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아온 기회 앞에서 일곱 번째 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보다 더 잘 해낼 수 있을까요? 환경설정이 초기화된 노트북을 받아 든 사람처럼 막막한 기분으로,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한 주를 보냈습니다.

2025.07.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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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enas Noches

스페인 시각으로 밤마다 스페인에서 워킹홀리데이하는 이야기를 적습니다.

저는 지금 발렌시아로 향하는 심야버스 안에서 이 레터를 쓰고 있습니다. 발렌시아 근교 베니카심(Benicàssim)에서 열리는 Festival Internacional de Benicàssim에 가는 길이에요. 이 버스는 도노스티아에서 밤 9시 15분에 출발했고, 새벽 5시쯤 발렌시아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10시가 되기 전까지는 아직 해가 지는 중이라, 창밖으로 풍경이 또렷하게 보였어요. 마치 로드트립을 온 것 같다는 감상을 주는 풍경이었습니다. 사진에는 미처 담기지 않는 장대한 풍경들이 눈앞에 스쳐 지나가기도 했어요. 그 풍경들에 한참 시선을 빼앗기다가, 어둠이 내려앉은 지금에서야 레터를 쓰기 시작했네요.


한 주 동안 도노스티아는 비가 자주 왔습니다. 특히 밤에는 거의 매일 비가 왔던 것 같아요. 덕분에 하루 종일 집에 있어도 죄책감이 덜했어요. 날씨가 맑은 날엔, 누군가가 어서 나가서 이 도시의 아름다움을 누리라고 등을 떠미는 기분이 들거든요. 베니카심에 우산을 챙겨가야 하나 싶어 일기예보를 확인해 보니, 일주일 내내 쨍쨍하더라고요. 발렌시아 쪽은 원래 비가 거의 오지 않는대요. 페스티벌 일정 정할 때 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얼마나 더울지 걱정도 됐어요. 스페인도 더위로 유명한 나라인지라 요즘 날씨는 어떠냐, 너무 덥지는 않느냐는 연락을 종종 받았는데요. 도노스티아는 이번 주도 최고기온이 25도 정도로 꽤 선선했어요. 아마 발렌시아에 도착하면, 진짜 스페인의 여름을 제대로 경험하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구독자 님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고 싶으신가요? 누군가의 인터뷰에서 이런 질문을 볼 때마다 저도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되는데요. 저는 되돌리고 싶은 시간이 없더라고요. '고3으로 돌아간다면 지금보다 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었을 텐데. 처음 취업했을 때로 돌아간다면 지금보다 더 좋은 회사에 갈 수 있었을 텐데.' 같은 말들에 별로 공감이 안 돼요. 저는 그때의 저보다 잘할 자신이 없거든요. 제가 지나 온 모든 순간은 그때의 저의 최선이었던 것 같아요. 이미 치열하게 고민하며 지나 온 순간들을 굳이 다시 겪고 싶지도 않고요. 설령 지금의 경험치를 그대로 갖고 간다고 해도, 과연 더 수월하게 헤쳐나갈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요즘 들어 스무 살 무렵에 느꼈던 감정들이 자주 떠오릅니다. 서울에서 새로운 삶의 기반을 처음부터 쌓아가던 시절이요. 그때 저는 인상이 차가워 보인다는 말을 자주 들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늘 긴장한 상태였던 것 같아요. 저는 그때도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길 바랐거든요. 관계를 만들기 위해 가고 싶지 않은 모임에도 억지로 나가곤 했고, 인기 많던 친구를 흘끗거리며 따라 해보려고도 했습니다. 그런 노력이 실제로 삶의 기반을 쌓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기억나는 게 있다면 그 시절 제 자존감이 참 낮았다는 것 정도?

요즘은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시감이 듭니다. "다시 한번 기회를 줄게, 더 오래 살았으니까 이젠 더 잘할 수 있지?" 하는 시험에 든 기분이에요. 근데 이제 제 치트키 설정이 모두 초기화된 상태에서 시작하는 그런 시험이랄까?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여전히 막막하긴 한데요. 처음 손에 쥔 노트북의 환경설정을 하나하나 만져가듯 조금씩 눌러보고 익혀가는 수밖에 없겠죠. 사실 환경설정이라는 것도 한번 해두면 다시 손댈 일이 별로 없잖아요. 그걸 다시 처음부터 세팅해 보는 일은 어쩌면 흔치 않은 기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것저것 시도해 보고 성과가 있다면 삶의 환경설정을 구축하는 노하우를 공유하는 날도 오겠죠.

 

피소를 같이 쓰는 피소메이트가 마주칠 때마다 "오이-스"라고 인사하길래 무슨 의미인지 궁금하더라고요. 가장 먼저 챗지피티에 물어봤는데 답변이 이상했어요. 네이버 카페에 혹시 이런 인사법을 아는 분이 있나 해서 질문을 올려봤는데요. 결국 그 인사의 정체는 "Holis"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오이-스"가 아닌 "올리스"였습니다. 스페인어 인사말인 "Hola"를 좀 더 귀엽게 바꾼 표현이라고 하더라고요. 한국어로 치면 "안뇽" 정도의 느낌이랄까요. 그 과정을 거치고 나서 문득 ‘피소메이트한테 직접 물어봤으면 됐는데 왜 그렇게 못했지?’ 하는 현타가 오더라고요. 다음부터는 이렇게 돌아가지 말고, 그냥 직접 물어보자는 약속을 저 스스로와 했습니다.

 

저번 주 레터에서, 일을 하지도 않으면서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만으로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요. 이번 주에는 원래라면 꼼짝없이 일만 하며 지내야 했지만, 뜻밖의 이유로 다시 주말까지 자유 시간이 생겼습니다. 마치 리모트 워크 체험판을 플레이해본 느낌이었는데요. 덕분에 생각보다 더 엄격하게 시간을 지켜서 일하는 습관이 필요하겠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자유 시간이 생기니까 괜히 더 알차게 보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정작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 상태가 되기도 했고요. 여러 가지를 고민하다가, 결국 그냥 해야할 일을 해두는 게 미래의 나를 가장 기쁘게 해줄 선택이겠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이번 주는 이것저것 다양한 메뉴를 시도해본 한 주이기도 했어요. 밥도 지어봤는데,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하지만 다음엔 이번보다 물을 더 넣으면 나아질 것 같더라고요. 어차피 제 입으로 들어가는 거고, 나아지는 중에 있는 거니 실패라고 할 것도 아닌 것입니다.

 

오늘은 어학원에서 SNS 영상 촬영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여러 국적의 학생들이 “Hola”라고 인사하고 자기 나라 언어로 한 마디씩 이어 붙이는 영상이었어요. "Hola" 뒤에 "Desde Corea"라고 하라고 해서 "Hola, desde Corea."라고 하면 되냐고 하니까 그게 아니고 어떻게 하라고 했는데 잘 못 알아들었습니다. 뭔가 한국말로 하라는 뉘앙스 같아서 “Hola, 안녕하세요”라고 영상을 찍었는데요. 그런데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영상을 보니, 제가 해야 했던 말은 “Hola, 한국에서 왔습니다”였더라고요. 못 알아들었는데 알아들은 척하는 평소의 습관이 SNS에 그대로 박제되어 버렸습니다. 솔직히 엄청 창피했는데요. 나중에 스페인어를 잘하게 되면 이것도 다 재밌는 추억이 되지 않을까 정신승리를 하기로 했습니다. 스페인어가 늘어야만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생겼습니다.

 

발렌시아 가는 8시간짜리 버스를 타기 직전에 배탈이 났는데요. 그냥 버스 타는 걸 포기해야 할지 생각했을 정도였어요. 다행히 아직까지는 괜찮은 것 같아요. 제가 무사히 발렌시아에 도착할 수 있도록 응원 부탁드려요. 그럼 저는 다시 찾아온 기회를 어떻게 하면 현명하게 잡을 수 있을지 고민하며 한 주를 보내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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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사커피

    0
    5 months 전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고 싶으신가요?’라는 질문에 모두가 2010년대로 돌아가 비트코인을 사겠다고 답하는 세상에서, 나도 그런 벼락부자가 되면 좋겠지만, 그랬다간 그 이후 지금까지 만난 모든 사람들과의 인연이 사라질 테니, 과연 그게 행복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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