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연히 애플 뮤직을 듣다가 단번에 제 귀를 단번에 사로잡은 음악이 있었습니다. 데뷔한 지 한 달도 안 된 신인 걸그룹의 음악이었다는 건 뉴스를 보고 처음 알았습니다. 이름이 '뉴진스'입니다. BTS 소속사인 하이브의 산하 레이블 ‘어도어(ADOR)’의 소속입니다. SM에서 샤이니 에프엑스 등을 디렉팅 했던 민희진씨가 대표로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뉴진스는 민희진 대표가 하이브에 와서 만든 첫 작품이라 할 수 있겠네요. 최근 3년간 걸그룹 데뷔곡 중 최고 순위로 음반 실시간 차트에 진입하는 기록을 세웠다고 해서 연일 큰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블랙핑크 데뷔도 몰랐던 제가 뉴진스의 데뷔가 눈에 띌 정도라면 대중 음악계의 굉장한 이슈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섯 명의 멤버 모두 10대 소녀들로 구성된 이 그룹의 음악을 듣고 저는 마치 아이돌 음악의 뉴에이지 버전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뉴에이지는 앙드레 가뇽, 조지 윈스턴, 유키 구라모토 등으로 우리나라에서 잘 알려진 뮤지션들의 음악이죠. 팝과 클래식을 넘나 들며 긴장감을 완화하고 기분을 해소해주는 분위기가 이 음악들의 특징입니다. 20세기 말엽에 나타난 새로운 시대적 가치를 추구하는 영적인 운동에 부합하는 음악이라고 합니다. 뉴진스가 이런 철학까지 품은 그룹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에게는 기존 아이돌 음악에선 느끼지 못한 뉴에이지처럼 편안한 기분을 주는 음악인 건 분명합니다.
제가 이제까지 들어 온 아이돌 음악의 인상은 그리 긍정적이진 않습니다. 숨 막힐 정도로 완벽한 무대를 위해 하나부터 열까지 타이트하게 짜인 안무와 빈틈없이 반복되는 비트 그리고 찌르는 듯한 눈빛과 나이에 맞지 않는 몽롱하거나 뇌쇄적인 표정 등 과한 연출과 분위기 때문에 보고 듣는 내내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뉴진스의 음악과 무대는 그런 피로감이 싹 가시더군요. 이제야 부담없고 질리지 않게 가볍게 들을 수 있는 아이돌 음악을 만난 것 같아 다행입니다.
사실 우리나라 아이돌 음악과 문화에도 대안이 될만한 그룹이 필요했습니다. 새로운 세대, 새로운 시대의 아이돌 음악, 전형과 기존의 틀을 벗어난 음악이 나올 때가 됐습니다. 90년대 중반에 시작해 벌써 20년이나 됐으니 이제는 아이돌도 어엿한 청년의 나이가 됐으니까요. 그 출발이 뉴진스라고 한다면 무리일까요? 제가 듣고 본 뉴진스는 그 정도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는 매력과 실력을 가진 그룹으로 보였습니다. 그런 점에선 뉴진스의 '뉴'는 참으로 의미있는 단어로 생각됩니다. 데뷔하자마자 각종 음악 차트를 휩쓸고 대중 음악의 모든 이슈를 끌어 안고 있는 상황을 보니 대중들은 '뉴'진스같은 새로움을 정말 기다려왔다는 생각도 듭니다.
앞 서 잠깐 언급했지만 90년대 말 뉴에이지 음악을 처음 접했을 때도 저는 지금의 뉴진스와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뉴에이지로 해석된 클래식 음악은 더 이상 무겁게 느껴지지 않고 가벼운 바람처럼 느껴졌습니다. 힘을 한껏 빼고 하늘하늘 다가오는 그런 가볍고 기분 좋은 자연풍 말이죠. 클래식의 묵직하면서도 진지하기만 한 느낌을 버리고 대중성을 가미해 쉽고 가볍게 뉴에이지 음악들은 내 귀와 마음까지 편안하게 만들었습니다.
뉴진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잔뜩 힘이 들어간 기존 아이돌 음악을 해체하고 분해해 좀 더 편안하고 여유로운 느낌의 음악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아이돌 그룹의 음악이라기 보다는 아이돌 음악의 새로운 장르로 말이죠.
사실 최근 저는 BTS와 NCT, 세븐틴과 엑소 등의 보이그룹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블랙핑크와 레드벨벳, 에스파와 그세라핌, 트와이스와 오마이걸 음악적 차이를 선명하게 알지 못하는 저를 보면서 이제는 더 이상 아이돌 음악을 즐길 수 없는 나이가 돼버렸다는 자괴감마저 들었습니다.
그런데 뉴진스를 듣고는 생각이 조금 달라지더군요. 내 눈과 귀가 잘못된 게 아니라, 실은 다 비슷비슷하게 전형화된 아이돌 그룹들의 컨셉과 음악때문이라는 생각때문입니다. 물론 십 대 시절 음정 하나로도 아이돌 음악들의 차이를 구분해 내던 귀는 사라졌지만 말이죠. 하지만 신기하게도 뉴진스의 음악은 듣자마자 아이돌의 전형의 보컬이나 메시지, 리듬과 템포가 완전히 다른 질감이 바로 느껴졌습니다. 아이돌 음악의 막귀가 되어버린 지금도 여전히 말이죠. 거기에 더해 음악만 듣는데도 멤버들의 몸짓과 의상과 무대가 그려지기도 했습니다. 영상을 통해 확인해보니 상상했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고 음악과 잘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데뷔 앨범 곡 모두를 찾아 들어봤습니다. '어텐션', '하이프 보이', '쿠키(Cookie)'와 '허트(Hurt)'까지 총 4곡이 수록된 앨범은 곡마다 각기 다른 매력이 있었습니다.
처음 들었던 Attention은 과하고 억지 하나 없이 내추럴하고 캐주얼한 하이틴 스타들의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부자연스러움이 하나 없는 보컬과 부담 없고 과장 하나 없는 청량한 리듬은 딱 그 나이대 소녀들에게만 느껴지는 감성이 느껴졌습니다. 과한 화장도 없고 과한 보컬도 없으면서도 어떻게 이렇게 완전한 다름을 느낄 수 있는지가 참 신기했습니다. 두 번째 곡 Hype Boy는 Attention에서 느낄 수 없었던 가창력과 보컬의 기교를 볼 수 있었습니다. 충분한 가창 능력을 Attention에서는 일부러 숨긴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개개인의 노래 실력도 상당하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론 Cookie라는 곡이 스토리도 음악적인 재미도 좋았습니다. 반복 구간도 인상적이었지만, 처음에는 늘어지듯 나른하게 시작하다가 점점 긴장감이 고조되는 구성은 음악적 재미를 더했습니다. 쿠키라는 소재도 신선하고 좋았습니다.
지금까지 나온 그 어떤 아이돌도 연상되지 않을 만큼 음악적으로도 시각적으로도 아이덴티티가 확실한 건 뉴진스의 최대 장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소 밋밋하고 심심해 보일 수 있는 리듬과 박자 감을 다채롭고 다양한 색감의 의상과 무대로 채워 넣은 듯한 전략도 영리해 보입니다. 브랜드 로고 등의 그래픽들의 테마가 현재 Z세대에게 사랑받는 Y2k(1999년에서 2000년으로 넘어가는 시기)의 세기말 패션과 감성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각적 장치는 저희 같은 X세대에게는 그때의 향수를 불러 일으켜 나이에 대한 거리감을 없애주고, MZ세대에게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문화적 감성을 느끼게 해줄 것 같습니다.
또한 다양한 버전의 90년대 세기말 풍의 로고들은 이제 막 인터넷 문화가 태동하기 시작한 어쩌면 지금 온라인 무대의 시초가 된 PC 화면과 각종 전자제품들이 연상됩니다. 온라인 시대의 시초가 된 오리진을 가진 스토리를 상징하듯 뉴진스 또한 새로운 음악의 오리진이 될 거라는 포부가 엿보입니다.
이렇게 시각적인 부분들의 테마는 음악적 부분과 연결되는 맥락을 염두하지 않았다면 나오기 힘든 컨셉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모든 방향성을 지휘한 민희진 대표의 감각이 정말 탁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디자이너이기도 한 본인의 장점을 잘 살린 디렉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아이돌 음악인데 다르면 얼마나 다르겠어 ?!' 했는데 뉴진스를 들어보니 정말 다르긴 다르다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기존 아이돌 음악의 정말 좋은 대안이라 생각합니다. 영원한 젊음의 대명사인 청바지처럼 질리지 않는 음악을 하겠다는 그들의 각오처럼, 오리진의 유전자를 계속 지켜가며 건강한 그룹으로 성장해갔으면 합니다. 뉴진스라는 이름처럼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대를 대변하는 음악을 앞으로도 계속 들려줬으면 좋겠습니다.
글. 우현수 @woohyunsoo
브랜드 컨셉 빌더 [브릭] BRIK.co.kr을 설립해 브랜드 스토리와 스타일 구축을 돕고 있습니다. 저서 <일인 회사의 일일 생존 습관>을 실천하며 더 나은 미래를 차곡 차곡 쌓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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