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움직이는 여자들

여성 지도자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요?

2025.01.28 | 조회 6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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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여성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익명이었던 여성들 - 우리의 불만을 기록합니다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도널드 트럼프가 제47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다시 백악관에 입성했습니다. 트럼프의 복귀는 세계 정치사에서 또 하나의 굵직한 장면으로 기록되겠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대통령’이나 ‘지도자’라는 단어 앞에 자연스레 남성을 떠올리곤 합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선입견과는 달리, 전 세계에는 수많은 여성 지도자들이 존재하며, 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세상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잊혀진 여성들 이번 뉴스레터에서는 여성 지도자들이 남긴 흔적들을 살펴보려 합니다. 그들이 만들어낸 변화는 단순히 개인의 성취를 넘어, 더 나은 사회와 더 평등한 세상을 꿈꾸게 합니다. 이번 뉴스레터가 구독자님에게 그 여정의 첫걸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세실 비튼이 촬영한 대관식 공식 사진 ⓒWiki
세실 비튼이 촬영한 대관식 공식 사진 ⓒWiki

엘리자베스 2세(1926–2022)는 1952년부터 2022년까지 영국의 군주로 재위하며 70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영국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입니다. 그가 즉위한 1952년, 당시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재건 중이었고, 제국주의의 쇠퇴와 함께 새로운 세계 질서가 자리잡기 시작하던 시점이었습니다. 그가 군주로서의 역할을 시작한 것은 큰 역사적 변곡점이었으며, 그의 재위 기간은 영국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변화를 지켜보는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의 일대기는 그의 리더십과 국가에 대한 헌신을 잘 보여줍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더 크라운>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런던을 공습하자 당시 총리 윈스턴 처칠이 왕실에 캐나다로 망명할 것을 권유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영국 왕실은 이를 거부하며, 왕실 구성원들은 끝까지 수도에 남아 국민들과 함께 국가적 재난을 극복하기로 결심합니다. 당시 14세였던 엘리자베스 2세는 대국민 연설을 통해 전쟁으로 지친 국민들을 위로하고, 왕실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정비병으로 복무하는 등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는 국가적 위기에서 미래의 지도자가 국민들의 사기를 북돋고 항전 의지를 고취하는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어린 엘리자베스는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시기 영국 여성국방군(ATS)에 입단해 트럭 운전을 배웠다 ⓒBBC
어린 엘리자베스는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시기 영국 여성국방군(ATS)에 입단해 트럭 운전을 배웠다 ⓒBBC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영국은 많은 역사적 변화를 겪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경제적 어려움, 식민지 독립, 냉전 시대의 글로벌 정치, 그리고 유럽연합(EU)과의 관계 변화 등 다양한 국제적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이끄는 영국은 과거의 제국주의 국가에서 현대적인 국가로 변화해 갔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끊임없이 군주로서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했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의 군주로서의 재위는 단순히 영국 내에서의 정치적 안정만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존재로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에서 영국과 다른 국가들 간의 관계를 이어갔죠. 그리고 그가 정치적 중립성을 유지하면서도 군주로서의 역할을 다한 것은 영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정치 문화와 제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는 또한 영국의 위상과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영연방은 7개국 참여체에서 56개국으로 확장되었으며, 이는 그의 외교적 노력 덕분입니다. 특히 1961년 가나를 방문한 일화는 그의 대범한 외교술을 잘 보여줍니다. 당시 가나의 은크루마 대통령은 소련과의 관계 발전을 모색하며 영연방 탈퇴를 고려하고 있었고, 영국 정부는 폭탄 테러 위협을 이유로 엘리자베스 2세의 가나 방문을 반대했으나, 그는 이를 강행하며 "나는 영화배우가 아니에요. 나는 영연방의 수장입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의 순방은 성공적이었고, 특히 당시 상상하기 어려운 백인 여왕과 흑인 대통령의 사교댄스를 통해 가나를 영연방에 남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정치적 이념은 '중립적 군주제'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군주로서 그는 특정 정치적 이념이나 당파에 치우치지 않고, 영국 내외의 다양한 정치적 상황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이는 그가 평생 동안 지키려고 했던 중요한 원칙 중 하나였으며, 영국 왕실의 정치적 영향력을 최소화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임을 확실히 하여 정부와 의회의 결정을 존중했으며, 군주제로서의 역할을 국가의 안정과 화합을 유지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 생전 모습리자베스 여왕 생전 모습ⓒWiki
엘리자베스 여왕 생전 모습리자베스 여왕 생전 모습ⓒWiki

엘리자베스 2세는 군주제로서의 역할을 넘어 영국 왕실을 현대 사회의 중요한 상징이자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시킨 주역이기도 했습니다. 전통적으로 국왕은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적 존재로 여겨지지만, 최근 몇몇 국가들에서는 군주제의 존재 의미가 퇴색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일본, 태국, 네덜란드, 스페인, 노르웨이, 덴마크 등 군주제를 유지하는 나라들이 있지만, 그 나라의 왕이나 여왕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그 나라 사람이 아닌 이상 드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는 왕실을 대중과 가까운 이미지로 만들어, 영국 왕실을 현대 사회에서 실존하는 동화적 환상으로 변모시켰습니다. 왕실 구성원들의 일상과 행동은 곧 영국을 대표하는 문화로 자리잡았으며, 그들의 식사, 의상, 행사 등은 대중의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먹고 마시는 음식은 영국의 대표적인 음식이 되었고, 왕실의 의상은 곧 패션 트렌드가 되었습니다. 특히 영국 왕실의 결혼식은 전 세계적인 행사로 자리매김하며, 왕실은 그 자체로 국제적인 셀럽이자 뉴스거리가 되었습니다.

1957년 여왕이 처음으로 성탄절 대국민 방송을 하는 모습 ⓒBBC
1957년 여왕이 처음으로 성탄절 대국민 방송을 하는 모습 ⓒBBC

영국 왕실은 국가 경제에 실질적인 기여를 하는 중요한 자산으로, 2017년 브랜드 파이낸스의 평가에 따르면 영국 왕실의 경제적 가치는 675억 파운드(한화 약 100조 원)에 달하며, 매년 약 17억6천만 파운드(약 2조7천억 원)의 가치를 창출합니다. 반면, 왕실 유지를 위한 세금은 연간 약 2억9,200만 파운드로, 경제적 측면에서도 영국 국민에게 실질적인 이득을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나라가 어려운 시기일수록 리더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집니다. 70년 동안 영국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온 엘리자베스 2세의 서거 후, 찰스 3세가 왕위에 오면서 일부 사람들은 변화에 대한 혼란을 겪었습니다. 특히 여왕의 전통에 대한 문화적 고정관념이 여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에, 찰스 3세가 왕으로서의 역할을 맡게 된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왕이라는 역할이 여왕과는 다른 이미지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농담으로 찰스 3세를 '남여왕'이라고 부르기도 했죠. 찰스 3세가 국왕으로서 영국 국민들의 신임을 받을 수 있을지, 영국 왕실은 이제 중요한 시험대에 서 있습니다. 군주제의 지속성과 왕실의 역할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논의의 중심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최초의 여성 총리 골다 메이어

골다 메이어 ⓒWiki
골다 메이어 ⓒWiki

골다 메이어는 이스라엘 건국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정치가로, 이스라엘 역사상 네 번째 총리이자 유일한 여성 총리로 기억됩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독립 전쟁과 국가 건설에 중요한 기여를 했으며, 국가의 경제와 사회 발전을 위해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유대인 가정에서 자란 그는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했습니다. 1906년, 가족과 함께 미국 밀워키로 이주한 골다는 당시 유대인 커뮤니티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시온주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교육을 받으며 정치적 의식을 키워갔고, 유대인 국가 건설의 꿈을 꾸었습니다. 1921년, 골다는 이스라엘 땅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시온주의 활동에 뛰어들었으며 노동당에 가입했죠. 시온주의(Zionism)는 유대인의 고향인 이스라엘 땅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자는 정치적 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발생했으며, 주로 유대인들의 민족적 자주권과 독립을 강조하는 이념을 따릅니다. 시온주의의 목표는 유대인들이 역사적으로 그들의 고향인 팔레스타인 지역에 돌아가 독립적인 국가를 세우는 것이었으며, 이는 1948년 이스라엘 국가의 건국으로 실현되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독립을 위한 정치적 기초를 다지기 위해 일하면서, 교육, 사회 복지, 그리고 노동정책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 선언이 있던 해, 골다는 국가 건설에 있어 중요한 외교적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독립을 지지할 국제적인 지원이 절실히 필요했고, 골다는 이를 얻기 위해 전 세계를 누비며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특히, 미국과 소련의 지원을 이끌어내며, 이스라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받도록 했죠. 이스라엘의 독립 전쟁에서 골다는 중요한 외교적 및 정치적 결정을 내리며 국가의 미래를 지키는 데 큰 역할을 수행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총리 시절 골다 메이어 ⓒWiki
이스라엘 총리 시절 골다 메이어 ⓒWiki

1969년, 골다는 이스라엘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여성 총리로 취임했습니다. 그는 총리로서 이스라엘 국가의 경제, 안보, 외교 정책을 총괄하며 이스라엘의 안정과 번영을 위한 중대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중동 정세에 따라 이스라엘의 운명은 자주 위태로웠습니다. 1970년 9월,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이 과격파 게릴라에게 암살당하자 아랍권에서 강경파가 득세했습니다. 후임 사다트 대통령은 이스라엘의 점령지 반환을 요구하며 소련의 지원을 받아 군사력을 확장해갔고, 시리아 역시 군비를 증강하며 제4차 중동전쟁의 조짐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리더십 하에 이스라엘은 여러 도전과 위기를 겪으면서도 국가를 지탱할 수 있었죠. 

1973년 10월 6일 새벽, 마침내 이집트와 시리아군은 소련제 탱크와 미그 전투기를 앞세워 남북 2개 전선에서 이스라엘을 향해 물밀듯이 진격했습니다. 전쟁 시작 3일 만에 이스라엘 요새 대부분은 이집트군에게 점령당했고, 북부의 골란 고원은 시리아군에게 점령당했습니다. 이 전쟁은 골다에게 최대의 위기를 안겨주었습니다. 개전 9시간 전, 이집트와 시리아가 전쟁을 결심했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선제공격 명령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먼저 공격을 가하면 침략자로 몰릴 것이며, 미국이 대이스라엘 무기 금수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18일간 이어진 제4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군은 약 2,500명의 사망자와 7,500명의 부상자 등 1만 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냈습니다. 당시 인구 300만 명 남짓한 이스라엘에겐 감당하기 어려운 손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 덕분에 소련의 대아랍권 원조를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총리(왼쪽)가 생전에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과 만나는 장면 ⓒWiki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총리(왼쪽)가 생전에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과 만나는 장면 ⓒWiki

골다가 선제공격의 유혹을 뿌리친 덕분에 미국의 지원을 얻었지만, 분노한 민심은 그를 이해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집무실에는 자식과 남편을 잃은 여인들이 찾아와 울부짖었고, 참전병사들도 “왜 적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지 않았느냐”고 항의했습니다. 배신자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골다는 “이스라엘이 추구하는 것은 전쟁이 아니라 평화”라고 설득했습니다.

골다는 1978년 12월 8일 병으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이스라엘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핵심적인 지도자로서, 정치적, 외교적, 경제적 측면에서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여성 정치인으로서 골다는 종종 '강경한' 또는 '남성적인 스타일'의 지도자로 언급되었고, 이는 그가 택한 군사적 해결책이나 강력한 리더십에서 비롯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골다는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 인류애를 보여주었고, 1972년 뮌헨 올림픽 당시 팔레스타인 테러단이 이스라엘 선수단을 습격해 10여 명의 선수를 살상했을 때, 특수 수사팀을 만들어 10여 년에 걸쳐 테러단 전원을 제거하는 냉철함도 지녔습니다. 단지 ‘자리’를 위한 성취가 아니라, 정직과 희생으로 일관한 그의 삶은 정치를 한다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를 새삼 느끼게 해주죠. 

세상을 움직이는 여성 지도자들

오늘날, 정치의 무대에서 여성 지도자들은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남성 중심의 정치 분야에서 여성들의 영향력은 지속적으로 확장되어 왔으며, 이제는 수많은 나라에서 여성들이 국가를 이끄는 지도자로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들은 단순히 상징적인 존재가 아니라, 각국의 경제, 사회, 외교, 환경 정책에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며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세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여성 지도자들에는 어떤 인물들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메테 프레데릭센 (Mette Frederiksen)

덴마크 총리 메테 프레데릭센 ⓒWiki
덴마크 총리 메테 프레데릭센 ⓒWiki

메테 프레데릭센은 덴마크의 두 번째 여성 총리이자 최연소 총리로, 1977년생으로 현재 45세입니다. 2001년 국회의원에 첫 선출된 후 다양한 정무직을 역임하며 경력을 쌓아왔고, 2019년 사회민주당 당수로서 총리에 취임했습니다. 프레데릭센 총리는 좌파 경제 정책을 지지하면서도 이민 문제에 있어 우파 성향을 보이며, EU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해왔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덴마크 역사상 가장 회의적인 총리”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최근에는 미국의 그린란드 매입을 추진하는 트럼프 대통령과 갈등을 빚기도 했습니다.

 

카테리나 사케라로풀루 (Katerina Sakellaropoulou)

그리스 대통령 카테리나 사케라로풀루 ⓒWiki 
그리스 대통령 카테리나 사케라로풀루 ⓒWiki 

그리스 최초의 여성 대통령인 카테리나 사케라로풀루는 2020년 1월 취임했습니다. 법학을 전공한 그는 그리스 최고 행정재판소인 국무원에서 판사로 경력을 쌓았으며, 대통령직에 오르기까지 법률 및 환경 문제에 대한 높은 전문성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스 대통령직은 실권은 없지만 국가의 대표로서 중요한 상징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할라 토마스도티르 (Halla Tómasdóttir)

아이슬란드 대통령 할라 토마스도티르 ⓒWiki
아이슬란드 대통령 할라 토마스도티르 ⓒWiki

아이슬란드는 성평등 지수가 선두권인 나라로, 28년 만에 두 번째 여성 대통령인 할라 토마스도티르(55)가 당선되었습니다. 토마스도티르는 2일(현지시각) 아이슬란드 대통령 선거에서 34.3%의 득표율로 2위인 카트린 야콥스도티르 전 총리(25.2%)를 제치고 승리했습니다. 이번 선거는 투표율 80.8%로 아이슬란드 대선 역사상 1996년 이후 가장 높은 투표율을 기록하며 국민들의 높은 관심을 끌었습니다.

특히 이번 선거에서는 득표율 상위 3위가 모두 여성 후보들이 차지하며 주목을 받았습니다. 토마스도티르는 아이슬란드 최초 여성 상공회의소 회장을 역임하며, 2016년 대선에서 27.9%의 득표율을 기록한 후 이번에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는 여성 역량 강화를 위한 교육과 이니셔티브 강화를 통해 잘 알려져 있으며, 선거 과정에서 젊은 층에게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토마스도티르는 당선 후 인터뷰에서 "세대 간 평등과 정의를 위해 일할 것이며, 젊은이들이 기다리는 미래를 위해 일하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기성 세대는 젊은 세대가 누릴 기회를 희생하면서까지 이익이나 성장을 취할 권리가 없다”고 강조하며, 젊은 층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을 다짐했습니다.

또한, 아이슬란드의 새 정부는 11명 중 7명이 여성인 내각을 공개했으며, 이는 아이슬란드가 성평등 지수에서 14년 연속 1위를 차지한 성평등 선도 국가로서의 입지를 잘 보여줍니다. 프로스타도티르 총리는 경제 안정을 목표로 금리 인하 및 재정 긴축을 추진할 계획입니다. 아이슬란드는 성차별이 적고 이를 철폐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온 문화가 반영된 결과로 이러한 변화가 이루어졌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몰랐던 사이, 세계 곳곳에는 다양한 여성 지도자들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리더십과 비전은 각기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사회 변화와 발전을 이끌고 있죠.

여성들이 만들어가는 미래를 응원하며 이번 주 뉴스레터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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