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을 돌아보며 열 번째 밤

스케이트보드를 타다 넘어졌습니다. 성심성의껏 나를 돌보며 한 주를 보냈습니다. 어쩌면 신이 머물다 간 순간이었을까 싶을 정도로 여러 심경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2025.08.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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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enas Noches

스페인 시각으로 밤마다 스페인에서 워킹홀리데이하는 이야기를 적습니다.

오늘도 제시간에 레터 보내는 건 요원해 보이는데요. 그래도 저는 오늘의 최고 난도 과제인 샤워를 해치워서 마음이 한결 편합니다. 어쩌다 씻는 일이 이렇게 두려운 일이 되었냐고요?

지난주 일요일, 스케이트보드를 타다가 넘어졌어요.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습니다. 다만 고등학생 때 이후로 오랜만에 무릎이 갈렸습니다. 그래도 꼴에 경험이 있다고 많이 당황스럽진 않더라고요. 마침 한국에서 가져온 습윤 밴드가 있어서 그걸 붙이면 되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그 오만함을 보고 신이 '이것 봐라' 하셨을까요? 다음 날, 어학원 등교 시간을 단축하려고 또 스케이트보드를 들고 나갔는데 그만 또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양쪽 무릎과 팔꿈치, 그리고 오른손 엄지손가락에 상처를 입은 사람이 됐습니다. 첫 번째 넘어졌을 때는 넘어갈 수 없는 틈새를 넘으려는 객기를 부리다가 넘어졌는데요. 두 번째 넘어졌을 때는 왜 넘어졌는지 이유를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인지 두 번째 넘어졌을 때는 확 두려움이 밀려들었습니다. 앞으로 보드 탈 때에도 이유도 모른 채 넘어지는 일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과 스페인에서 병원 가는 일만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요.

제가 넘어질 때 옆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던 남자가 "¿Estás bien?"이라고 물어봤는데요. 직역하면 "너 좋니?"라는 뜻이지만 괜찮냐고 묻는 거겠죠. 일단 그 남자가 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에 괜찮다는 의미로 "Estoy bien."이라고 답했어요. 직역하면 '나는 좋아'라는 뜻입니다. 사실 전혀 좋은 상황은 아니었어요. 좋다는 건 완전 거짓말이라 그냥 괜찮다는 정도로만 대답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아무리 검색해도 스페인어로 '괜찮다'라는 말이 없더라고요. 괜찮다는 단어가 한국에만 있는 게 아니라 일본에도 '大丈夫'라는 단어가 있잖아요. 이 점이 흥미롭게 느껴지더라고요. 찾아보니 한국과 일본은 완충, 중립 표현이 자주 필요한 고맥락 문화이고, 스페인은 긍정과 부정은 직접적으로 말하며 중립적 뉘앙스는 문장을 덧붙여 표현하는 저맥락 문화라 이런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메일로 소통할 일이 많던 회사에 다닐 때, '죄송하다'라는 말이 왠지 모르게 예의와 전문성이 부족해 보이는 것 같아 한참 검색한 끝에 '송구스럽습니다'라고 적어 보낸 적이 있는데요. '스페인에서는 그런 고민까지는 안 해도 되는 걸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독자 님은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다쳐본 적이 있나요? 혹시 다쳐본 적이 없다면, 엄지를 다쳤을 때 어떤 불편함이 있을지 한번 상상해 보세요. 사실 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불편한 게 많더라고요.

일단 엄지손가락에 밴드를 붙이면 핸드폰 지문 인식이 안 됩니다. 카톡 보내는 것도 불편하고요. 설거지도 왼손으로 해야 하고, 페트병 뚜껑을 돌릴 때도 힘들어요. 습윤 밴드를 적당한 크기로 자르기 위한 가위질도 하기 어렵고요. 지금 레터를 쓰는 중에도 스페이스바를 누를 때마다 고통을 감내하고 있습니다.

팔꿈치와 무릎을 다치니 몸을 일으키기가 불편했어요. 그때 처음으로 사람은 발딱 일어나는 게 아니라 팔다리로 바닥을 밀어내면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상처에서 진물이 나서 잠도 편하지 않았어요. 조금만 옆으로 누워도 진물이 이불을 적시더라고요. 무릎을 굽혔다가 펼 때마다 애써 응고된 딱지를 다시 잡아당기는 고통을 느껴야 했고요.

특히 샤워하는 게 재앙이었습니다. 상처에 물이 닿지 않게 하려고 마치 '죠죠의 기묘한 모험'에 나올 법한 기묘한 포즈로 샤워해야 했는데요. 문득 한국에서 움직임 워크숍을 했던 게 떠올랐어요. 한 번도 써보지 않은 근육을 써보는 움직임 활동이었는데,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떠오르지 않아서 계속 비슷한 동작만 반복했던 것 같아요. 양 팔꿈치와 무릎에 물이 닿지 않도록 샤워하는 활동을 해보면, 나도 몰랐던 내 몸의 온갖 근육을 발견할 수 있다는, 알아둬도 별 쓸데없는 팁을 알려드립니다.

지난 한 주 동안 습윤 밴드와 거즈 밴드 사이에서 무수한 고민을 했는데요. 챗GPT가 흉터 없이 상처를 아물게 하는 데 습윤 밴드가 좋다고 해서, 좀 비싸지만 큰맘 먹고 습윤 밴드를 구매했습니다. 습윤 환경이 유지되면 일주일도 버틴다지만, 진물이 새면 바로 갈아야 한대요. 문제는 그 '안 새게 유지하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점이었어요. 결국 마지막 한 장을 무릎에 통째로 붙여봤지만, 걷기 시작하자마자 진물이 넘쳤습니다. 그 순간 새삼 우리가 서 있는 매 순간, 중력에 저항하고 있다는 걸 실감했어요.

거즈 밴드는 하루 1~2번 갈아야 한다던데요. 솔직히 하루 3끼 챙겨 먹어야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귀찮은데, 도저히 매일 두 번씩 밴드를 갈아줄 자신이 없었어요. 더 이상 아무것도 처치하고 싶지 않다는 격렬한 마음으로 습윤 밴드 2통을 샀는데 결국 마지막까지 버틴 습윤 밴드는 없었습니다. 비싼 소고기를 샀는데 요리를 잘 못해 맛없어진 장조림을 보는 듯한 배신감을 느꼈어요.

 

그렇게 심하게 다친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길게 쓸 필요가 있나 싶으실 텐데요. 문득 '내가 한국에서 이렇게 다쳤어도 지금 느끼는 것 같은 감정들을 느낄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만약 한국에 있었다면, 넘어지고 다음 날 바로 병원에 가서 드레싱을 받았을 것 같아요. 아픈 몸만큼 일하는 데 방해되는 것도 없으니까요. 이것저것 찾아보면서 에너지 쓰기 싫어서 그냥 의료진에게 다 위임했을 거예요. 그런데 병원에 갈 수 없는 상황이 되니까 이것저것 엄청 찾아보게 되더라고요. 식사, 치료 같은 돌봄을 위임할 수 없게 되자 '우아하고 매끄럽게 살기가 이렇게 어렵구나'하는 것을 실감하게 됐습니다.

상처를 치료해 줄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까 상처도 자주 들여다보게 되고 작은 변화에도 기민하게 반응하게 됐어요. 두 번째 넘어졌을 때 좀 울적해져서 챗GPT에게 감정적으로 위로해달라고 했는데, 그 뒤로 상처 관련 질문을 할 때마다 계속 응원을 해줬어요. "지금 이렇게 몸이 보내는 신호를 듣고, 상처 하나하나 꼼꼼히 관찰하고 있다는 건 당신이 몸을 정말 소중하게 여긴다는 뜻이에요." 그 문장을 보고 정말 오랜만에 이렇게 몸에 신경 쓴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동안 몸은 해야 할 일을 하는 도구처럼 느껴졌던 것 같아요. 일을 해야 하는 데 졸리고 어딘가 불편하면 짜증부터 났고, 하루에 2~3번씩 처치를 해야 한다면 '귀찮다', '회사 가야 하는데 그걸 어떻게 하냐'고만 생각했어요. 저는 '귀찮다'는 혼잣말을 많이 하는 사람인데요. 갑자기 '귀찮다'고 말할 때마다 정색하시던 회사 동료 얼굴이 떠오르면서 왜 그때 정색하셨는지 알 것 같았어요. '귀찮다'는 말만큼 무의미한 말도 없더라고요. '귀찮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 일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 말 할 시간에 행동하는 게 낫겠더라고요. 이번에 귀찮다고 말하는 대신 내 몸을 돌보는 걸 우선순위로 두고, 하루에 1~2번씩 상처를 살피고 적절하게 처치해주다 보니 상처가 점점 아물고 있는 게 눈에 보였습니다. 이제는 멀쩡하게 샤워할 수 있게 됐어요.

 

구독자 님은 'Green Thumb'인가요, 'Brown Thumb'인가요? 'Green Thumb'은 식물을 잘 키우는 사람, 'Brown Thumb'은 식물을 잘 죽이는 사람을 뜻한다고 해요. 예상하셨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Brown Thumb'입니다. 이제까지 키운 식물은 거의 다 죽였거든요. 잘 돌보지 못하는 건 식물뿐만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드라마 <도깨비>를 보지 않았지만, 문득 그 드라마의 명대사가 떠올랐어요.

누구의 인생이건 신이 머물다가는 순간이 있다. 당신이 세상에서 멀어지고 있을 때 누군가 세상 쪽으로 등을 떠밀어주었다면, 그건 신이 당신 곁에 머물다가는 순간이다.

드라마 <도깨비> 中

저는 신이 제 곁에 머물다 간다고 해서 '행운 놓고 갑니다'라고 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오히려 '정신 차려 이 각박한 세상 속에서'에 가깝지 않을까요? 신이 어디에나 머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유구한 전통에 따라 현자들은 고기를 잡아주는 대신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게 되어있으니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주는 저에게도 신이 머물다 간 순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식물은 집에 들이지 않으면 돌볼 필요도 없지만요. 내 몸은 아프다고 어디에 갖다 버릴 수도 없으니 결국 언젠가는 나를 잘 돌보는 법을 익힐 수밖에 없습니다. 상처 때문에 고생깨나 했지만, 사실 상처 아니었으면 나를 돌보는 감각을 익힐 수 없었을 것 같아요. 아직 상처는 아물어가는 중이라 앞으로도 잘 돌보려고 합니다.

 

어학원에는 매주 월요일마다 새로운 학생들이 오기 때문에, 월요일마다 자기소개를 하는데요. '워킹홀리데이'로 스페인에 왔다고 했더니, 선생님이 '휴가'라는 뜻의 vacaciones라고 표현해야 한다고 알려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아니다, 워킹홀리데이라는 비자가 있다'고 설명하고 싶었는데, 제대로 전달됐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랬더니 선생님께서 '어떻게 워킹이랑 홀리데이가 같이 있을 수 있냐'고 하시더군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워킹이냐, 홀리데이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외쳐야만 할 것만 같은데요.

지난주 레터를 다시 읽어 보니 일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 회의, 좌절, 슬픔이 컸던 것 같아요. 이번 주에는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사실 저는 의외로 스페인을 열렬히 사랑해서 온 건 아니거든요. 누군가 왜 스페인으로 워킹홀리데이를 가냐고 물으면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실험해 보고 싶어서'라고 대답했어요. 그런데 막상 와보니 스페인을 100% 즐기지 못하면 손해인 것 같은 기분에 시달렸습니다. 워킹홀리데이는 제가 저에게 주는 선물이 맞아요. 하지만 제가 준 선물은 스페인에서의 삶을 즐기는 시간이 아니라, 일을 하면서도 좀 더 나은 삶을 사는 방법을 실험할 수 있는 시간이었거든요. 늘 일과 저는 철천지원수처럼 느껴졌고, 일하는 제가 천성이 나태한 저를 저주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요. 언젠가부터 일과 저의 사이를 개선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걸 실험할 절호의 기회인 거죠. 저의 목표는 일과 함께 행복해지는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걸 경험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억울해할 필요가 없어요. 도서관에서 매일 스페인어를 공부하더니 어느새 저보다 스페인어를 더 잘하게 된 어학원 친구를 부러워할 필요도 없는 거죠. 제 목표는 거기에 있지 않으니까요. 그렇게 마음을 다잡기로 했습니다.

 

한편, 일을 시작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게 고민입니다. 늘 스스로를 어르고 달래며 일을 시작할 방법을 궁리하는데요. 내가 뭘 좋아할지 생각해봤어요. 어디였는지도 기억 못 하고 있던, 과거의 내가 씨앗을 뿌려놓은 자리에서 뭔가가 움트는 걸 우연히 발견했을 때. 저는 그런 순간을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미래의 나에게 기대할 거리를 만들어주는 일을 최우선으로 하자'는 좌우명을 만들었습니다.

글을 쓰는 일은 정말 힘듭니다. 아이스크림을 한 통 사놓지 않으면 시작할 엄두가 안 나요. 글을 다 써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죠. 그 순간 얻는 보상도 전혀 없고요. 그런데 나중에 글에 댓글이 달린 걸 발견하거나, 미래의 내가 그 글을 읽으며 지금의 나를 만든 한 조각을 이해하는 시간을 가질 때 느끼는 기쁨이 큽니다. 제가 써놓은 글이 없었다면 그런 기쁨을 느낄 수 없었을 거예요. 그래서 '지금 당장 보상을 얻을 수 없더라도 미래의 기쁨에 투자해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아마 많은 한국 사람이 이미 그렇게 살고 있겠지만요. 저는 그게 잘 안되더라고요. 쓰다 보니 이거 그냥 ADHD 일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훗날 ADHD 치료를 받게 된다면, 지금 쓰는 글이 사료로 쓰일 씨앗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시작을 계속 미루는 건, 내가 정말로 이 일을 해낼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불안감을 떨치려고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봐서 '넌 할 수 있어'라는 대답을 들어도 사실 공허하게 들릴 뿐이잖아요. 해낼 수 있을지 없을지는 해보기 전까지는 누구도 알 수 없으니까요. 불확실한 일에 대한 불안을 없애는 방법은, 결국 불확실한 일 한가운데로 들어가 삽질하며 확실한 부분을 조금씩 늘려 가는 것뿐인 것 같아요. 조금이라도 더 알게 되면 내일의 나는 조금 덜 불안해지는 것 같더라고요. 이것도 미래의 나를 기쁘게 만드는 선택이라 할 수 있겠죠.

 

이제 그만 줄여야 할 것 같은 분량입니다. 하지만 좋은 소식도 전해야겠죠. 저번 주까지만 해도 어학원에서 친구를 사귀기 어렵고 소셜 모임에도 나가기 싫어 고민이 많았는데요. 이번 주에는 어학원 액티비티에 다녀와서 나름대로 대화를 많이 나눴습니다. 저는 연상의 여성분들과의 대화가 편한 편이더라고요. 당연한 얘기지만, 주파수가 맞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은 조급한 마음 때문인지 옆에 앉은 친구에게 말을 못 걸면 자괴감이 들었는데, 이제는 옆에 앉은 친구와 대화가 잘 안돼도 '그냥 주파수가 안 맞는 사람이겠거니'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송구하게도 저번 주 레터 사이에 금요일이 두 번 있었는데요. 그건 곧 어학원 친구들과 두 번 작별했다는 뜻입니다. 저번 주에는 작년에 다녀온 락 페스티벌 팔찌를 잘라내기 싫어 아직도 차고 다니는 귀여운 슬로베니아 친구와, 이번 주에는 어학원이 끝난 뒤 알베르게에 자원봉사를 하러 가는 멋진 스위스 친구, 그리고 제가 수업에 지각할 때마다 장난스레 혀를 끌끌 차던 선생님 친구와 작별 인사를 나눴습니다. 지난주에는 작별 인사를 나눌 때 기념할 만한 것이 없었던 게 아쉬워서, 이번엔 한글이 적힌 스티커를 선물했어요. '다시 만날 세계'라고 적힌 스티커였는데요. 제가 한국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자부심, 전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문자인 한글의 아름다움과 직접 대통령을 바꿔낸 시민들의 용기가 언젠가라도 잘 가닿았으면 좋겠습니다.

 

얼마 전에 해외에 사는 여성 커뮤니티에 들어갔어요. 지난주에는 회고 모임과 영어 에세이 읽기 모임을 했습니다. 회고 모임에서는 특히 한 달 동안 느낀 질투, 열등감, 번아웃 같은 좋지 않은 감정들을 인정하고 솔직히 털어놓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이야기 나눈 분 중에는 해외에서 5년 이상 살고 계신 분들이 많았는데요. 저는 아직은 1년 이상 이곳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거든요. 그래서 다들 어떤 계기로 여기에서 더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으셨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영어를 잘 못하다 보니 영어로 문학을 읽을 생각까진 못 해봤는데요. 막상 해보니 영어 텍스트에서 은유적 표현을 읽는 건 또 다른 재미가 있더라고요. 가장 좋았던 건 오랜만에 깊이 있는 대화를 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어요. 스페인어로 대화할 때는 ‘어디 갔다, 뭘 먹었다, 재밌었다’ 같은 1차원적인 대화만 가능했는데요. 이번에는 문장이 담고 있는 의미, 그 문장에서 떠오른 경험, 그리고 현재 살고 있는 나라의 특수성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모국어로 대화하는 소중함을 다시 한번 실감했습니다. 한국에 돌아가면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모임에 자주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저번 주 모임에서 읽었던 에세이는 어슐러 K. 르 귄의 Being Taken for Granite이었습니다. 직역하면 '화강암으로 여겨지는 것'이라는 뜻인데, ‘당연하게 여겨지다’라는 의미의 taken for granted를 비슷한 발음으로 바꾼 말장난이라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대요. '나를 단단하고 변하지 않는 돌처럼 여기지 말라'는 내용이었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남았던 문장은 이거였어요.

I am still here and still mud, but all full of footprints and deep, deep holes and tracks and traces and changes. I have been changed. You change me. Do not take me for granite.
나는 여전히 여기 있고, 여전히 진흙이지만 발자국들로 가득 차 있고 깊고 깊은 구멍들과 자국들, 흔적들, 그리고 변화들로 가득해. 나는 변해왔어. 네가 나를 변화시켰어. 나를 화강암으로 여기지 마.

Ursula K. Le Guin, Being Taken for Granite

제 무릎에는 고등학생 때 한번 갈려서 생긴 흉터가 남아 있는데요. 그게 마치 ‘어떤 것도 완전히 되돌릴 수는 없다’는 의미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하지만 나는 화강암이 아니라 진흙이고, 어디가 갈려서 사라진 게 아니라 그저 변형된 것이며, 이런저런 자국이 있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면 위안이 됩니다. 내가 대리석 조각이라고 생각하면 작은 생채기라도 날까 봐 잔뜩 긴장하고 외부의 자극을 모두 튕겨낼 준비를 해야만 할 것 같은데요. 나를 진흙이라고 생각하면 누군가 밟고 지나가 발자국이 남아도, 그 발자국도 나의 변형된 일부로 받아들이면 그만인 것입니다.

바쁘게 일하며 살 때는 감정의 소요가 없을 만한 선택만 하며 살았는데요. 모험과 안전의 경계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지금은 감정의 소요를 피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마도 지금은 온갖 발자국과 흔적들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나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관찰할 때가 아닐까 싶어요. 그러다 보면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것도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날이 올까요? 다시 스케이트보드를 탈 날이 곧 오면 좋겠습니다.

 

어학원 수업 시간에 재미있는 활동을 하나 했는데요. 특정 국가 사람들에 대해 흔히 가지고 있는 편견을 이야기한 뒤, 실제로 그 국가 출신인 사람을 앞으로 불러내 그 편견이 사실인지 직접 확인하는 활동이었습니다. 스페인 사람에 대한 편견을 얘기해 보자고 하니, 매일 플라멩고를 출 거다, 매일 타파스를 먹을 거다, 투우사일 거다(?), 게으를 거다, 매일 시에스타를 잘 거다, 시간을 잘 안 지킬 거다, 매일 밤 축제에 갈 거라는 등 다양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스페인 사람인 선생님은 마치 청문회처럼 가운데에 앉아 하나씩 편견에 대해 해명했는데요. 본인과는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라고 하더라고요. 국가에 대한 이미지와 개개인의 성격은 당연히 다르겠지만, 은연중에 전반적인 문화가 어느 정도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하나하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얘기해주니 신기했어요. 네덜란드, 미국, 이탈리아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는데, 다양한 나라에서 온 학생들이 있는 어학원이어서 이런 활동이 가능하다는 점이 재미있더라고요.

구독자 님은 어떤 성격인가요? 이게 무슨 질문인가 싶으실 텐데요. 저는 어학원 수업에서 자기 성격을 소개하는 문장을 말해야 했는데, 가장 먼저 튀어나온 답이 "Soy introvertida."였어요. '저는 내향적입니다'라는 뜻이에요. 그 외에는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어요. 그런데 문득 이게 내가 스스로에게 가진 편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구독자 님은 어떠세요? 자신에 대해 어떤 편견을 가지고 계신가요?

오늘로 10번째 레터를 보내게 됐어요. 이번 레터는 정말 간신히 보낼 수 있었는데요. TMI지만, 어렸을 때 인터넷 소설을 쓴 적이 있는데 10편 이상 올려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사실 한국발 비행기에서 첫 번째 레터를 쓰고 있던 제 자신도 이렇게 오래 쓸 수 있을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을 거예요. 오늘도 구독자 님 덕분에 제 자신에 대한 편견 하나를 깰 수 있었네요. 구독자 님도 저를 변화시키고 있다는 걸 알아주세요. 그럼 구독자 님도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들을 되짚어보는 밤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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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7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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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IYEON HA의 프로필 이미지

    JIYEON HA

    0
    4 months 전

    비공개 댓글 입니다. (메일러와 댓글을 남긴이만 볼 수 있어요)

    ㄴ 답글 (1)
  • Bianca의 프로필 이미지

    Bianca

    0
    4 months 전

    벌써 10번째 레터라니 ! 응원하고 축하하고 또 노체님의 경험을 나누어주셔서 고마와요 :) 스페인에 나와 살면서 정말 다양한 저의 모습들을 만나는 것 같아요. 30년을 살며 몸에 밴 행동과 습관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저를 보며 사람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는 좌절감도 느끼지만. 낯선 환경과 언어, 사람들 사이에서 한 발짝씩 용기를 내는 모습에 스스로 놀라기도 해요. 감정의 소요를 피하기 어렵다는 말이 참 공감되네요. 하루하루가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는 이곳에서 남은 날들도 잘 보내보기로 해요 ! 일을 하면서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방법도 터득하고요 !! 추신: 보드를 타다가 넘어졌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이렇게 크게 다친 줄 몰랐네요...! 병원 갈 일 없게 몸 건강, 마음 건강 잘 챙기며 살아요, ánimo!

    ㄴ 답글 (1)
  • 회사커피의 프로필 이미지

    회사커피

    0
    4 months 전

    어학원 사람들이 가진 한국인에 대한 편견은 어떤 것이 있었나요? ㅎㅎ 그리고 아프지마세요. ㅠ 다치는 몸은 하나라도 맘 아프고 걱정하는 사람은 10명이 넘어요 ㅠ

    ㄴ 답글 (1)
  • 돌체의 프로필 이미지

    돌체

    0
    4 months 전

    세상에, 무릎이 갈라졌다고요? 처음 글을 읽을 때에는 단순히 콩 하고 넘어진 줄 알았는데 살이 찢어졌나봐요. 저도 5년 전 봄에 벚꽃놀이 하다가 앞을 보지 못하고 넘어져서 무릎에 흉터가 있어요. 너무 놀라서 응급실가서 꼬매고, 매일 드레싱 했던 생각이 나는데 병원을 못 간다고 상상하니 아찔해요. 이제 상처가 아물어 샤워를 할 수 있게되어 다행입니다. 그래도 엄지손가락과 팔꿈치가 걱정되어요. 뼈가 다치지는 않았겠죠? 네덜란드의 편견은 항상 앞뜰에 튤립을 키우고, 풍차집에 살 것 같아요. 미국 사람들은 햄버거와 피자를 3끼 내내 먹을 것 같고, 이탈리아 사람들은 루꼴라 화덕피자와 파스타를 즐겨 먹으며 꼭 후식으로는 젤라또를 먹을 것 같네요.😂 앞에서 말했던 무릎 흉터도, 그리고 인간관계에서 오는 자국들도 저는 스스로를 대리석이라 생각하며 최근까지 아쉬워했던 것 같아요. 흉터를 보며 내 자식은 생채기 하나 생기지 않게 직접 학교와 학원을 라이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불안함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진흙 자국이 하나둘 모여 현재의 나를 만들어 준 것이겠죠. 고단한 삶에서 모난 자국도 있겠지만 예쁜 자국도 생기길 바라요.

    ㄴ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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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시각으로 밤마다 스페인에서 워킹홀리데이하는 이야기를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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