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KEH PROFILE
어느 날 문득, BOKEH의 대담 기획을 준비하던 중 슬 에디터가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어떤 관점으로 이런 얘기를 하고 있지?"
국악인, 송라이터, 기획자, 대학생, 주부 등등 쉽게 대답이 나올 법 했지만, 이야기를 나눠보니 생각보다 다양한 말들이 나왔다. 이런 직업적 정체성과 바탕이 된 개인의 역사는 처음에는 내부 집필 기조를 확립하기 위해 정리했던 것들이지만, BOKEH의 대담과 칼럼, 인터뷰들이 쌓여가며 독자들에게도 우리의 말들이 어떠한 관점을 통해 다뤄지고 준비되고 정리되는지 전할 수 있다면 이해를 돕는데 있어 효과적이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번 BOKEH 포스팅에서는 두 사람이 각자 정리한 자신의 이야기들을 풀어놓으려 한다.
슬
02년 5월 대전 유천동에서 태어났다. 어릴때부터 아쉬운 집중력으로 인해 의자 위에 10분도 못 앉아 있던 나는 일찍이 공부의 길을 포기하게 된다. 부모님은 바이올린과 첼로 과외, 연기학원, 피아노학원들을 다니게 해주시며 예체능의 길을 제안하셨지만 아쉽게도 모든 악기와 연기에서 소질이 없던 나는 “그저 건강하게만 자라다오”라는 부모님의 말을 철썩같이 믿은 채 공부 압박 없는 행복한 초등학생으로 살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학교 음악시간에 특별 강사로 오신 해금 선생님께 장구를 배우고 처음으로 음악에 소질이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고, 국립국악원 정악단 정기연주회에서 <전폐희문>을 듣고 국악에 매료된다. 그 후로 스트레스도 풀 겸 취미로 장구를 배우다가 레슨 선생님의 제안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재원 시험을 보게되었고, 운 좋게 합격을 했다. 국악이 적성에 맞아 나름 열심히 노력한 결과 국립국악중학교, 국립국악고등학교 진학까지 성공하게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밴드 사운드에 익숙했던 나는 자연스레 전통 국악 보다는 창작 국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동시에 인디밴드들에게도 관심을 가지면서 고등학교 다니는 내내 국악보다는 밴드음악에 빠져있었다. 이 후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고등학교 자퇴를 하게 되면서 맘 편히 홍대를 드나들며 공연들을 보고 디깅한 결과, 포스트록 그리고 매스록이 가장 나와 잘 맞는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내가 한참 홍대에 공연을 보러 다니던 2017-19년은 그야말로 인디밴드 황금기였다. 팬 유입도 많이 됐었고, 좋은 음악을 하는 밴드들이 대거 양성 되던 시기였다. 공연을 보며 자연스레 친해진 사람들을 통해 좋은 기회로 여러 기획공연들에 스텝, 혹은 아이디어 제공(기획 이라기엔 민망한)등의 일을 하면서 연주자가 아닌 기획자도 적성에 맞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주저리 썼지만 결국 자퇴 후 성인이 되기까지 1년 반이라는 시간동안 길다면 긴 방황을 하던 나는 “그래도 대학은 가야지” 라는 부모님의 말에 다시 열심히 입시 준비를 하였고, 그 결과 22학번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현재는 국악 타악 연주자로서 공연을 하기도 하고, BOKEH에서 글을 쓰고 기획을 하기도 하며 여전히 좋아하는 음악들을 찾아 듣고 공연을 본다.
여전히 갈피를 못 잡은 채 방황하기도 하지만 누구보다 국악인의 자아가 강한 사람이다.
상욱
97년 2월 서울 상계동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운전하시던 아반떼에서는 늘 지누션과 김광석, 그리고 노브레인의 1집이 흘러나왔다. 초등학교 6학년, 영어학원 월말 평가에서 90점을 넘기면 핸드폰을 사준다는 약속에 컨닝으로 목표를 달성했다(14년만에 고백하는 사실이다). 그 때 받은 핸드폰이 정규 8집으로 컴백한 서태지가 광고하는 기종이었는데, 기기 안에 홍보차 서태지의 신곡이 몇 개 들어있었다. 핸드폰을 만져보던 중 우연히 듣게 된 서태지의 신곡에 완전히 빠져들었고, 서태지의 그룹/솔로 디스코그래피를 파고들며 첫 디깅을 시작했다.
그린데이와 가리온, 그리고 서태지를 좋아하던 중학교 1학년 시절, 학교 과제로 제출한 독서감상문을 본 아버지의 권유와 “글쓰기를 하루종일 할 수 있는 학교가 있다” 라는 설득을 통해 학교를 자퇴하고 철학/인문학 대안학교인 지혜학교로 진학하게 된다. 학교에서는 핸드폰을 주중에 사용할 수 없어 모든 음악을 딱 하나 있는 CD 플레이어를 통해 틀었는데, 소수의 블루스/비틀즈 강경 지지자 애늙은이들로 인해 6년 내내 비비 킹과 에릭 클랩튼, 올맨 브라더스와 레너드 스키너드, 그리고 비틀즈의 전집을 들으며 살게 된다. 그런 환경 속에서, 어떠한 순리처럼 자연스럽게 밴드부가 결성되었고 기타를 맡게 되었다.
학업에 대한 부담감이 거의 없는 환경 속에서 가장 많이, 그리고 자주 한 일은 글쓰기와 디깅이었다. 그때쯤 더 스미스, 펄프, 에이미 와인하우스, 리버틴즈 등의 영국 아티스트들의 팬이 되었고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청년폭도맹진가>, <201>, <Dreamtalk> 등 한국 밴드 역사에 오래 남을 명반들을 접하고 깊게 빠져들었다. 그 중 산울림에는 좀 더 깊은 애정이 붙어 고등학교 졸업 논문 주제로도 함께하게 되었다.
16세, 11년도 서울대에서 진행된 본부스탁의 영향을 받아 전국 대안학교의 밴드부들을 모이는 행사를 기획하여 홍대의 DGBD에서 대관공연을 진행한다. 그 후로 ‘냉동참치레코드’라는 기획팀을 결성하여 16살부터 20살까지, 약 17회의 대관 공연을 기획하고 진행하게 된다. 20살에 이 기록이 멈춘 이유는 대부분의 한국 학생들이 그러하듯이 그래도 대학은 가봐야겠다 싶어, 고등학교 3학년 시절 6월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대학에 진학해버렸기 때문이다. 그 시절 함께 했던 많은 밴드들이 현재도 다양한 모습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소소한 자랑이자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런 은퇴 아닌 은퇴를 한 호들갑이 무색하게도 영어영문학과를 2학년 2학기만에 자퇴해버렸고, 얼레벌레 만들어둔 곡을 바탕으로 밴드를 결성하여 21년도, 5곡이 담긴 EP 앨범을 발매한다. 그러나 ‘저기 저 장윤정이처럼 한 곡 팍’ 성공하길 바라셨던 친할아버지의 소망은 앨범 발매 3개월 후 밴드가 해체되며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그 후로 짧은 직장 생활을 겪고, 퇴사 후 물류창고와 공사현장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살아가면서 종종 데모 앨범을 만들고, 글을 쓰고, 어쩌다보니 졸업 작품 영화음악의 감독님도 되었다가, 지금은 BOKEH에서 글을 쓰고 종종 기획을 하며 강아지와 가정을 돌보는 주부로 살아가고 있다. 꾸준한 사랑이 가장 깊다는 마음으로 음악을 좋아하고 있다.
야키(Yakie)
아쉽게도, 야키는 실제 존재하는 멤버가 아니다(두 에디터 모두 야키는 누구냐는 질문을 정말 많이 들었다).
상욱 에디터가 네팔 여행에서 보았던 야크들에 대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슬 에디터가 앉은 자리에서 그려낸 BOKEH의 마스코트다. 야크 특유의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뚱한 표정과 매사 덤덤하고 느긋한 움직임이 BOKEH를 꾸려 나가는 두 사람과 비슷하다고 느껴 만들어진 캐릭터다.
행사가 있을 때는 계절에 맞춰 의상과 악세사리를 덧대어 그려서 달아주고 있으며, 두 에디터 모두 야키를 모델로 한 상품들을 만들어내고 싶다는 작은 욕심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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