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Ep2. 죽음 이전의 기억

2023.12.24 | 조회 1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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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logue

의원면직&공공기관 퇴사 유경험자이자 현재는 노무사 도전중인, 최종꿈은 동네책방 주인인 프로퇴사러의 잔잔한 글쓰기 모음

예상대로 일이 흘러갔다면, 내가 기준으로부터 받아야할 메시지는 부고메시지가 아니라 내일 약속장소를 정하기 위한 메시지가 되었어야했다. 

 

 

휴대폰으로 호출한 택시가 도착했다. 어플상으로 이미 목적지를 설정해두고 결제까지 끝낸 상태라 택시를 탄 이후로는 곧바로 눈을 감아 생각에 잠길 요량이었다. 30분 뒤에 장례식장에 도착할 예정이니, 30분동안만큼은 다시 곰곰이 이전의 일들을 복기해낼 수 있겠다싶었다.

언젠가 그런 생각을 했다. 앞으로의 삶에 있어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면, 난 일단 울지 않고 그 일이 일어난 경위에 대해서 꼼꼼하게 판단해볼 것이라고. 우는 행위는 그 이후에 시작해도 늦지 않다고. 

 

 

최근 기준과 마주한 것은 다름아닌 부고 소식을 받기 2주 전이었다. 둘은 평소에도 금요일 저녁이면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던 가까운 사이였다. 직장에서 일어나는 일들, 앞으로의 삶에 있어서 갖가지의 고민들, 동시에 정치나 역사 이슈도 그들의 대화에 있어 꼭 빠지지 않는 주제이기도했다. 어린시절부터 함께해온 친구라고하여 모두가 다 기준과 은서처럼 두터운 관계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고 그 흐르는 삶을 살아낼수록 사람들은 각기 다양한 형태로 변했고, 그 시간 속에서는 분명 서로에게 오해를 하고 멀어지는 순간이 빈번해지기도했다. 

생각이 다르고 마음이 맞지 않아서 떠나보낸 오랜 인연들이 꽤나 있었던터라 은서에게 기준의 존재는 더더욱 특별했다. 서로가 상대방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로부터 오랜시간이 흘렀음에도 기준은 쉽게 변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 누구에게나 기준은 그랬다. 그것이 이따금씩 신기했고, 동시에 그런 기준이 언젠가는 어떠한 상황을 마주하게된다면 변하지는 않을까와 같은 막연한 걱정과 두려움을 가지기도 했던 은서였다. 언제나 동일한 모습을 지닌 이를 자신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두는 것은 그 무엇보다 든든하고 위로가 되는 일이긴했지만, 혹 그 대상이 갑자기 그 자리를 떠나게된다면 그로부터 입게되는 상실감은 말할 수 없이 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한 존재가 세상으로부터 사라졌다는 부고 소식을 전해들은 은서는 이 시간들이 문득문득 묘하게 느껴졌다. 점점 더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2주 전의 만남의 시간들을 다시금 머릿 속으로 복기해보려고했다. 그 때의 만남에 있어 별다른 이상한 부분은 없었는지, 기준과의 대화에 있어 어떠한 깊은 의미가 담겨진 문장이 존재했는지, 무언가 나에게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며 표시한 장면은 없었는지.. 그 때 만남의 상황들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늘 변함이 없는 친구인지라 그 당시의 만남에 있어서도 다른 때와 큰 변화가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금요일 퇴근 후 저녁시간에 만나 맥주를 곁들여 해장국을 먹었고, 또 언제나 그렇듯 대화가 길어져 밥집에서 치킨집으로, 또 치킨집에서 수제맥주집으로 이동해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던 우리였다. 

죽음을 짐작해볼만한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 있었나라고 생각에 머물다, 문득 은서에게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다. 

 

 

 

2주전, 서로의 대화가 막바지로 흘러가던 장소인 수제맥주집에서의 대화였다. 둘 다 꽤나 취한상태였는데, 기준이 문득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 

 

기준:  은서야, 너 유서 써본 적 있어..?

은서: 갑자기 웬 유서? 

기준: 요즘 유튜브에서 그런 영상을 본 적이 있었어. 흔들리는 삶을 마주할 때나 마음이 어려울 때, 유서를 써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 꽤나 큰 도움이 된대..!

은서: 생각해보니 일리가 있기도하네. 유서를 쓰다보면, 삶의 끝인 죽음을 사유하다보면, 자신이 마주한 삶의 모습들이 조금은 더 명확해질수도 있으니말이야. 죽음을 전제조건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면, 자신이 어떤 삶을 추구하고 원하는지에 대해 정확히 알아볼 수 있는 분명한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기도해. 물론, 유서를 쓰는동안은 굉장히 슬플 것 같기도하지만.

기준: 너도 그렇게 생각해? 나도 그래서 얼마전에 한 번 써봤다, 유서..!

은서: 진짜로? 어떤 느낌이었어?

기준: 은서 너 말처럼 편지지에 유서를 써나갈 때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많이 슬프더라구. 내가 곧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눈물샘이 고장난 사람처럼 눈물이 쏟아지기도하고, 무언가 후회되는 마음이 일렁이기도하고, 또 문득문득 내가 아끼는 사람들의 얼굴들이 스쳐지나가기도하더라. 이루지 못한 꿈이 생각나기도하고, 동시에 내 죽음이 다른 이에게 어떻게 다가갈지에 대한 생각을 하다보니 한 번 터진 눈물이 쉽게 멈추질 않더라. 죽음을 생각하니 지금의 삶이 어떤 의미인지 분명해지는 느낌이었어. 비록 힘든 삶이라할지라도, 써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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