는 용어로 진단받았고, 전두엽 절제 등의 가혹한 ‘치료’를 받았습니다. 이는 우울증을 겪는 여성들이 그들의 가족과 공동체로부터 배척당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서도 우울증은 여전히 합법적인 의학적 상태로 널리 인식되지 않았습니다. 우울증을 겪는 여성들은 자신의 정신 질환을 스스로 ‘극복’하도록 강요받았고, 자신의 정신 건강과 상관 없이 가정에서의 역할을 완수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치료를 호소하는 여성들은 나약하고 관심을 끌기 위한 사람으로 여겨지곤 했죠. 20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우울증은 의학적 상태로 인식되게 되었지만, 여성들은 지금도 계속해서 우울증을 겪고 있습니다.
여성은 삶에서 남성보다 우울증을 경험하는 비율이 두 배나 높습니다.(여성의 평생 우울증 유병률 6.9%, 남성 3.0% 수준, 2017 기준) 이러한 현상에 대해 성호르몬의 특성상 여성이 감정 기복을 심하게 겪고 우울증에도 취약하다고 설명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여성이 슬픈 감정에 침잠하는 경향이 있어 남성보다 높은 비율로 우울증을 겪는다는 심리학적 설명도 있고요. 이와 같은 말들은 여성이 태생적으로 우울증에 취약하다는 사회 통념을 강화하곤 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여성은 우울증을 겪기 쉽게 태어나는 걸까요?
중앙대 사회학과의 이민아 교수가 펴낸 책 <여자라서 우울하다고?>에서는 통념이 여성 우울증의 원인과 결과를 뒤집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여성의 우울이 태생적 한계 또는 생래적 원인이 아닌 사회적 질병이라 말합니다. “여성의 정신 건강이 나빠지게 된 원인에는 여성의 삶을 둘러싼 구조적이고 문화적인 원인”이 주요하고, 이에 따라 신경전달물질의 불균형 및 심리적 취약함이 유발되어 우울증이 생긴다는 것이죠. 그는 우울증의 원인에 있어 성호르몬의 차이가 없다는 게 아니고, 그 영향이 지나치게 과장되어 여성을 본질적으로 ‘우울증에 잘 걸리는’ 존재로 환원시켜 버린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2017년부터 발견되는 청년 여성의 우울증 증가세는 성별화된 생애 과정, 즉 젠더(사회적 성별)을 원인으로 주목합니다. 노동시장의 차별과 성범죄에 대한 집단적 트라우마가 현재 청년 여성들의 정신 건강에 절망감과 우울감으로 이어졌을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민아 교수는 성평등한 나라일수록 여성과 남성 사이 우울 수준 차이가 작고 사회 전반의 우울 수준도 낮다는 유럽 23개국 연구 결과를 인용하였습니다. 즉, 성별로 인한 기회나 경제적 참여가 제한되지 않는 성평등한 사회에 답이 있다는 것입니다.
*관련 기사 전문 : “여성은 원래 우울하다고?...그것은 사회적인 질병입니다” (한겨례 2021-05-04)
우울증을 겪는 여성과 남성이 있을 때, 현실은 여성에게 더 가혹합니다. 우울증을 겪는 여성들은 종종 취약한 상태에 놓이게 되는데, 이 취약성을 감지하고 착취하려 접근하는 남자들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특히 트위터가 이러한 범죄의 온상이라는 것도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트위터가 신고 메커니즘과 사용자 차단 등의 조치로 노력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문제 해결은 요원해 보입니다.
이런 남범죄자들은 우울증이나 다른 정신 건강 문제로 어려움을 밝히는 여성 계정에게 도움을 주겠다며 손을 뻗는 형태로 접근합니다. 처음에는 감정적 위로나 금전적 지원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그다음에는 더 많은 개인 정보를 공유하고 성적인 착취를 하기 위해 여성을 조종하고 압박합니다. ‘그루밍’이라고 불리는 수법이죠.
문제는 이러한 여성들 중에서는 미성년자도 많다는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우울증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도 미성년자들이 유저로 활동을 많이 하고, 오프라인 만남을 가질 때 성적 학대를 당하는 경우가 많다는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기본적인 신체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집단적 트라우마를 겪는 한국의 젊은 여성들은 그들의 정신 건강 상태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으로 인해 고립되고 외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이에 더욱 다른 사람들의 관심에 취약하게 되고, 착취에 취약하게 됩니다. 결국 사회가 청년을 우울증과 극단적 선택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죠.
유일한 해결책은 성평등한 사회로 가는 것입니다. 이는 누군가 대신 해 줄 일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목소리를 높이고 더 이상 우리의 자매를 죽이지 말라고 외쳐야 합니다. 변화의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의 정신 건강 상태를 잘 확인하고, 몸의 상처를 돌보듯 마음을 돌보는 것을 생활화해야겠죠.
오늘 레터는 이민아 교수의 당부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으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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