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는 봄 꽃보다 설레는 색이 있습니다. 바로 이즈음에 돋아나는 연둣빛의 나뭇잎들입니다. 푸른 하늘과 대비를 이루면 그 어떤 색상의 조합보다 기분 좋아지는 자연의 색입니다.
이와는 조금 대비되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회색을 정말 좋아합니다. 어떤 일이든 '균형'을 중요 시하는 저는 색깔마저도 중간톤을 좋아하게 되었나 봅니다. 자연스럽게 소비하는 상품도 회색 빛이 감도는 것들이 많습니다. 언제가 백발이 되면 회색 염색을 한번 시도해보고 싶은 생각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회색도 살펴보면 다 같은 색이 아닙니다. 차가운 느낌의 쿨그레이가 있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웜그레이가 있습니다. 웜그레이 안에는 난색 계열인 노랑이나 붉은 계열이 섞입니다. 쿨그레이는 한색 계열의 파랑이나 녹색 계열의 한색이 섞입니다. 같은 회색이지만 두 색이 가지고 있는 느낌이 완전 달라서 적용될 대상의 성격에 따라 잘 어울리기도 하고 어색해지기도 합니다.
디자인을 전공하다보니 아무래도 색상이나 색감 차이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할 수 없이 민감해져야 했습니다. 입시 미술을 시작할 때부터 여러 가지 포스터 물감을 섞고 스스로 색깔을 만들어 본 경험이 민감도를 높이는데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채색 훈련으로 좁았던 색상의 스펙트럼이 자연스럽게 넓어졌습니다. 하지만 절묘한 색 감각을 가진 친구들을 따라잡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 친구들은 서너 개의 색깔 조합만으로도 독특하고 예쁜 채색을 해냈습니다. 이런 걸 볼 때마다 훈련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어떤 한계가 존재한다는 걸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평균의 사람들 보다는 높은 수준의 색감 민감도를 가진 저의 눈에는 핑크에도 수십 가지의 핑크빛이 있고, 블루에도 수백 가지의 파랑이 보이고, 그레이에도 굉장히 많은 빛깔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심지어 블랙도 질감이나 소재에 따라 다 다르게 느껴집니다. 같은 핑크라고 해도 채도가 확 올라간 한껏 명량한 소녀풍의 핑크가 보이고, 블루에도 청명한 하늘을 닮은 가벼운 블루가 있는가 하면, 해저 깊은 곳의 딥하고 무겁고 묵직한 느낌의 블루가 있습니다. 그레이에도 제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애플의 약간의 차가운 블루빛이 감도는 스페이스 그레이가 있고요. 버섯 리조또의 크림색 같은 따뜻한 느낌의 웜 그레이가 있습니다. 같은 블랙이라도 색이 입혀진 소재와 질감에 따라 다른 빛을 뜁니다. 반짝반짝 화사한 블랙이 있는가 하면 굉장히 메마르고 세밀해 보이는 블랙도 있습니다.
가끔 이런 얘기를 건네면 디자인이나 미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아내는 '그렇게 살면 참 피곤하겠다'며 눈을 흘기곤 합니다.
기성 디자이너가 돼서는 매 프로젝트마다 브랜드에 맞는 컬러를 찾는 노력을 하다 보니 색상의 폭이 조금은 더 넓어졌습니다. 분명 한계는 있지만 고민하고 연구한 만큼 색깔에 대한 이해도도 커지고 색깔 해석하고 매칭하는 스킬도 늘었습니다. 색깔이 어려운 이유는 매칭때문입니다. 하나의 색깔만 사용하라고 하면 쉽지만 두 개 이상의 매칭으로 의도하는 색을 만들어내려면 굉장히 어렵습니다. 많은 색깔들을 매칭해 보면서 어떤 색이 옆에 놓였을 때 어떤 느낌과 이미지를 주는지를 계속해서 훈련해야 색깔의 감각을 올릴 수가 있었습니다. 어렵다면 몇 가지 좋은 매칭을 공식처럼 외우는 것으로도 어느 정도의 수준으로 올리는데 도움이 됐습니다.
세상을 보는, 브랜드를 보는 여러가지 관점들이 있지만 이렇게 훈련한 색을 통해 바라보고 분석해보면 더 많은 것들이 보입니다.
이 제 곧 5월입니다. 앞 서 말씀드렸듯이 저는 3월을 지나 4월 말에서 5월로 넘어가는 이 계절의 색을 그 어떤 색보다 사랑합니다. 초록이 완성되기 전의 연둣빛은 그냥 녹색이 아니라 노랑이 약간 섞인 색상입니다. 성숙하게 완성된 녹색이 아니라 소생하고 성장해가고 있는 진행형의 녹색입니다. 차갑고 청명한 파란 하늘과 이 색 따뜻한 연두색 잎이 한눈에 들어오면 이보다 아름다운 자연의 채색이 있을까 싶습니다.
이렇게 자연의 그린들도 있지만 인간이 스스로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그린도 있습니다. 보통 그린은 생명의 색입니다. 자연, 회복, 성장, 조화, 안전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차가운 파랑과 따듯한 노랑이 섞여 만들어내는 색인만큼 균형의 이미지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성과 감성의 중간, 여성적이면도 남성적인 면도 가진 색입니다. 특히 심리적으로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안락함을 주는 치유의 색입니다. 특히 요즘 시대의 가장 큰 화두 중 하나인 친환경, 재생에너지와도 관련된 색상이죠. 이런 점에서 보면 산업화 시대 레드와 블루 일색이던 소비 시장에서 언제부턴가 그린이 화두가 된 건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같은 그린이라도 전통적으로 생각하는 자연, 안정, 휴식 등의 이미지만 있는 건 아닙니다. 최근 각 브랜드들은 그린 계열 색상에 다양한 가치들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러면 한번 그린이 브랜드들에 어떻게 적용되고 어떤 느낌을 주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스타벅스의 진초록은 자연이나 성장보다는 어떤 이야기와 헤리티지가 녹아있는 진귀한 초록입니다. 분위기 있고 진중하게 얘기를 건넬 것 같은 사람처럼 느껴지는 그린입니다. 사이렌이라는 인어를 모티브로 한 그린은 미스터리한 기분을 주는 브랜드 스토리와도 잘 어울립니다. 반면 같은 외식 브랜드 중 쉐이크쉑 버거의 그린은 신선함과 즐거움을 직관적으로 느끼게 합니다. 재료의 신선함이 느껴집니다. 맛있는 버거를 경험하는 재미와 즐거움이 잘 드러납니다.
하이네켄이나 칠성사이다의 그린에서는 청량감을 제일 먼저 느낍니다. 한 모금 마셨을 때 목이 간질거리면서 목을 타고 넘어가는 촉감이 느껴집니다. 아무래도 이 두 제품의 베이스가 물과 연관이 있는데 그린색깔이 주는 청정함이 맑은 물과도 잘 연계되고 있습니다. 또한 초록병을 쓰는 참이슬이나 처음처럼같은 소주 브랜드들 또한 그린과 찰떡입니다.
CU의 그린은 그린 단독이 아니라 보라색과 매칭되어 더욱 독특하고 개성 있는 이미지를 전달합니다. 생생한 일상에서의 친근함과 유쾌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특이하고 재밌는 친구처럼 항상 곁에 두고 싶은 느낌입니다.
랜드로버의 그린은 탐험과 모험을 상상하게 합니다. 푸르는 자연과 대지 위를 당당하게 달리는 레인지로버의 그림이 연상되는 그린입니다. 또한 자동차 엠블럼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 그린 색상은 브랜드의 포지셔닝을 확실하게 합니다.
네이버의 그린은 이제 우리나라 IT를 대표하는 색이 됐습니다. 네이버가 인터넷 포탈 서비스를 시작할 때만해도 인터넷 환경과 이 쪽 분야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던 조금은 촌스럽던 이 그린이, 이제는 IT 혁신 기업으로 글로벌로 도약해가는 푸르른 미래를 그려주는 색이 됐습니다.
현대차 모빌리티 브랜드인 슈퍼널(Supernal)의 그린도 독특합니다. '최상의 품질의’, ‘천상의’라는 뜻을 지닌 이 브랜드는 미래 항공 모빌리티(AAM)를 통해 고객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고 사회 변화를 이끌어 내려는 포부를 담았습니다. 자연에서 볼 수 없는 형광빛의 이 그린은 미래의 창에서 새어 나오는 눈부신 푸른 빛을 보는 듯합니다.
얼마 전 리뉴얼한 이니스프리의 그린은 기존 '자연'이라는 키워드에서 '미래' 또는 '패션' 기반의 코스메틱 이미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올리브 그린 계열의 친자연적인 이미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진보적인 화장품, 미래 세대가 쓸 것 같은 이미지를 새롭게 구축했습니다. 이는 기존 시장에서 거의 포화 상태에 이른 자연주의 화장품들에 대한 반발로 보입니다. 그저 편안하고 안일하기만 했던 스스로에 대한 성찰의 돌파구같습니다. 이번 리뉴얼의 의미가 크게 다가오는 건 거의 완벽하게 자연주의 화장품 브랜드를 완성해 낸 완성형 브랜드가 이렇게 극단의 변신을 선택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름만 남기도 다 바뀐 듯한 이러한 시도가 저는 기존의 호감을 가진 사용자들은 살짝 물러나더라도 새롭게 유입되는 고객층은 더 확보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고가 화장품이 아닌 대중적인 젊은 여성 20대에 더 정확하고 확실하게 소구하는 좋은 전략으로 보입니다. 아이브 장원영을 모델로 등장한 건 자연주의 건강 미인에서 젊은 감각을 대변하는 미인을 추구하는 이니스프리 브랜드 페르소나의 변화로도 읽힙니다. 이러한 이니스프리 브랜드의 색깔 변화는 브랜드 애용자들의 색깔 변화로 이어질 것입니다.
지금까지 다양한 비즈니스 영역에서 각 브랜드들이 그려내고 있는 그린의 향연을 살펴봤습니다. 정체성도 다르고 고객들에게 제공하고 있는 가치들도 다 다르지만 넓게 보면 '그린'이라는 하나의 색상 코드로 자신들의 브랜드를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만의 관점으로 그린을 해석해내고 있었습니다. 그린이 가진 기존의 의미에서 벗어나 다른 감각담아 전달하고 있었습니다. 하나의 색만으로도 이렇게 다채로운 빛깔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5월의 그린들이 보입니다. 뭔가 기분이 그냥 좋습니다. 딱 이 시기에만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아닐까 합니다. 가족과 함께 연인과 함께 또는 혼자서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도 행복의 그린 그림을 그려가는 시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의 <신간> '일인 회사의 일일 생존 습관'도 함께 읽어보시면 브랜딩과 창업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갖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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