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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7년, 한 법정에서 납치, 시신 바꿔치기, 방화라는 죄목으로 한 젊은 여성을 화형에 처한다고 판결을 내립니다. 하지만 피고인석은 비어있습니다. 줄리 도비니는 절대 법정에 나타나지 않죠. 그는 선술집에서 결투를 하거나 여자친구랑 사랑의 도피를 하느라 바쁘고, 화형을 당하는 대신, 훗날 파리의 오페라 무대의 스타가 될 겁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이 여성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그리고 프랑스는 왜 그를 내버려 둘 뿐만 아니라 사회의 명사가 되도록 했을까요? 잊혀진 여성들 64번째 레터, 시작해 볼게요.
줄리의 인생은 처음부터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1672년 프랑스, 줄리 도비니는 국왕 밑에서 일하는 중산층 가정의 딸로 태어나 베르사유에서 자랐죠. 줄리의 부친은 단순히 흔한 하인이나 관료가 아니었습니다. 줄리의 부친은 국왕 휘하의 기병대장, 아르마냑 백작의 서기로 궁정의 시종을 교육시키고, 왕실 마굿간 책임자를 보좌하거나 왕의 시종들을 위해 일한 거죠. 왕실 마구간은 평범한 마사가 아니라 베르사유 궁전에서 가장 분주하고 결정적인 부서로서, 대장장이, 하인, 마구 제작자, 마부들 기타 고용인 등 천 명이 넘는 이들이 국왕의 다음 여정, 사냥, 전쟁에 왕실 말을 준비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줄리는 이런 정신 없이 분주한 곳에서 9살 때부터 살았고 덕분에 그는 출신에 비해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읽기, 쓰기, 그림, 춤, 승마술 노래 등 궁중교육뿐만 아니라 검술 훈련까지 받았으니 말이죠. 시동의 검술 훈련을 담당할만큼 숙련된 검술가였던 부친의 피를 이어받은 걸까요? 줄리도 검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알려집니다.
줄리는 남자아이들과 함께 교육과 훈련을 받으면서 남자아이들의 복장을 했으며, 공개적인 자리에서도 양복을 고집하였습니다. 14살이 된 줄리는 자신보다 32살이나 나이가 많은 아르마냑 백작의 정부가 되었습니다. 줄리 부친의 상사였던 아르마냑 백작은 줄리는 하급 귀족인 시에르 드 모팽과 결혼시키죠. 당시 프랑스에서는 이런 일이 흔했습니다. 그때 당시 결혼이란 그저 신분 상승을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결혼 후, 줄리의 남편은 프랑스 남부의 한직으로 파견되었고 덕분에 줄리는 파리에 남아 남편의 눈치 볼일 없이 백작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신분도 결혼생활도 없었지만 줄리는 자신을 라 모팽이라고 칭하고 다녔습니다.
아르마냑 백작에 금세 질려버린 줄리는 펜싱 사부인 세랑네스와 새로운 사랑에 빠집니다. 그들은 박람회나 주점에서 검술 시범을 해서 돈을 벌었는데, 어느 날 어떤 남자가 저런 뛰어난 검술을 지닌 자가 여자일 리가 없다고 하자 줄리는 그 자리에서 웃통을 벗었고 모든 관객들은 당황해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그러다 세랑네스가 불법결투로 사람을 죽이자 함께 마르세이유로 도망갑니다. (줄리는 평소에 모험을 꿈꿔왔고 이 사건을 도피의 기회라고 여겼습니다) 도망자 신세라 돈은 없었지만, 그들은 함께 떠돌며 여행하며 살았습니다. 필요한 돈은 불법적인 결투를 벌이거나 노래를 불러 마련했죠. 줄리는 공연을 할 때 남장을 했으나 여자인 것을 숨기지 않았으며, 워낙 노래를 잘해서 오페라 극단에서 가수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줄리는 또다시 새로운 사랑을 만나게 되는데요. 줄리의 오페라에 감탄한 여성 관객 중 하나였습니다. 17세기 프랑스는 동성애에 굉장히 부정적인 시대였기 때문에 줄리와 사랑에 빠진 여성의 모부는 자기 딸이 동성애자이고 심지어 상대가 남장 여자로 보이는 데다가 가는 곳마다 싸움판을 벌이는 라 모펭이라는 사실에 기겁 하며 자기 딸을 수도원에 가두어 버립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하면 줄리 도비니가 아니죠. 줄리는 연인을 쫓아 수도원에 성품을 받고 들어가 최근에 죽은 수녀의 시신을 빼돌려 연인의 침대에 눕혀 놓고 수도원에 불을 지릅니다. 이 일 때문에 줄리 도비니는 불꽃레즈라고 불리죠. 그는 그의 연인을 화재로 불 타 죽은 것처럼 위장한 뒤 혼란을 틈타 수도원을 연인과 함께 탈출해 3달 동안 동거를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연인이 그의 가족들에게 돌아가 버리면서 줄리가 저지른 일도 발각되버립니다. 줄리는 납치, 방화, 절도, 법정불출석으로 기소되어 화형 판결을 받게 됩니다. 이때 줄리는 고작 17세였습니다. 현재의 관점으로도 줄리가 저지른 일들은 꽤 충격적입니다.
하지만 17세기 프랑스에서 줄리같은 인물이 연명하는 것도 모자라 오히려 출세하게 되는 이유가 뭘까요? 놀랍게도 국왕 루이 14세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때는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던 시기로, 이는 귀족의 권리를 왕이 침탈한 것에 대한 항의였죠. 그 결과 루이 14세는 한평생동안 중앙집권적 군주제를 추구하면서, 자신의 왕권이 신성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임을 천명하죠. 이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예술을 후원하는 데 재정을 사용하면서 국왕이 신으로부터 권력을 부여받았음을 대중, 귀족 그리고 교회에게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여기서 교회가 중요한데요. 루이는 독실하긴 했지만, 교회 고위 성직자들이 정치의 영역에 끼어드는 것을 원치 않았거든요. 군주 그 자체의 신성함이라는 컨셉은, 결국 교회 권력의 도전을 받게 될 때, 강력한 교황이나 추기경들에 의해 왕권이 훼손되는 것을 피하도록 만들죠. 이는 교권과 왕권이 서로 권력의 라이벌이자 동시에 협력자로 존재하게 하는 이상한 상황을 만들어 줍니다. 이런 경쟁은 예술에 대한 후원에서 이뤄졌습니다. 권력 구조에 대해 비판적인 예술가들을 루이가 뒤에서 밀어주면, 그들은 국왕 대신 교회에 그들의 분노를 집중시키리라 판단한 거죠. 따라서 풍자적이거나 심지어 사회를 발칵 뒤집는 예술가들을 격려하는 것이 왕의 최대 관심사였습니다. 마치 줄리 같은 예술가들이요. 줄리는 이를 잘 알고 과감한 행동을 일삼았습니다.
파리로 돌아온 줄리는 출세를 하고 싶어 하는데요. 그는 아르마냑 백작에게 오페라 가수의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편지를 쓰고, 편지를 받은 백작은 국왕에게 줄리의 행방을 알렸습니다. 루이는 그의 이야기를 대단히 흥미로워하면서 그를 개인적으로 만나 사면 해주고 무대에 오를 수 있도록 돕습니다. 당시 오페라는 예술적으로만 중요한 위치에 있던 것이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으로도 의미가 있었고, 이런 성공궤도에 오를 기회를 줄리가 놓칠 리가 없었죠. 그는 전쟁의 신인 팔라스 아테나로 데뷔하여 그 즉시 인기 배우로 등극합니다. 그는 빠르게 대사를 암기하는 능력이 있었고, 관객들은 그의 중성적인 외모와 뛰어난 검술 실력에 열광했습니다. 그는 무대 뒤에서 결투를 하거나, 많은 동료 배우들과 성별을 가지지 않고 잠자리를 가집니다. 이 시대에 그가 양성애자라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는 사실은 놀라운데요. 사실, 그는 왕족에 준하는 일정 수준의 보호를 받은 셈입니다. 주류 대중과 종교계는 양성애와 동성애에 대해서 여전히 격렬하게 반대했지만, 함정이 있었습니다. 루이 14세의 친동생이 동성애자였고, 드레스를 즐겨 입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루이는 그의 동생에게 미칠 결과에 대한 고려 없이 무작정 동성애를 단죄할 수 없었던 거죠. 즉 줄리는 시대를 잘 타고난 것입니다.
줄리는 결투를 가장 좋아했고 결투에서 10명 이상의 남자를 죽였거나 적어도 부상을 입혔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결투 금지법은 훨씬 더 엄격해졌으나 줄리는 당시 법이 남성에게만 적용된다는 이유로 왕실 사면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줄리는 왕조차도 보호해주기 힘들만큼 선을 넘는 행동을 계속하였습니다. 1695년, 루이의 동생은 줄리를 무도회에 손님으로 초대했습니다. 줄리는 양복을 입고 무도회에 참석하여 여성들과 밤새 춤을 추죠. 그러다 줄리가 여러 귀족이 눈독을 들이던 여성에게 키스 했을 때 사건이 터집니다. 그 장면을 보고 분개한 귀족 3명이 그 자리에서 줄리에게 결투를 신청합니다. 줄리는 그들을 밖으로 불러내어 하나씩 죄다 기절시킨 후 무도회장으로 돌아가 무도를 즐깁니다. 이번 사건은 유쾌한 선술집 싸움이 아니라, 왕실 행사중에 일어난 범죄였습니다. 루이는 심기가 불편했죠. 교회에 저지른 이전의 범죄와는 달리 이번 사건은 왕에게 저지른 범죄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줄리는 극대노한 루이를 피해 브뤼셀로 도망갑니다. 여론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면서, 독일인 공작과 바람을 피우죠. 그러고는 1년 뒤, 다시 파리로 돌아와 오페라에서 주인공을 차지합니다. 이때 줄리는 정착을 심지어 남편과의 재결합도 시도합니다. (놀랍게도 아직 남편이 있었습니다) 이후 몇 년 동안 그는 여러 번 왕실 초청으로 오페라를 선보였고, 1702년 그는 그를 위해 쓰여진 오페라에 출연하면서 커리어로 정점을 찍습니다.
줄리는 반복되고 예측가능한 삶에 줄리는 금방 염증을 느껴 심심할 때쯤 선술집에서 주먹다짐을 즐기다가, 피렌체 후작부인으로 알려진 여인과 진한 사랑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후작부인이 죽자, 줄리는 깊은 슬픔에 빠져 오페라를 은퇴하고 ‘진짜로’ 수녀원에 들어갔죠. 그리고 33세에 그곳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사형 선고를 두 번이나 피했지만 상사병은 피할 수 없었던 거지요.
그의 짧고 굵었던 인생은 그가 살았던 세상에 대한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줄리는 유명인이기도 했지만, 프랑스의 정치적 문화적 규범이 변화하는 틈새를 잘 비집고 들어갔던 똑똑한 사람이었으며, 사회적 압박 속에서도 스스로 주체적 삶을 개척했습니다. 줄리 도비니처럼 전무후무한 인물이 또 있을까요? 알려지지 않았을 뿐 역사 속에는 흥미로운 삶을 개척했던 여성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다음 주에도 재미있는 이야기로 찾아올게요!
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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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얍
요즘 유행하는 회귀물을 보며 말이 되나 싶은 적이 많았는데... 줄리 도비니에 비하면 오히려 심심했네요. 멋진 여성을 또 한 명 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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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랄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였어요. 대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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