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 온 지도 어느덧 일주일이 됐습니다. 지금 이 레터는 스페인 북부에 있는 바스크 지방의 소도시, 산세바스티안의 한 에어비앤비에서 쓰고 있습니다. 밤에 쓰는 편지로 이름 지었지만 아직 밖은 환해요. 오늘 이 도시의 일몰 시각은 21시 48분입니다. 괜히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스페인의 별명을 떠올리게 됩니다.
짐작하시겠지만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간 있었던 미주알고주알 늘어놓기에는 구독자 님이 바쁘실 거예요. 대신 일기를 인스타그램에 적고 있습니다. 문득 어제 제가 뭐했는지 궁금해지신다면 여기에 들러서 읽어주세요.
스페인 워킹홀리데이를 가야겠다고 생각한 2년 동안 나름 열심히 스페인 소식을 쫓아다녔다고 생각했는데요. 예상하지 못했던 것들이 좀 있었습니다. 28인치 캐리어와 백팩, 사이드워크 서핑 보드를 힘들게 끌고 마드리드의 첫 숙소인 호스텔 방문을 열었을 때, 저는 놀라고 말았습니다. 방 안에서 신발을 신고 생활하는지 그때 알았거든요. 방 안에서 신발을 신는 것 자체는 놀랄 일이 아닙니다. 그 사실을 그때 알았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저의 터무니 없는 준비성에 놀란 것이죠. 그때야 주마등처럼 블로그 글에서 슬리퍼를 꼭 가지고 가라고 했던 게 스쳐 지나가더라고요. 제가 묵은 호스텔이 수건도 샴푸도 바디워시조차도 무료로 제공해 주지 않는다는 것도 가서 알았습니다. 사실 이 호스텔 숙박비도 그날 정확히 알게 됐는데요. 6인 도미토리가 1박에 8만 원 가까이한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라야 했습니다. 저렴한 물은 맛이 더럽게 없다는 것도 물을 사 마시기 전에는 몰랐고요. 막연히 영어가 통할 거라고 생각하고 왔는데 이렇게 영어 발음이 다르게 들릴지도 몰랐습니다. 환기를 시키려고 창문을 열었는데 방충망이 없더라고요. 어떻게 벌레들의 침입을 막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스페인은 덥다 못해 뜨거운 나라라 그래서 긴 팔을 몇 벌 챙겨오지 않았는데요. 지금 산세바스티안에서 잘 때마다 후리스를 입고 자고 있어요. 또, 제 이름으로 정한 'Noche'라는 단어를 이제까지 잘못 발음하고 있었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호스트가 '루체?'라고 되묻는 걸 보고서야 알게 됐어요.
혼자 여행을 온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누군가와 같이 여행을 갈 때는 여행 갈 때쯤 되면 누군가가 계획이 뭐냐고 묻잖아요. 그러다 보면 최소한 전날에는 다음 날 계획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저 혼자이다 보니 누가 얼른 여행 계획을 짜라고 독촉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마드리드 여행 첫날, 당일 아침까지도 아무 계획이 없는 걸 넘어서 마드리드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 사태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저는 2층 침대에 묵고 있었는데 우연히 아래층 침대를 쓰는 분이 한국인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오늘 어디 가시냐고 묻자, 톨레도 투어를 가신다고 했습니다. 방에 묵는 사람들이 모두 나가고 나서야 나도 뭔가 하러 가야 할 것 같다, 8만 원짜리 6인 도미토리에 묵으면서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다는 위기감이 들었습니다. 결국 저도 톨레도에 가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그날 3만 보를 걸었습니다.
지난 일주일을 그 첫날처럼 보냈습니다. 아무런 계획 없이 시작했지만 어쩌다 보니 아래층 침대의 J님과 마드리드 왕궁을 다녀오고, 어쩌다 보니 J님과 산세바스티안도 함께 여행하고, 어쩌다 보니 산세바스티안에서 공부하는 S님과 블로그 댓글로 연락이 닿아 함께 핀초바 투어를 하고, 어쩌다 보니 TIE cita를 잡고, 어쩌다 보니 산세바스티안에서 3개월 동안 살 집을 구했습니다. 사실 그 '어쩌다 보니' 안에는 막막함에 식은땀을 흘렸던 여러 순간들과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키오스크로 렌페 티켓을 살 때 Doc type을 뭐라 써야 할지 모르겠어서 한참 헤맸을 때. 호스텔 캐비넷을 본인 자물쇠로 잠가야 하는데 안 들어가는 거 억지로 넣으려다가 자물쇠 부쉈을 때. 렌페를 타는 잠깐 28인치 캐리어를 번쩍 들어 무사히 기차 안에 안착시켜야 했을 때. 핀초를 어떻게 주문하는지 모르겠어서 주문서를 몇 번이고 다시 읽어 봤을 때. 그 주문서가 바스크어로 되어 있어서 하나도 읽을 수 없을 때. 숙소 호스트가 영어로 말해주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를 못했을 때. 숙소 화장실 바닥에 개미들이 우글우글해 있는 걸 마주했을 때. 대성당에서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을 때. 마트에서 뭘 사야 할지 모르겠을 때. 혼자 집을 보러 가야 했을 때. 집주인이 영어를 못해서 스페인어를 알아들어야 했을 때. 지금은 벌써 희미해진 그 어쩔 줄 모르겠는 감각들을 하나씩 해결해 가면서 별거 아닌 일의 범위를 넓혀가는 중입니다. 앞길이 막막할 때 내가 걸어온 발자국들을 보며 다시 한 발을 내디딜 용기를 얻으면 좋겠다 싶어서 주절주절 적어봤습니다.
일주일 만에 도움도 많이 받았습니다. 마드리드에서 좋아하는 장소들을 공유해주신 C님, 산세바스티안 살이에 대한 여러 조언을 해주시고 씨따도 잡아주시고 집도 소개시켜주신 S님, 집을 구할 때 아낌없이 조언해 주신 T님, 산세바스티안 근교와 서핑 정보를 알려주신 S님, 워홀 선배로서 경험을 나눠주신 S와 K님. 일주일 전 첫 레터를 쓸 때만 하더라도 이렇게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거예요. 새로운 도전을 하면서 이리저리 헤매는 덕분에 이만큼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어서 기뻤습니다. 도와주신 분들 모두 타지 생활을 시작한 경험을 갖고 계신 분들이라서, 밥을 잘 챙겨 먹으라는 인삿말이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이라는 게 느껴져서 더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기술의 발전으로 번역기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 인류에 감사합니다.
저는 늘 한국 사람들이 없는 여행지로 가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한국 사람들만 보면 왜 이렇게 반가운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계신 두 분이 한국인처럼 보여서 인사를 할까 말까 한참 고민하다가 내향 이슈로 하지 못했습니다. 혼자 한 달 스페인 여행을 오셔서 함께 마드리드와 산세바스티안을 여행했던 J님도, 산세바스티안에서 혼자 공부하시는 S님도, 산티아고 순례길 북쪽길을 걷는 두 분도. 쉽지 않은 결정을 내렸다는 걸 알기 때문에 더 반가웠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어쩌다 보니 집 뷰잉을 시작한 지 하루 만에 집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다들 최대한 많이, 찬찬히 보고 결정하라고 조언해 주셨는데 그러지를 못했어요. 저는 선택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 길어지는 게 참 힘들더라고요. 차라리 선택지가 몇 개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하지만 진짜 그걸 원했다면 여기 오면 안 됐겠죠. 여기 오는 걸 선택한 이상 앞으로 제 앞에 놓인 갈림길이 수만 갈래는 될 것 같아요. 저는 대체로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의 기조를 갖고 살아왔는데요. 그러다 보니 이번에 집을 고를 때 비슷한 선택지 사이에서 결정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이 옵션, 저 옵션 사이에서 한참을 갈팡질팡했는데요. 그러다 결국 내가 어떻게 살 것인지 정해야 선택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도시에서 휴양보다는 생활을 경험할 수 있는 선택을 하기로 했습니다.
갑자기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느낌이 드시나요? 발행 시간이 다가오는 관계로 서둘러 마무리하는 중입니다. 사실 이런저런 고난이 -ing 입니다만-개미 떼가 다시 출몰했어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고난편 레터를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산세바스티안에 처음 도착한 날, 배가 고파 밤에 핀초바에 갔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엄청 모여있는 걸 보고 이 도시는 참 젊은 도시 같다, 나같은 내향인에게는 힘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요. 사실 그날이 핀초포테가 있는 목요일이었습니다. 매주 목요일마다 핀초와 주류를 저렴하게 파는 이벤트가 열린다고 해요. 이번 주 목요일, 저는 젊은 사람들로 가득한 인파를 뚫고 핀초포테를 가는 데에 성공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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