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오스틴의삶과소설

"가없는 다정"의 영웅

엘리너 대시우드의 위로

2025.03.26 | 조회 4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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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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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의 편지함

탄생 250주년을 맞는 작가 제인 오스틴의 모든 것

미세먼지도 뿌옇고 화마에 휩싸인 산천도 뿌옇고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침울한 봄날이네요. 오늘은 당신에게 편지를 보내려 하얀 여백을 띄우고는 눈물이 일렁여 앞이 잘 보이지 않아 한참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어요. 귀한 목숨들이 스러지고 삶의 터전이 잿더미로 변하고 천년고찰이 전소되고 수백 살 소나무가 기나긴 생을 마감하는, 이 참담한 바람이 부는 날에 대체 당신에게 250년 전 머나먼 다른 나라에 살았던 작가의 평화로운 소설에 관해 무슨 편지를 보낼 수 있을까요?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 사랑하는 것을 사랑한다 말하는 것조차 왠지 사치스럽게 느껴지는 오늘, 한참을 썼다 지우고 썼다 지우고 고민하다, 쓰려 했던 원래의 편지를 다음 번으로 미루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캄캄한 절망의 시간, 몸과 마음이 모두 꺾인 동생을 곁에서 사려깊게 보살피는 다정하고 현명한 사람 엘리너 대시우드의 위로를 고이 접어 봉투에 넣고, 기도하는 마음 대신, 애도하는 마음 대신, 당신에게 띄워 부칩니다. 『이성과 감성』 은 무엇보다 "가없는 다정"이 주는 위로에 관한 소설이예요. 

 

하녀가 다음날 난로에 불을 밝히기 전, 아니 1월의 춥고 우울한 아침에 태양의 기운이 미치기도 전에, 메리앤은 옷을 걸치다 만 몰골로, 흐릿한 빛을 어떻게든 끌어 써보려고 창가에 바짝 붙어앉아서는, 쉬지 않고 줄줄 흐르는 눈물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빨리 편지를 쓰고 있었어요. 이 상황에서, 불안한 뒤척임과 흐느껴 우는 소리에 잠이 깬 엘리너의 눈에 동생의 모습이 제일 먼저 들어왔어요. 말은 못 하고 걱정만 하며 잠시 동생을 지켜보던 엘리너는 더없이 사려깊고 온화한 말씨로 말을 걸었지요.
 “메리앤, 나 하나 물어봐도 돼?”
“안 돼, 엘리너 언니.” 메리앤이 대꾸했어요. “아무것도 묻지 마. 금세 다 알게 될 거야.”
이 말을 하기 무섭게 필사적으로 가장했던 평온은 더 이상 못 버티고 허물어졌고, 감당 못할 슬픔이 다시 밀어닥쳤습니다. 몇 분이 지나고서야 간신히, 쓰던 편지를 이어쓸 수 있었고 그러다가도 간간이 억누를 수 없이 터져나오는 비탄에 펜을 멈추곤 했는데, 그 감정만 보아도 엘리너는 메리앤이 윌러비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고 있음을 확신하고도 남았지요.
엘리너는 힘 닿는 한 조용히, 거슬리지 않게,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어요. 메리앤이 신경질적으로 발끈하며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말을 걸지 말라고 하지만 않았어도, 좀 더 달래주고 진정시키려고 했을 테고요. 이런 상황에서는 한 방에 오래 같이 있지 않는 게 둘 다에게 좋지요. 불안한 정신상태 탓에 메리앤은 옷을 다 차려입고 나면 한순간도 더는 방안에 머물지 못했고, 고독한 가운데 끝없는 풍경의 변화가 필요했기에 아침식사 시간까지 모든 사람의 시야를 피해 집 주위를 헤매며 돌아다녔습니다. 
아침식사 때 메리앤은 먹지도 않고, 먹으려 하지도 않았는데, 엘리너는 동생을 다그치거나, 가엾게 여기거나, 관심을 갖는 척하기보다는, 그저 제닝스 부인의 이목을 끌어 자기한테만 집중되게 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어요.
제닝스 부인은 아침식사를 가장 좋아했기 때문에 꽤 오랜 시간 식사가 이어졌고, 다들 식사를 마친 후 막 다 같이 작업 테이블에 둘러앉으려는 참에 편지 한 통이 메리앤에게 배달되었습니다. 메리앤은 다급하게 하인의 손에서 편지를 잡아채어 죽은 사람처럼 낯빛이 파리해지더니 곧바로 방에서 뛰쳐나가버렸지요. 엘리너는 이 광경을 보자마자, 흡사 육안으로 주소를 똑똑히 읽은 것처럼, 윌러비에게서 온 편지가 틀림없음을 알았고, 그 순간 심장에 극심한 통증이 덮쳐와 똑바로 고개를 쳐들지조차 못한 채 걷잡을 수 없이 덜덜 떨면서 그냥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제닝스 부인의 관심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는 생각에 두려웠지요. 그러나 이 착한 부인은 메리앤이 윌러비의 편지를 받았다는 것밖에 보지 못했고, 아주 훌륭한 농담거리로만 생각했고, 그래서 그냥 껄껄 소탈하게 웃으며 마음에 드는 편지면 좋겠다고 농을 쳤어요. 엘리너의 심적 동요는, 러그로 쓸 워스테드 울 직물 길이를 측정하느라 너무 바빠서 보지도 못했고요. 차분하게 대화를 이어가다가 메리앤이 나가자마자 부인은 말했어요. 
“아니, 정말이지, 난 정말 젊은 아가씨가 저렇게 절박하게 사랑에 빠진 모습은 처음 봤어요! 우리 딸들은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네요. 그때는 그 나름대로 참 어리석어 보였는데. 하지만 미스 메리앤은, 딴판으로 사람이 달라졌어요. 진짜 진심으로 바라는데, 그가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않았으면 좋겠네요. 저렇게 아프고 쓸쓸한 모습을 보면 마음이 너무 아파서요. 그런데 정말 두 사람 언제 결혼하는 건가요?”
엘리너는 그 순간만은 정말로 그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지만, 도저히 이런 공격에 응수하지 않을 수는 없어서, 애써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어요. “그런데요, 부인께서는 정말 제 동생이 윌러비 씨와 약혼했다고 믿고 계시는 건가요? 저는 그저 농담인 줄 알았는데, 이리 진지하게 물으시니 그 이상의 의미가 있으신 듯하네요. 그래서 뭔가 착각을 하고 계시다면 이제는 그러지 않으시길 바라요. 확실히 말씀드리지만, 두 사람이 결혼한다는 것보다 제게 더 놀라운 소식은 없을 거예요.”
“저런, 저런, 미스 대시우드! 어떻게 그리 말씀하실 수가 있어요! 우리가 다 이 결혼이 성사될 줄 알고 있는데요. 두 사람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머리에서 발끝까지 정신없이 서로 사랑에 빠지지 않았던가요? 데번셔에서 날마다, 하루 종일 같이 있는 모습을 제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던가요? 게다가 동생이 결혼식 의상을 사려는 목적으로 저와 함께 시내에 갔었다는 것도 제가 아는데요? 이런, 이러지 말아요. 미스 대시우드는 본인이 이런 문제에 워낙 신중하니까, 다른 사람은 눈치(senses. 여기서 제닝스 부인이 senses라는 복수를 쓰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누구나 눈과 귀 같은 기본적 감각이 있다면 두 사람의 애정을 ‘감각’할 수 있다는 의미다.-옮긴이주)가 없는 줄 아는데 그런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아주 오래 전부터 온 도시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어요. 제가 만나는 사람한테 다 말했고 샬럿도 그랬으니까요.”
“정말이에요, 부인.” 엘리너는 매우 심각하게 말했습니다. “잘못 알고 계시는 거랍니다. 그런 소식을 퍼뜨리신 건 정말로 친절하지 못한 일이셨어요. 지금은 제 말을 믿지 않으셔도, 곧 두고 보면 알게 되실 거에요.”
제닝스 부인은 다시 웃음을 터뜨렸지만 엘리너는 더 말할 기운도 없고 윌러비가 편지에 뭐라고 썼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서둘러 둘의 방으로 돌아왔지요. 그런데 문을 열자 침대에 축 늘어져 누워 있는 메리앤이 보였어요. 슬픔에 목이 메어 죽어버릴 것만 같은 모습으로 편지 한 통을 들고 있었는데, 주변에 서너 통의 편지가 더 흐뜨러져 있었습니다. 엘리너는 가까이 다가갔지만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침대에 앉아서 동생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몇 번이나 키스하고 나서 참았던 울음을 기어이 터뜨리고야 말았습니다. 처음엔 격한 오열이 메리앤보다 덜하지 않았어요. 메리앤은, 말은 할 수 없었지만, 이 행동에서 언니의 가없는 다정을 온전히 느낀 듯이, 이처럼 함께 슬픔을 나누는 시간이 한참 흐른 후, 편지들을 모두 엘리너의 손에 쥐어주었어요. 그리고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덮고 고통으로 거의 절규하다시피 소리를 질렀지요. 충격적인 광경이었지만, 엘리너는 고통이 자연스럽게 분출되도록 두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넘쳐흐르는 고통이 제풀에 꺾일 때까지 곁에서 지켜보다가 다급히 윌러비의 편지를 읽었어요. 

『이성과 감성』 2권 7장, 김선형 옮김

 

브레네 브라운은 『심장의 지도Atlas of the Heart』에서 연민의 감정에는 높낮이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pity는 깊은 구덩이에 빠진 사람을 안전하고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가엾어 하는 것, 즉 낙차가 있는 감정이라면 compassion은 그 자리로 함께 내려가 곁에 머무는, 평평한 마음이라고요. 위에서 내려오는 pity는 상처를 덧치게 하기도 하지만 곁에 있는 compassion은 위로를 줍니다. 이 분명하게 낙차가 다른 언어를 우리 말로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요. 세심한 뉘앙스가 아쉽긴 하지만 pity가 동정심이라면 compassion은 공감이라 해야겠지요.

엘리너가 메리앤을 바라보는 마음은 가히 절절한 공감입니다. 공감의 위로는 제일 먼저 판단을 잃고 다음에 말을 잃습니다. 힘내라고 다그치지도 않고 가엾게 내려다보지도 않고 왜 이러냐고 훈계하지도 않고, 그저 바라봅니다. 침묵으로 지켜보고 남몰래 부담을 덜어주고 혼자 있을 공간을 허락해주다 기어이 ‘심장의 통증’을 나누어 담고 곁에서 함께 울어줍니다. 그리고 아무리 보기 괴로운 광경이라도, 상처받은 이의 고통이 자연스럽게 분출되도록 그대로 둡니다. 인용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이 다음에는 메리앤에게 감정을 최대한 많이 표출하록 권하고 메리앤이 같은 주제로 이야기를 하고 또 하고 또 하면 지칠 줄 모르고 듣고 또 듣고 또 들어줍니다. 고통의 이야기를 판단도 조언도 훈계도 없이 듣고 또 듣고 또 듣는 것이 얼마나 고되고 어려운 일인지요. 위로는 참으로 힘겨운 사랑의 수행입니다. 

『이성과 감성』의 엘리너 대시우드는 ‘사랑’을 늘 수행성으로 정의하는 제인 오스틴의 진짜 영웅입니다. 팍팍하고 힘겨운 궁지에서도, 자중감을 기반으로 관용과 사랑을 확산하는 엘리너 같은 사람들이야말로, 일거수일투족이 느리지만 조용하게 세계를 조금씩 더 말이 되는(make sense) 곳, 조금씩 더 다정한 곳으로 바꾸어 나갑니다. 남의 마음을 배려하되 무례하고 잔인한 이들의 요구에는 단호히 선을 긋고 아픈 사람의 상처를 세심히 헤아리고 악에 분노하되 평범한 이들의 실수나 착오에 너그러운, 아름답고도 단단한 사람. 마음은 한없이 선하지만 분별이 모자라 자꾸 제 뜻과 달리 남에게 상처를 주는 제닝스 부인마저도 너른 품으로 껴안는 사람. 오늘은 “가없는 다정”을 지닌 엘리너 대시우드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날이네요.

밤새 봄비가 꿈처럼 오시면 참 좋겠습니다. 

 

2025년 3월 25일

김선형 드림

 

2008년 BBC 드라마  『이성과 감성』
2008년 BBC 드라마  『이성과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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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햇살

    0
    4 day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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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답글 (1)
  • 송지연의 프로필 이미지

    송지연

    0
    3 days 전

    마지막 '봄비' 얘기에선 울먹이고 말았습니다. 레터 읽을 때마다 감탄하고 위로받고, 그러다 결국엔 이 레터를 한 명이라도 더 읽어야 해, 하면서 공유하게 됩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이 레터가 제겐 가없는 다정으로 다가옵니다.

    ㄴ 답글 (1)
  • 북클럽의 프로필 이미지

    북클럽

    0
    3 day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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