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에 대령이 오면 좋겠는데요. 동생한테도 어느 모로 보나 훨씬 좋은 혼사가 될 거예요. 부채도 결점도 없고 1년 수입이 2000파운드라니! 물론 그 어린 혼외자만 제외하고요. 아유, 그 애를 깜박했네. 하지만 도제 수업을 받게 하면 돈도 얼마 안 들 테고, 그럼 그게 뭐 큰일이겠어요?
제인 오스틴, 『이성과 감성』 2권 9장, 김선형 옮김
윌러비가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는 비보를 들고 온 제닝스 부인은 브랜던 대령을 메리앤을 위한 새 신랑감으로 밀기 시작합니다. 대령의 좋은 조건을 열렬히 홍보하던 부인은 “어린 혼외자”를 깜박 잊었다가 “도제 수업을 받게 하면 돈도 얼마 안” 든다고 말하지요. 선의로 똘똘 뭉친 부인의 이 심드렁한 말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폭력적인지, 이 순간 독자가 화들짝 소스라치며 깨닫게 되는 건 아마도 작가의 시선 때문일 겁니다.
제인 오스틴의 세계에서 신사의 혼외자나 물려받은 재산이 없는 자식들은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야 했습니다. 본국에서 저버려지다시피 한 그들에게 두 번째 기회를 준 것은 팽창하는 제국이었지요. 나폴레옹 전쟁과 동인도 회사는 무일푼이지만 자존심이 강한 청년들을 빨아들였습니다. 제인 오스틴의 언니 커샌드라의 약혼자 토머스 파울 역시 결혼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서인도제도에 군목으로 갔다가 황열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지요. 엄청난 위험을 감수해야 했지만, 아들들은 그래도 해군에 입대하고 군목이 되고 사업을 벌여 세계에서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 운이 없는 신사의 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기 한 가지 사례가 있습니다. 부모를 일찍 여읜 세실리아 윈은 영국을 떠나 벵골로 향합니다. 자신을 어서 결혼시키고 책임을 벗으려는 부자 친척 어른에게 떠밀려 이른바 “낚시 선단(Fishing Fleet)”이라 불리는 배에 몸을 싣게 된 것입니다. 물론 물고기가 아니라 ‘남편감’을 낚는 임무를 띠고요. 동인도제도에 이르기까지 6개월의 여정은 말로 할 수 없이 험난하고 고생스럽습니다. 아름다운 세실리아는 나이는 많지만 재산도 굉장히 많은 남자와 결혼해 ‘당당히’ 목적을 달성하고 돌아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화려하지만 불행한 결혼”이라고 입방아를 찧습니다. “운도 참 좋다”고도 쑥덕입니다. 여기에 대고 한 친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천재성과 감수성을 지닌 여자가 남편을 찾아 벵골까지 가서, 판단력이 있다 한들 인성을 판단할 기회도 없이 폭군일지 바보일지 모르는 남자와 결혼해야 하는데, 그걸 행운이라고 하는 거야?” 그러자 다른 친구가 냉소적으로 대답하지요. “동인도제도로 남편 찾으러 간 게 처음도 아닌데 뭐. 내가 그만큼 가난했다면 상당히 재밌는 일일 것 같은걸.”
이 이야기는 허구입니다. 1792년 열여섯 살이었던 제인 오스틴이 쓴 습작 소설 “캐서린 또는 화원 花園 이야기(Catharine or the Bower)”에 등장하는 곁가지 일화입니다. 하지만 세실리아와 메리 윈 자매의 상황은 오스틴의 고모들이 직접 겪은 그대로였답니다. 아버지 조지 오스틴에게는 누나와 여동생이 있었는데, 세 남매는 마치 동화처럼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고 계모에게 구박을 받다가 매정한 친척 집으로 쫓겨나고 맙니다. 아들 조지 오스틴은 대학에 진학해 목사가 되었지만, 누나 필라델피아는—브랜던 대령의 혼외자를 두고 제닝스 부인이 얘기한 그대로—열다섯 나이에 모자 제작 장인의 도제로 보내지지요. 막냇동생 리어노라는 귀부인의 말 상대 친구로 자리를 구해 흡사 『맨스필드 파크』의 패니 프라이스처럼 대저택에서 객식구로 살게 됩니다. 하지만 아름답고 모험심 넘치는 필라델피아는 모자를 만들어 팔며 여생을 보낼 수 없다고 판단해 “낚시 선단”에 몸을 싣습니다. 당시 여성 모자 제작자들의 노동조건은 형편없었습니다. 따라서 여자들이 부업으로 몸을 파는 일도 흔했다고 합니다. “코벤트가든의 모자 만드는 여자”라는 표현이 성매매 여성의 은어로 쓰이기까지 했으니까요. 필라델피아는 탈출을 결심했습니다. 말하자면 제인 오스틴은 조지 왕조 시대의 결혼 시장에서 여자들이 다반사로 겪는 가혹한 부조리는 물론 매정한 현실에 맞서 놀랍도록 용감하게 자기 운명을 개척한 여자들의 삶을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목격했고,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10대의 습작 시절부터 이미 냉정하면서도 풍자적인, 작가로서의 고유한 관점을 정립했던 것이지요.
필라델피아 오스틴, 즉 제인 오스틴의 “필라” 고모는 머나먼 이국에서 목적을 달성합니다. 1752년 다른 “열 명의 미인”과 함께 봄베이캐슬호에 올랐던 필라는 얼마 후 타이소 행콕이라는 부유한 의사와 결혼합니다. 무일푼으로 온종일 모자에 깃털을 붙이던 재봉사 아가씨는 이제 캐시미어 숄과 고급 실크를 두르고 수십 명의 하인을 부리게 되었지요. 하지만 점잖고 매력 없는 타이소가 필라의 인생에서 유일한 남자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필라와 타이소 행콕 부부는 캘커타(지금의 콜카타)로 이주하면서, 동인도 회사에 서기로 입사했다가 초대 인도 총독이 된 입지전적 인물 워런 헤이스팅스를 만나 친분을 맺게 되는데요. 오래 아이를 갖지 못했던 부부가 낳은 딸 일라이자가 사실 헤이스팅스의 핏줄이라는 소문이 파다했거든요. 워런 헤이스팅스는 소문을 부인하지도 인정하지도 않고 일라이자의 대부로서 끝까지 사랑과 후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당돌한 필라 고모와 비범한 딸 일라이자 행콕은 제인 오스틴의 잔잔한 세계에 파란만장한 드라마를 선사해주었습니다. 특히 일라이자 행콕은 제인 오스틴의 허구적 상상력에 조금 더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습니다. 부모의 전폭적 지지를 받아 최고의 교육을 받은 일라이자는 그림, 음악, 자수뿐 아니라 수학과 글쓰기에도 뛰어났다고 해요. 일라이자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 필라와 함께 유럽 전역을 여행한 후 1779년 파리에 도착합니다. 일라이자는 베르사유궁에서 프랑스 왕족을 만나고 나서 하프를 켜는 모습으로 자기 초상화를 상아에 미니어처로 그려 삼촌 조지 오스틴의 목사관에 선물로 보내주지요. 파리의 사촌언니에게서 상아 초상이 도착했던 때 제인은 다섯 살이었고 에드워드 오빠가 커다란 새집으로 혼자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1년 후 일라이자는 프랑스 귀족(이라고 주장하는) 변호사 장프랑수아 카포 드 푀이드(Jean-François Capot de Feuillide)와 결혼합니다. 푀이드 백작 부인이 된 일라이자는 1786년 스티븐턴의 목사관을 방문했고 열한 살이었던 제인 오스틴은 인도와 유럽의 이야기보따리를 들고 온 이 매력적인 사촌 언니에게 홀딱 반하고 말았지요. 이 언니는 당시 제일 좋아하던 소설인 새뮤얼 리처드슨의 『찰스 그랜디슨 경』에 등장하는 샬럿 그랜디슨의 화신이었거든요.
일라이자—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은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서 모험과 재기, 가끔은 스캔들에 근접하는 위험한 (성적) 호기심의 기호로 등장합니다. 『오만과 편견』에 등장하는 엘리자베스 베넷, 『이성과 감성』에서 윌러비에게 희생된 일라이자가 그렇습니다. 실제로도 일라이자 행콕은 끝까지 제인 오스틴의 상상력에 불을 지피는 삶을 살았습니다. 일라이자는 첫 남편 푀이드 백작이 프랑스 혁명기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자 영국으로 돌아와 제인이 가장 좋아했던 매력 만점의 오빠 헨리 오스틴과 다시 결혼했는데요. 그때 헨리 오스틴은 일라이자보다 열 살이나 어렸습니다.
동인도제도도 낚시 선단 이야기도 습작을 제외하면 제인의 주요 소설에 직접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윌러비와 메리앤이 나이 많은 브랜던 대령을 두고 농담을 할 때 적극 두둔하고 나서는 엘리너의 입장을 통해서, 우리는 제인 오스틴이 다른 사람의 경험이라는 창문으로 엿본, 저 바깥의 훨씬 더 넓은 세계에 어떤 시선을 보냈는지를, 또한 그가 진정 중요하게 생각했던 가치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부든 신분이든 젊음이든 아름다움이든 가진 자들이 편협한 우월감을 드러내며 타자를 모멸하는 순간, 제인 오스틴의 예리한 작가적 시선은, 늘 잠시 멈춰 똑바로 바라보며 머무릅니다. 그러면서 현상에 안주하지 않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경험하고자 하는 뜨거운 열망을 숨김없이 드러내지요. 오스틴의 소설에 스민 이 열망은 언제나 애틋하게 우리 마음에 여운을 남깁니다. 바로 그것이 필라 고모와 사촌 일라이자의 모험이 제인 오스틴의 문학에 남긴 작은 발자국일지도 모릅니다.
“언니는 대령을 싸고도느라 무례한 언사까지 서슴지 않네.”
“내가 싸고돈다는 그 사람은, 정도를 아는(sensible) 사람이야. 그리고 분별력(sense)은 언제나 내겐 매력적이지. 그래, 메리앤, 심지어 서른에서 마흔 사이의 남자라도 마찬가지야. 그분은 세상을 아주 많이 봤고 잘 아는 분이야. 해외에 나가본 적도 있고. 책도 많이 읽고 사유하는 정신의 소유자지. 여러 다양한 주제에서 내게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실 수 있는 분이기도 해. 내가 뭔가 물어보면 항상 훌륭하게 교육받고 타고난 천성도 선한 사람답게 흔쾌히 대답해주시거든.”
“그 말은 그러니까,” 메리앤이 경멸조로 말했지요. “동인도의 기후는 뜨겁고 모기들 때문에 짜증 난다는 말을 해줬다는 거구나.”
“내가 그걸 물어봤다면, 당연히 그런 대답도 해주셨겠지. 하지만 그런 건 내가 이미 알고 있던 바라서.”
“그렇다면,” 윌러비가 끼어들었어요. “아마 인도에는 대부호들이 있고, 금화도 많고, 다들 가마를 타고 다닌다는 고견을 피력하셨을지도요.”
“그분의 고견은 당신의 거침없는 판단보다는 훨씬 더 깊고 넓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네요. 대체 왜 그분을 싫어하는 거죠?”제인 오스틴, 『이성과 감성』 1권 10장, 김선형 옮김
추신. 이번 레터는 폴라 번(Paula Byrne)의 걸출한 평전인 『진짜 제인 오스틴: 작은 물건들로 본 삶(The Real Jane Austen: A Life in Small Things)』(2013)과 잰 메리먼(Jan Merriman)의 『제인 오스틴의 걸출한 고모 필라델피아 행콕(Jane Austen’s Remarkable Aunt Philadelphia Hancock)』(2024)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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