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멋진 사람이 되길 바라며 아홉 번째 밤

축제가 너무 많은 스페인에서 마음껏 놀지 못하는 신세를 서러워하며, 한편으로는 게으른 소셜 활동에 핑곗거리가 있어 안도하며 별일 없이, 마음만 소란한 한 주를 보냈습니다.

2025.07.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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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enas Noches

스페인 시각으로 밤마다 스페인에서 워킹홀리데이하는 이야기를 적습니다.

구독자 님은 주말에 뭐 하셨나요? 어학원에 가면 주로 옆 사람과 주말에 뭐 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는데요. 어학원 학생들 대부분이 휴가차 2주 정도 오는 경우가 많다 보니, 주말까지 알차게 즐겨야 휴가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저도 그 질문을 듣고 주말을 돌아봤는데, 도서관에 일하러 간 것 말고는 뭐 했는지 딱히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죽치고 앉아 있던 시간에 비해 실질적으로 해낸 일은 별로 없었고요. 그래서인지 날씨가 좋아도 어딜 놀러 갈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고백하자면 별일이 없으니, 레터를 쓰는 부담이 덜해요. 더 재밌는 소식을 전하고 싶다는 마음과 레터를 쉽게 쓰고 싶다는 마음이 엎치락뒤치락하는 중입니다.

그래도 재즈 페스티벌이 주말까지라, 그냥 넘기면 아쉬울 것 같아 고민 끝에 부랴부랴 다녀왔어요. 플라멩고 퍼포먼스를 함께 하는 아티스트의 공연을 봤는데 정말 멋져서 보러 가길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금요일에도 DJ 공연을 하나 봤는데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춤을 추는 모습이 정말 신나고 좋아 보였어요. 그걸 보며 스페인에서는 돈 주고 가는 축제보다 무료 축제가 더 신난다는 사실을 다시금 실감했습니다.

제가 어떤 단체 톡방에 들어가있는데요. 도노스티아에서 서핑하는 여자들의 커뮤니티인 것 같아요. 금요일 DJ 공연도 그 커뮤니티에서 함께 가자는 메시지를 보고 가게 된 거였어요. 그런데 막상 가보니 아는 척할 용기가 안 나서 그냥 혼자 구경하고 돌아왔습니다. 오늘도 '같이 맥주 마실 사람 있냐'는 톡이 올라왔는데, 레터를 쓴다는 핑계로 외면했어요. 그래도 일요일에는 그 커뮤니티에 올라온 요가 클래스에 다녀왔어요. 요가 수업 한 번 들었다고 바로 라포가 쌓이진 않았지만, 오랜만에 운동을 한 것만으로도 좋았습니다. 어쨌든 현지 커뮤니티에 들어가 보려고 나름대로 노력 중이에요.

 

이번 주는 커뮤니티의 소중함을 실감한 한 주이기도 했습니다. 저에겐 격주마다 구글 미트로 근황을 나누는 뉴질랜드 워홀러 친구가 있는데요. 지금 제 일상이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는 많이 달라서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는 미주알고주알 얘기하기가 좀 꺼려지더라고요. 누구나 볼 수 있는 SNS에 쓰기 어려운 사적인 고민도 있고요. 이번에 그 친구를 만났을 때 털어놨는데 뜻밖에도 공감해 줘서 말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토요일에는 온라인으로 여성 개발자끼리 근황을 나눴어요. 지금 3명이 워홀을 나가 있어서 어쩌다 보니 글로벌 여성 개발자 모임이 됐습니다. 이번 기회에 한국, 스페인, 캐나다의 시차를 맞추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해외에서 구직하는 이야기도 듣고 현지에서 네트워크를 만드는 팁도 들을 수 있어서 좋았어요. 해외 IT 업계 분위기에 대해 얘기하는 것도 흥미로웠고요. 워홀로 하루하루 보내다 보면 한국에서 떨어져 나온 섬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데요. 워홀 생활의 어려움을 공감해 주는 사람이 없다면 좀 외로웠을 것 같아요. 주위에 워홀러가 많은 것도 참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끔은 제가 언어 실험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도서관에 가면 거의 모든 글자가 바스크어로 되어 있어서 아는 단어가 거의 없거든요. 어떨 땐 모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기도 해요.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언어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을까? 언어 없이도 대화할 수 있을까? 언어라는 도구 없이 사람을 끌어들이려면 뭘 쓸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이 문득 떠오르곤 합니다. 

요즘 외모에 대한 고민도 자주 했어요. 저는 화장을 안 한 지 꽤 됐는데요. 제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좋은 대화를 하는 거예요. 자만일 수도 있지만, 한국에서의 저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좋은 대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외적인 부분까지는 신경을 잘 안 쓰게 됐고요. 그런데 여기에서는 언어 능력이 떨어지니까, ‘외적으로라도 꾸며야 하나?’ 하는 위기감이 생기더라고요. 하지만 한 주 동안 열심히 고민해 본 끝에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남에게 멋진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고 나에게 멋진 사람이 되자. 남이 누군지도 모르겠고 여러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려면 너무 많은 것에 신경을 써야 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어떤 사람을 멋있다고 생각하는지 적어봤어요. 하나, 한다고 한 것을 책임감 있게 해내는 사람. 둘, 외국어로도 좋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 셋, 글 쓰는 사람. 당분간은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이 세 가지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한편으로는 ‘한국어만 알아도 평생 불편 없이 살 수 있는 세계’가 있다는 게, 갑자기 생경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외국에서 살기 전엔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는데요. 한국어는 정말 독특한 언어라는 걸 새삼 실감하고 있어요. 프랑스어나 이탈리아어, 스페인어는 서로 비슷한 점이 많은데, 한글은 그 어떤 언어와도 닮지 않았잖아요. 오직 한국에서만 쓰는 언어고요. 유럽 사람들의 스페인어 발음을 듣다 보니 한국어의 발음이 얼마나 특이한지도 새롭게 느껴져요. 문득 '한국어를 배우려는 외국인들은 이렇게 범용성 낮은 언어를 왜 배우려고 할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기도 했어요.

이번에 '헬로우톡'이라는 언어 교환 앱을 처음 써봤는데요. 신기하게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메시지가 엄청나게 오더라고요. 어떤 로직으로 제 프로필이 노출되는 건진 모르겠지만요. 스페인어 네이티브 중에서도 한국어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게 괜히 기분이 좋더라고요. 여기 도노스티아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각이라서요. 앱으로 채팅을 자주 하면 스페인어 공부에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아요. 그런데 문제는 제가 원래도 메신저 답장을 잘 안 하는 스타일이라는 거예요. 이렇게 많은 사람과 메시지를 주고받다 보면 현생 살기 어려울 것 같은데 다들 어떻게 그렇게 바로바로 답장하는 걸까요? 사실 이 앱은 한국에 있을 때 더 열심히 사용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스페인 현지에 있는 게 좀 더 위기감을 극대화하는 효과가 있을 거라고 정신 승리를 해봅니다.

 

요즘엔 스페인 전국적으로 축제가 많은 것 같아요. 도노스티아 인근 도시들도 한 주씩 돌아가며 축제를 하는 것 같더라고요. 축제가 많으면 좋을 줄 알았는데요. 오히려 축제가 일해야 한다는 사실을 더 비극적으로 만들기도 하더라고요. 도서관에서 어학원 친구가 스페인어 공부를 하는 걸 보면 부러울 지경이에요. 일을 안 한다고 해도 딱히 스페인어 공부를 할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죠. 누군가가 '일하기 싫을 때, 일할 수 있는 것도 특권이라는 걸 기억하라'는 말을 했는데요. 맞아요. 일을 할 수 있는 건 대단한 행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실이 일할 의지를 북돋아 주지는 않더라고요. 오히려 일할 의지를 북돋아 주는 건 유로 환율입니다. 요즘 유로가 너무 올라서, 지금은 1600원이 넘었거든요. 주말에 12유로짜리 라멘을 사먹다가 이게 거의 2만 원이라는 사실에 충격받았어요. 충격 요법으로 일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동기부여를 얻었습니다.

저번 주에 이어 이번 주에도 목요일에 어학원이 쉰다는데요. '성 이그나시오 데 로요라(San Ignacio de Loyola)' 축일이래요. 그분이 기푸스코아주와 비스카야주의 수호성인이라 해당 지역에서만 지방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목요일에 쉬고 금요일에 어학원에 가면 다들 목요일에 뭐 했는지 물어보겠죠? 과연 저는 어떤 대답을 하게 될까요? 이번 주에는 담대하게 소셜 모임에 도전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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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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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사커피의 프로필 이미지

    회사커피

    0
    5 months 전

    가끔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에서 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어를 배우게 되는 과정이 너무 신기하다고 느낀 적이 있습니다. 교과서도, 강의도 없이 어떻게 저렇게 배울 수 있을까? 숟가락은 물체를 가리키며 숟가락이라고 알려주면 되지만, 귀엽다, 화가 난다 같은 주관적이고 감정이 담긴 단어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신기하다고 느꼈습니다. 저도 일단 스페인에 던져두면 스페인어를 할 수 있게 될까요? ㅎㅎ

    ㄴ 답글 (1)
  • 돌체의 프로필 이미지

    돌체

    0
    5 months 전

    저는 26살부터 주말 출근러라 휴가나 명절 빼고는 일을 하러 가요. 처음엔 남들 일할 때 쉬는게 마냥 좋았는데 지금은 평범한 삶이 베스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시 출퇴근인 보통의 사람들이 부러워요. 7월 셋째 주부터는 아이들이 방학이라 지난 레터는 오늘에서야 읽을 수 있었어요. 방학 시즌이 다가오면 아침부터 수업이 있기 때문에 수면 패턴을 바꿔야 하거든요. 또한 상반기/하반기 아이들의 성장 안내서를 타이핑해서 학부모님께 드리고 있는데요, 저는 논문 쓸 때부터 알아봤지만 글 쓰는 능력이 정말 없거든요. 어제 새벽에서야 마지막 아이의 안내서를 끝내고, 치고싶었던 곡을 연습하다가 경건한 마음으로 레터를 읽어요. 노체님께서 위에서 멋있다고 생각하는 세 가지에 대하여 읽다가 괜히 또 찔려서 댓글을 쓰고 다시 연습하러 가보려고 해요. 첫째. 제가 하고 싶었던 곡을 팀원들에게 하자고 했는데 너무 어려워서 이 곡은 하지 말자고 하려던 참이었어요. 그치만 책임감 있게 연습해 가려고 해요.. 둘째는 잘 할 수 있는 외국어가 없어서 패스, 그리고 셋째는 상반기 안내서 글을 잘 썼으니 하반기에도 아이들의 장점과 단점을 좀 더 풍성한 어휘로 쓸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번에도 많은 생각이 드는 레터였어요. 줄줄이 쓰다보니 글이 너무 길어졌는데 읽어줘서 고맙습니다! 당분간 축제는 무료 축제만 가보기로 해요.

    ㄴ 답글 (1)
  • Bianca의 프로필 이미지

    Bianca

    0
    5 months 전

    특별한 소식이 없다고 시작하셨지만, 하나하나 모든 부분에 공감이 가네요. 같이 스페인 워홀을 하고 있어서 더욱 그렇겠죠. 정말 스페인은 축제의 나라고, 특히 무료축제가 재밌어요! 혼자보다 누군가와 함께 즐길 때 더 더 배가 되니 다음에는 꼭 알은체를 해보시기를요 ! 해외에 나와 살면서 긴밀하게 소통할 수 있는 관계, 커뮤니티가 얼마나 중요한지 간절히 느끼고 있어요. 노체님도 저도 좋은 사람들을 잔뜩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멋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 요새 끊임없이 되새기고 있는 생각이에요. 나이가 들면서 점점 편한대로 살던대로 살아가게 되지 않나 반성도 하고요. 점점 ’나‘라는 사람이 밍밍하고 납작해지는 느낌. 특히 스페인어로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으니,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밖으로 꺼내기가 어려워 더 매력이 없어지는 것 같고요. 스페인어 공부를 고도화해야겠다는 다짐을 한 주말입니다. 우리 화이팅 ! 다음주 레터도 기다릴게요🤍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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