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저물어간다. 연말 시상식들을 벤치마킹 하여, BOKEH의 세 에디터도 올 한 해 인상 깊었던 세 가지를 뽑아 보았다. 상욱, 윤, 슬 세 에디터 모두 공통적으로 올해의 사건과 올해의 앨범을 하나씩 선정했고, 나머지 한 가지 부문은 각자 자유롭게 올해의 인상 깊었던 작품, 혹은 개인적인 일화를 선정하였다. 아주 개인적인 기준으로!
상욱
올해의 사건
BOKEH 팝업 스토어. 처음으로 손님에게 내가 만든 음식을 내어갔던 행사를 큰 문제 없이 잘 해냈다는 점에서 뿌듯함을 많이 느낀다. 올 한 해 요리 실력이 많이 늘었다는 걸 실감했다.
세상 만사 내가 노력한 만큼 돌아오는 일들이 그리 많지 않은데 요리만큼은 내가 공들이고 신경 쓴 만큼 결과를 돌려준다. 내년에는 개인적으로라도 일일 식당을 한 번쯤 열어보고 싶은 마음이다.
올해의 게임
<디스코 엘리시움>은 엄밀히 말하면 올해의 게임은 아니다. 19년도에 출시되었고, 그저 내가 3년간 묵혀두다 이제야 엔딩을 본 것이다. 그간 사놓고 플레이 자체를 미뤄둔 게임들이 많아 늘 읽던 책이 있어도 새 책을 굳이 또 살 때와 비슷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드디어 그 중 가장 아픈 손가락인 <디스코 엘리시움>을 마무리 지었다.
소련 해체 이후 동유럽 국가들의 황량한 모습을 연상케 하는 항구도시 '레바숄'을 배경으로, 플레이어는 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가 되어 이 세계의 다양한 철학/정치 사상들이 맞부딪히는 순간들 속에서 끊임없이 선택을 하고 그 결과를 마주하게 된다. 같은 문제를 마주하더라도, 이를 파시스트로서 풀어나갈 때와 신자유주의자로서 풀어나갈 때는 서로 다른 결과를 가져오고 이에 따라 새로운 문제들이 파생된다.
앞서 말했듯이 플레이어는 살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파견 된 알콜 중독 형사가 되어 불철주야 뛰어다니게 되지만, <디스코 엘리시움>은 추리극보다는 혼란스러운 사회 속, 한 개인이 어떠한 신념을 품고 살아갈지, 또 그 신념에 따른 행동이 주변에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그려낸 사이코드라마에 가깝다.
'소련의 마지막 살아있는 게임 개발자들' 이라는 농담으로 자신들을 설명하던 개발사 ZA/UM의 주축 인원들이 외부 자본의 개입으로 비자발적 퇴사를 하게 되어 후속작을 만나보긴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소련의 붕괴를 연상케 하니, 어쩌면 <디스코 엘리시움>은 모니터 밖에서 진정으로 마무리 되었을지도 모른다.
올해의 음반
허니젤리키티 - 허니젤리키티
허니젤리키티의 첫 앨범 <허니젤리키티>의 소개를 길게 적다가, 결국 나의 백마디보다 멤버들이 직접 쓴 소개문이 이 앨범의 의미와 매력을 전하기에 더 적합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전문을 아래 옮긴다. 올 한 해 가장 인상 깊게 들은 앨범.
우리는 2020년 3월 〈축제〉를 만들고 첫 합주를 가졌다. 뒤이어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어〉를 만들면서부터, 우리는 천천히 앨범을 기획했다. 《허니젤리키티》는 그 결과물이다.
우리는 이 앨범이 질적으로 상이한 음색의 소음으로 가득하기를 바랐다. 우리는 거리에서 이런저런 소음을 채집하기도 했고, 컴퓨터로 소음을 만들기도 했으며, 많은 경우 여러가지 이펙터들에 연결된 베이스를 연주하여 그 소음을 녹음하기도 했다. 또 필요할 때에는 고함을 지르거나 가쁘게 숨을 쉬며 목소리를 떨기도 했다. 가령 〈밝은 밤〉은 베이스를 연주하여 녹음한 소리들을 쌓고, 그 위에 숨 가쁜 목소리를 올려 만든 곡이다. 우리는 우리의 소음이 때로는 아주 미약하게만 들리기를, 그리고 또 다른 때에는 과히 폭력적으로 표현되기를 바랐다.
우리는 작업을 시작할 때부터 우리의 소음이 저항의 현장들을 표시할 수 있기를 바랐다. 정의롭고도 절박한 요구들이 그저 소음으로만 식별되는 일은 도처에서 일어난다. 탄압과 수탈, 무시와 배제, 그리고 그에 따른 설움과 공포는 항상 소음을 수반한다. 그러나 소음이 그런 곳들에서 겪어지는 고통을 표시하는 데에 그치고 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저항적 실천은 소음을 수반한다. 모든 저항이 소음과 함께 시작한다고 써도 좋을 것이다. 소음의 방출은 저항의 전술이기도 하다. 소음은 탄압과 배제 맞서 싸우는 사람들의 힘을 표시하기도 하며, 해방에 대한 그들의 기대와 투쟁 속에서 솟아오르는 기쁨을 표시하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의 소음이 저항의 현장들을 겨냥할 수 있기를 바랐고, 그 방향을 분명히 가리키기 위해 가사를 작성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의 소음이 당파적이기를 바랐다. 그것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어〉를 만들었을 즈음부터 분명했던 목표다. 우리는 우리가 비정규직 노동자와 해고노동자, 하청노동자, 산업재해 피해자, 성노동자, 주택 및 상가 임차인, 철거민, 도시빈민, 이주민, 난민, 학교 밖 청소년, 퀴어, 장애인, 그리고 여기에 이루 다 적을 수 없을 다른 많은 사람들, 자기 삶의 조건을 박탈당하지 않기 위해 싸우고 있는 그 수많은 사람들의 편에 서 있기를 바랐다. 그것이 우리 작업의 원칙이었다. 우리가 실수하지 않았기를 바란다.
윤
올해의 사건
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펄프의 라이브를 보았다. 자비스 코커의 괴랄한 춤사위를 보았다. 버킷리스트 하나를 이루었다.
12월 초, 홍콩 최대 뮤직 페스티벌인 클라켄플랍(Clockenflap)에 다녀왔다. 포스트록 밴드 카스피안(Caspian), 펑크 록 밴드 아이들즈(Idles), 일렉트로 팝 뮤지션 캐롤라인 폴라첵(Caroline Polachek) 그리고 인디 록 뮤지션 알렉스 지 (Alex G) 등 즐겨 들었던 해외 음악가들의 라이브도,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색다른 분위기와 해외 페스티벌만의 자유로움도 새롭고 굉장한 경험이었지만 역시 수년간 꿈꿔왔던 펄프의 음악을 라이브로 본다는 것 자체가 주는 벅차오름. 그리고 그것이 주는 감정은 락덕으로 지내온 나의 유구한 역사 속 경험들과는 차원이 다른 기쁨이었다. 좋아하는 밴드가 한국에 오지 않아 고민이라면, 내가 직접 가는 것도 추천한다.
올해의 책
이인규, 『둔촌주공아파트, 대단지의 생애』, 마티, 2023
‘토포필리아(Topophilia)’라는 말이 있다. 인문지리학자인 이-푸 투안이 제안한 개념으로, 사람과 공간 간의 정서적 유대나 애착심, 그리고 이에 얽힌 인간의 심성을 의미한다. 나는 오래된 것들과 사라진 것들의 팬이고, 내가 사라진 장소에 갖는 집착이나 애착이 그것과 가깝다.
지난 2013년, 철거 전 둔촌주공의 모습과 거주민의 기억을 기록한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나는 올해에서야 이 프로젝트에 대해 접하게 되었고, 어릴 적 좋아한 밴드 ‘얄개들’을 통해 알게 된 ‘둔촌주공’에 왠지 모를 애착이 있었기도 했던 나는, 평소 낡은 아파트들을 지나칠 정도로 사랑해왔다. 아파트 단지의 생애를 연구하는 프로젝트라니, 너무 흥미롭지 않은가… 출판사 서평에 따르면, 해당 책의 저자 이인규가 주도했던 이 프로젝트는 ‘주공 키드’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큰 화제를 모았다.‘고. 철거나 재개발 등의 이유로 삶의 터전을 떠나야 하는 상실감과 허무함 그리고 사라져가는 곳들에 대한 그리움. 차마 우리가 세상을 바꾸지는 못할 때에도, 기억하고 기록하며 함께 슬퍼하면 되는 것 아닐까? 그 사실이 나에게는 보물처럼 귀하다.
올해의 음반
릴리 잇 머신(Lilly Eat Machine) - 우리는 불연소의 여름에 갇힌 채 밤을 맞고
아침, 얄개들, 눈뜨고코베인을 기억하는가? ‘맞은편 미래’의 가사처럼, 미래는 추억 따위 허락하지 않는 것 같다. 사라지는 것들 곁에는 언제나 머무르는 이들이 있다. 슈게이징을 기반으로 한 포스트 펑크 밴드 ‘릴리 잇 머신’의 멤버들은 2010년대 한국 인디의 열렬한 팬이자, 머무르는 이들이다.
지난 1년간 가장 가까이서 그들의 순간을 목도했다. 무수한 아픔과 기쁨을 보았고, 그래서 나는 안다. 그 많은 이야기들을 안다. 그리고 올해 가을, 그 이야기들을 내가 아닌 이들과 함께 목격할 수 있음에 즐거웠다. 멤버 ‘션’은 앨범을 소개할 때면 ‘추락’을 말하곤 한다. 꽤 아름다운 추락일지라도, 나는 가끔 추락이 아닌 착륙에 대한 생각을 한다. 이들의 추락이, 어쩌면 착륙이 될 수 있도록 우리는 작은 날개가 되어볼 수도 있겠다.
슬
올해의 사건
“11년째 국악을 전공하고 있지만 11년 째 하고 싶지 않습니다.” BOKEH에서 나를 처음 소개할 때 사용한 문장이다.
무슨 일이든 10년이상 꾸준히 하면 질리는 법이다. 국악은 나에게 오래된 연인같은, 익숙하지만 더이상 새롭지 않고 가끔은 지루하고 질리기도 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공연을 올리고, 악기를 연주하며 얻은 고양감으로 인해 국악이 다시 좋아지게 되었다. 편안한 공간에서 내 연주에 집중하며 나은 소리를 찾아가고, 관객들에게 그 결과물을 선보이는 것은 다른 일을 할땐 느낄 수 없는 유일한 감각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지루해지는 순간이 온다면, 처음 시작했을 당시를 떠올리며 그 일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을 추천한다. 생각보다 더 푹 빠져있는 본인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올해의 성과
2023년은 평생 쉼없이 달려온 나를 위해 선물하는 안식년 같은 한 해 였다. 예정되어 있던 일들과 해야만 하는 일들 때문에 맘 편히 쉬지는 못했지만 적절한 쉼과 일의 밸런스가 왜 중요한지에 대해 깨달았다.
몰아치는 데드라인들로 숨 가쁘게 2022년을 보냈다면, 2023년은 한 발짝 떨어져서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고 할 수 있는 일에 최대한의 에너지를 쏟았다.
열심히 목표를 향해 달리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멈춰서 여태 보낸 시간들을 찬찬히 들여다 보는 것도 중요하다.
올해의 음반
윤지영 - 나의 정원에서
BOKEH의 대담에서도 한 번 다룬적 있는 <나의 정원에서>는 사랑의 다양한 면에 대해 다룬 앨범이다.
<어제는 당신 꿈을 꿨어요> 부터 <나의 그늘> 까지 우리가 사랑을 하며 느끼는 여러 감정들에 대해 전작들보다는 정제된 언어를 통해 이야기한다.
누군가를 사랑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공감 할 만한 일들을 솔직하고 담백하게 전한다는 점이 매력적인 앨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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