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이야기

"공기"의 말들

사람이라는 텍스트를 읽는 연습

2025.03.12 | 조회 6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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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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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의 편지함

탄생 250주년을 맞는 작가 제인 오스틴의 모든 것

클래식 음악 연주가 중에는 “전작주의자”라 불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 전곡, 베토벤 소나타 전곡, 이렇게 한 작곡가의 작품 전곡을 연대기순으로 연주해 녹음하거나 공연하는 작업을 선호하는 연주가들이지요. 우리나라에서는 백건우 피아니스트나 현악사중주단 노부스 콰르텟이 전작주의자들로 유명합니다. 이들처럼 작곡가의 전작을 파고들면 개별 곡을 분석할 때 잘 보이지 않던 의미요소들을 연결해 한 단계 더 깊은 음악의 층위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첫 레터에서 말씀드렸지만 고전 번역은 클래식 음악 연주와 여러모로 참 비슷한 작업 같아요. 이번 제인 오스틴 새 번역 프로젝트는 제게 “전작주의”의 진의를 새삼스레 다차원적으로 이해하게 해준 귀한 경험이기도 합니다. 정해진 시한 내에 여러 작품을 순차적으로, 집중적으로 읽어나가면서 비평과 사료를 함께 공부해 다각도에서 텍스트를 분석하고 1주일에 한 번씩 레터를 쓰는 작업을 병행하다 보니, 작가와 독자의 현전을 정말 특별하게 감각하게 되어요. 작가는 18세기 영국에, 독자는 21세기 한국에 있으므로, 매일 한 문장 한 문장을 옮겨 쓰다 보면 작가와 독자 사이의 한없이 멀고도 한없이 가까운 그 기이한 거리를 두뇌에서 손끝까지 말 그대로 온몸으로 겪고 간극 위에서 줄타기를 하려 애쓰게 됩니다. 그래서 매 순간 일하는 동안은 낱말과 문장이라는 미시적 단위에 골몰하게 되지만, 여러 작품을 이런 식으로 겪다 보면 불가피하게 이 미시적 단위들의 기억이 몸에 쌓이고, 그러다 어느 순간 각 소설을 한 편 한 편 따로 읽을 때 스쳐 지나갔던 낱말들이나 표현들이 갑자기 서로 연결될 때가 있어요. 퍼즐 조각이 맞춰지듯, 머릿속 전구에 팍 불이 들어오면서, 작가의 의도가 문득 명징하게 떠오르는, 그런 신나는 순간 말이에요. 그러면 조금 높고 먼 자리에서 훨씬 더 큰 그림을 조망하게 됩니다.

*

오늘은 최근 제가 찾아낸 연결 고리 하나, 제인 오스틴의 초기 소설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는 한 단어에 관해 말씀드리고 싶어요. 제인 오스틴이 거의 동시에 쓰고 퇴고한 소설인 『이성과 감성』『오만과 편견』은 주제나 작법, 인물 등 여러 면에서 공통점이 많은데요. 그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쓰임새를 갖는 단어가 하나 있어요. 영어로 air, 바로 공기입니다. 오스틴 소설의 맥락에서 이 말은 사람의 외양이 발산하는 분위기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 air라는 단어는 제인 오스틴의 초기 소설에서 특정한 유의 인물들을 묘사할 때 꼭 등장한답니다. 먼저 다음의 인용문을 읽어보세요.

 

말을 탄 남자 하나가 그들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던 거예요. 몇 분 후에는 신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지요. 이내 메리앤이 황홀한 기쁨에 휩싸여 외쳤습니다.
“그이야. 그이가 틀림없어. 내가 알아!” 그러더니 서둘러 그를 맞으러 달려가려는데 엘리너가 소리쳤어요. “아니야, 메리앤, 난 아무래도 네가 사람을 잘못 본 것 같아. 윌러비가 아니야. 저 사람은 그렇게 키가 크지 않고 특유의 분위기(his air)도 없잖아.”
“아냐, 있어. 맞아.” 메리앤이 소리쳤어요. “확실히 그래. 그이의 분위기, 그이의 코트, 그이의 말. 그이가 금세 올 줄 나는 알고 있었어.”

『이성과 감성』 1권 16장, 김선형 옮김 

 

윌러비와 헤어진 후 상심해서 울적하게 지내던 메리앤이 산책을 나갔다가 다른 사람을 윌러비로 잘못 알아보는 장면인데요. 여기서 윌러비의 특징을 묘사하는 단어들을 잘 살펴보세요. “his air, his coat, his horse”, 공기와 코트와 말, 모두 본성(nature)이나 인격(character)과 무관한 피상적 기호들인데 그중에서도 air가 제일 먼저 호명됩니다. 그럼 『오만과 편견』에서 또 다른 청년이 등장하는 다음 대목을 볼까요?

 

하지만 모든 아가씨의 관심은 금세 한 젊은이에게 쏠렸어요. 다들 처음 보는 그 청년은 누구보다도 신사다운 외모였고 길 건너편에서 한 장교와 나란히 걷고 있었지요. 장교는 리디아가 런던에서 돌아왔는지 궁금해서 물어보러 온 그 데니 씨였고, 지나치면서 그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했습니다. 모두가 그 낯선 청년의 분위기(the stranger’s air)에 반해서 대체 누구냐며 궁금해했어요. 

『오만과 편견』 15장, 김선형 옮김

 

근사한 분위기로 모든 여성의 이목을 끈 이 낯선 청년의 이름은 물론 위컴 씨입니다. “외모 덕에 그는 굉장히 돋보였어요······섬세하게 잘생긴 얼굴, 훤칠한 몸매, 대단히 싹싹한 말씨의 소유자”이고요. 그가 이끄는 군인 무리 역시 “몸매, 얼굴, 분위기(air), 걸음걸이”가 빼어나고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발산하는 이 공기, 이 분위기는 언제나 실체와 다르거나, 실체가 없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윌러비와 위컴이 공유하는 이 단어 “air”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서 유혹하는 수사이고 위험한 함정입니다. 오스틴의 여자 주인공들은 남자를 텍스트처럼 읽는 연습을 해야 하고, 이 과정이 바로 성장입니다. 눈을 홀리고 귀를 사로잡는 유혹적 괴물들의 암초를 피해 충실한 페넬로페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오뒷세우스처럼, 대시우드 자매도 베넷 자매도 처음에는 실체가 없는 공기(air)로 유혹하는 ‘암초’에 홀리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하지만 이 오독의 실수를 딛고 훨씬 더 사람/텍스트를 잘 읽는 연습을 한 결과 충실하고 변함없는 고향 같은 남자들을 (다시) 알아보고 “귀향”의 미션에 성공하고야 말지요.

유혹하는 사회적 기표에 속지 않고 은폐된 저변의 사적인 진의를 읽어내는 능력, 겉으로 판단할 수 없는 진짜 인격을 꿰뚫어보고 판별하는 눈, 그 참된 아름다움과 사랑에 빠지는 것, 이것이 제인 오스틴 소설의 진짜 미션입니다. 수사의 저의를 읽어내는 지성과 선을 사랑하는 도덕적 감정을 모두 동시에 훈련하는 교육적, 계몽적 텍스트인 것입니다. 『오뒷세이아』에서 유혹하는 칼립소와 충실한 페넬로페가 기표이고 상징이듯이 『이성과 감성』의 유혹하는 윌러비와 충실한 브랜던, 『오만과 편견』의 유혹하는 위컴과 충실한 다아시도 분명 기표이고 상징입니다. 저는 이것이 제인 오스틴의 눈부신 성취라고 생각합니다. 여성의 의식을 중심에 놓고 세상을 텍스트화해 제대로 읽는 연습을 모색하는 교육적 서사의 틀을 발명했기 때문이지요. 이 사랑의 이야기들에서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가 기호화됩니다. 읽는 주체가 아니라 읽히는 텍스트, 기호와 상징이 됩니다.

오스틴의 소설에서 air는 모두 기의와 어긋난 기표, 혹은 아예 기의가 없는 기표들로 얼룩져 있습니다. 다아시는 제인과 빙리의 결혼에 반대한 이유를 설명하며 “당신 언니의 얼굴과 분위기(air)”가 너무 차분해서 특별히 빙리에게 마음이 없는 줄 알았다고 말합니다. 어리석고 멍청한 콜린스 씨는 “현학적인 분위기(pedantic air)”를 풍깁니다. 물론 남자만을 묘사하는 표현은 아니에요. 이를테면 돈으로 지위를 산 가문이면서도 캐럴라인 빙리는 “확고한 상류층의 분위기(an air of decided fashion)”를 과시하고요. 에드워드와 엘리너 사이를 가로막는 루시 스틸 역시 휙휙 바뀌는 “분위기(air)”로 매혹하는 여자로 그려지거든요. 하지만 무엇보다 의미심장하게도, 가디너 부인은 엘리자베스에게 다아시의 오만한 면모는 “분위기에만 한정되어(confined to his air)” 있다고 평합니다. 그러니 현대 영어에서 허세를 부린다든가 잘난 척한다는 의미에서 ‘put on airs’라는 표현을 쓰는 것도 이제 이해가 되지요.

제인 오스틴의 초기 소설에서 air는 기호들이 교란되는 혼탁한 대기입니다. 불투명하게 왜곡된 소통 환경에서는 도덕과 정의, 사랑이 불가능하지요. 오스틴이 air를 쓰는 이런 방식은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연상시키는 면이 있어요. 셰익스피어는 공상과 상상이 만들어낸 기호들을 “공기 같은 헛것(airy nothing)”이라고 표현하거든요. 『맥베스』의 첫 장면에서 마녀들이 등장해 그 유명한 주문을 외우는 장면에서 air가 쓰이는 맥락은 의미심장합니다.

 

공정한 것은 더러운 것이고 더러운 것은 공정하다. 
(아름다운 것은 추하고 추한 것은 아름답다)
안개와 오염된 공기를 헤치고 떠다니자. 
Fair is foul and foul is fair.
Hover through the fog and the filthy air. 

『맥베스』 1막 1장, 김선형 옮김

 

결코 동일할 수 없는 언어들을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이 흑마법의 주문을 통해, 마녀들은 투명한 소통의 필요조건인 말의 정의를 혼탁하게 어지럽힙니다. 공정한(도덕적인)/아름다운(선한) 것과 더럽고(부도덕한)/추하고(악한) 것이 다 같다고 주장하면서 공기를 혼탁한 안개로 뒤덮고 오염시킵니다. 기표와 기의를 분리하는 수사로 말이 말이 아니게 되어버리면, 다음에는 유혹에 넘어가는 권력과 욕망만 남습니다. 바로 이 혼탁한 공기 속에서 폭군 맥베스의 공포정치가 탄생합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공기 같은 헛것”들이 정치적 발화의 영역에 들어오면 반드시 폭정이 탄생한다고 믿었습니다.

오도하고 유혹하는 오염된 air는 위험합니다.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리고 국가의 기반을 뒤흔들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 때문에 우리는 어지러운 궤변에 휘둘리지 않고 주체적으로 맑은 소통을 이루는 읽기 연습을 해야 하는 것이고요. 수사학의 유혹에 휘둘리지 않는 읽기는 언제나 주체의 교육에 필요불가결한 훈련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인 오스틴의 소설은, 여성의 의식에 초점을 맞춰 섬세한 뉘앙스를 더듬어가며 오류와 시행착오를 통해 사람/세계/텍스트를 제대로 읽는 능력 -- 도덕적 감정과 지적 판단력 -- 을 교육하는 훌륭한 교본이었지요. 

 

2025년 3월 12일

김선형 드림

 

추신. fashion은 18세기 영국영어에서 상류층의 매너를 뜻하는 말이었어요.

 

2005년 영화 『오만과 편견』 중에서 위컴, 엘리자베스, 다아시
2005년 영화 『오만과 편견』 중에서 위컴, 엘리자베스, 다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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