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 온 지도 벌써 2주가 지났습니다. 지금 이 레터는 산세바스티안의 한 삐소piso에서 쓰고 있습니다. 구독자 님이 스페인어를 배우고 '내가 스페인어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는지 확인해 볼까' 하는 기대를 안고 산세바스티안에 오신다면 약간의 좌절감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간판이 바스크어로 되어 있어서 읽기 힘드실 테니 말입니다. 산세바스티안은 스페인의 바스크 자치주에 속한 도시로, 바스크어와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쓰고 있습니다. '산세바스티안'은 이 도시의 스페인어 이름이고, 바스크어로는 '도노스티아'라고 합니다. 바스크 사람들은 본인을 스페인 사람이 아닌 바스크 사람이라고 말하고,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는 독립운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바스크 문화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앞으로 이 도시를 '도노스티아'라는 이름으로 부르겠습니다.
공교롭게도 레터만 쓰려고 하면 뭔가 일이 터지는 것 같습니다. 온 우주가 제시간에 레터를 발행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아니겠죠. 아까는 집에 전기가 나갔었습니다. 전기포트를 사용하려고 했는데, 어떤 콘센트에 꽂아도 작동이 안 되는 겁니다. 집주인에게 물어보니 누전차단기 레버를 올리면 된다더라고요. 정말 전기가 다시 들어왔습니다. 그건 한국이랑 똑같더라고요. '냉장고 문이 열려 있던데, 그것 때문이었나' 생각하면서 다시 전기포트 플러그를 콘센트에 꽂았더니 ‘퍽’ 소리와 함께 전기가 나갔습니다. 범인은 저였던 것입니다. 특정 콘센트에 플러그를 꽂으면 전기가 나가는 모양입니다. 빨리 알아서 다행입니다.
사실 그동안 매일 사소한 사건 사고를 겪고 이를 수습하며 일주일을 보냈습니다. 저번 레터에서 개미 떼를 언급만 하고 황급히 마무리한 것 같은데요. 결국 그 에어비앤비 숙소는 이른 체크아웃을 했습니다. 이틀 동안 개미와의 동침을 감수하기에는 그 숙소는 정말 비쌌습니다. 산세바스티안이 유럽에서 유명한 휴양지이긴 한데 제 체감상 스페인 관광지 숙소 값이 다 이 모양인 것 같습니다. 하룻밤에 10만 원 넘는 돈을 쓰고 개미가 방도 모자라서 귓구멍까지 침입하는 건 아닐까 불안해서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낼 순 없었습니다. 레터를 발행하고 난 뒤, 많은 한국 직장인은 일하고 있었을 8시간 동안, 저는 '당일에 숙소를 어떻게 구할 것인가'하는 것으로 머리를 굴리느라 잠을 못 잤습니다. 기적처럼 산세바스티안 근교 도시에 사는 한국분께서 오늘 묵으러 와도 좋다고 해주신 덕분에 무사히 개미 하우스를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저희는 '스페인짱'이라는 네이버 카페에서 알게 된 사이로 한 번도 직접 본 적은 없는 사이였습니다. 그리고 사실 잘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도 당일 아침에 그 집에 묵어도 되겠냐고 물으면 난감하기 마련입니다. 그 집이 신혼부부 집이라면 더더욱. 방금 '어떻게 그런 몰염치한 짓을 했지?'라고 생각하셨을 수도 있겠는데요. 이전에 숙소 구하기 전에 묵을 곳이 필요하다면 연락 달라고 하시긴 하셨어요. 그래도 나 같아도 거절하겠다 싶었기 때문에 당연히 거절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보통 위험 부담을 안 지는 쪽을 선택하니까요. 흔쾌히 오라고 하셨을 때는 감사한 한편, '어떻게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집에 묵게 해줄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여쭤보니 처음 스페인에 정착할 때 카페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하시더라고요. 나중에 누군가 도움을 요청하면 본인도 꼭 도움을 줘야겠다고 생각하셨대요. 아내분도 처음 보는 절 위해 양념치킨을 직접 만들어주실 정도로 환대해 주셨습니다. 아내분 마인드가 'Mi casa es tu casa', 즉 '나의 집이 너의 집이다'라고 하시더니 어쩌다 보니 근교에 있는 아내분 친정집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여행자로선 경험하기 힘든, 바스크 사람들의 일상을 가까이에서 보고 따뜻한 환대를 받는 경험을 할 수 있어서 저에게 정말 잊지 못할 시간이 됐습니다.
한편으로는 관광지에 산다는 것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도노스티아가 관광지로 발전하면서 정책들이 관광객 중심으로 바뀌었고, 에어비앤비 숙박비가 비싸지면서 집값도 함께 치솟았다고 해요. 현지인으로서는 관광객에 대한 반감이 생길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개월 뒤에는 바르셀로나로 가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거기도 관광 때문에 살기에는 좋지 않을 거라는 조언을 들었습니다.
관광이 주요 산업인 도시에서는 모든 서비스가 상품이 됩니다. 그동안 당연하게 생각했던 서비스들이 사실은 이만큼이나 값을 매겨서 팔 수 있는 옵션이었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의 호의를 일단 의심부터 하게 됩니다. 사실 나에게 비용을 청구하려는 건 아닌가 하고요. 처음에 묵었던 에어비앤비의 호스트는 친절했습니다. 호스트의 가족이 살고 있는 집에 아들이 쓰던 방 한 칸을 빌린 거라 호스트 가족과 좀 더 교류할 수도 있겠다는 기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관계가 비즈니스 그 이상은 될 수 없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실 그 불신 때문에 지레 철벽을 쳐서 좋은 이웃을 얻을 기회를 잃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먼저 다가간다면 이 도시에 3개월 머물 예정인 나도 관광객이 아닌 이웃이 될 수 있을까요?
관광지에 살기 때문에 언제나 이 도시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지만 하루하루가 여행처럼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여행이라는 것은 결국 어디론가 떠나는 것이고 떠날 수 있으려면 발 딛고 설 일상이 필요하다는 걸 느낍니다. 무엇이 관광이고 무엇이 일상이냐 하면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날씨가 맑으면 밖을 꼭 나가야만 할 것 같고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날은 괜히 죄책감이 들기도 합니다. 관광지에서 일상을 만드는 것, 그것이 제게 주어진 과제가 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제 나도 여기 사는 사람이구나' 하고 느낀 순간도 있었습니다. 지금 이 숙소에 입주하던 날, 이 방을 소개해 준 동네 친구와 입주 축하 기념 저녁을 먹었습니다. 이곳에선 '챠콜리'라는 바스크 스타일의 화이트와인을 많이 마십니다. 도수는 낮지만 벌컥벌컥 마시기 좋습니다. 오징어튀김인 '깔라마리'와 감자튀김인 '빠따따 브라바스'는 최고의 맥주 안주입니다. 그럼 자연스럽게 생맥주인 '까냐'와 와인을 섞어 마실 수밖에 없습니다. 동네 친구랑 마시는 거니 집에서 2차를 하기로 합니다. 그렇게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만취했습니다. 보통 여행할 때는 다음 날 일정이 있으니 과음을 잘 안 하는데, 숙취에 시달리고 있으니 '이제 좀 이곳이 익숙해졌나'하는 이상한 감상에 젖었습니다.
거기서 끝났다면 좋았겠지만, 그날 트래블로그 카드를 잃어버렸습니다. 이틀 뒤에야 알았지만, 결제 내역은 없는 걸 보니 누가 주워간 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카드 분실 신고를 하고 유럽 계좌의 카드를 구글 페이에 등록해 급한 불을 껐습니다. 다행히 웬만한 곳에서는 구글 페이가 가능한 것 같습니다. 참고로 트래블로그 카드는 별도 비용 없이 해외 배송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오싹한 시나리오 중 하나가 카드를 잃어버리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해결할 수 있는 걸 알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이번 주에 "도노스티아, 정말 사랑한다"고 외칠 뻔한 순간도 있었습니다. 도노스티아에 오신다면 날이 맑은 날, 미라마르 정원에 가보세요. 정말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촉박해서 그냥 찍고만 가야 한다고 하면 안 가셔도 됩니다. 유럽 건축과 공원의 화려함에 비하면 사실 소박합니다. 미라마르를 아름답게 만드는 건 여기서 몇 시간이나 빈둥댈 수 있는 여유이지 않나 싶습니다.
반면, "도노스티아, 정말..."하고 뒷말을 삼키게끔 만드는 순간도 있었는데요. 가성비 인간인 제가 어쩌다 물가 비싼 도노스티아로 오게 됐나 지난날을 돌아보게 됩니다. 아무래도 준비성이 부족한 덕분인 것 같습니다. 저를 데리고 핀초바 투어를 시켜준 친구는 직접 맛집을 찾는 기쁨을 빼앗는 것 같다고 했었습니다만, 제 생각엔 맛집을 찾아서 느끼는 기쁨보다 거덜 나는 통장 잔액을 보며 느끼는 슬픔이 더 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래도 비싼 물가 덕분에 레토르트 인간인 제가 요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요리할 때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뚝딱이는 게 맞는 건가', '유튜브에서는 분명 5분 요리라 그랬는데 왜 나는 15분이 걸릴까', '어떤 기술을 익혀야 요리 latency를 줄일 수 있을까' 등 온갖 생각이 들지만, 하다 보면 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번 주에는 관찰을 많이 했습니다. 전철 개찰구를 통과하려다가도 다른 사람들은 어떤 교통카드를 찍는지 확인하려고 잠깐 멈춰서고, 버스에서 내릴 때 카드를 찍는지 확인하기 위해 사람들이 버스에서 내리는 걸 관찰하는 식으로요. 아무래도 말로 물어볼 자신이 없어서 더 그런 것 같습니다. 누군가 내가 하는 행동을 빤히 보고 있다면 내향인의 생존 방식이겠거니 해야겠습니다. 다음 주에는 좀 더 용기를 내서 말로 물어보는 것을 더 시도해 봐야겠습니다.
이번 주는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레터에 뭐라도 적으려면 밖을 나가야 할 텐데’ 싶어 1시간 정도 산티아고 순례길 북쪽길 루트를 걸어봤습니다. 하지만 라 콘차 해변이 시작하는 곳부터 걷기 시작했더니 그냥 해변을 걷는 사람이 됐습니다. 사람이 하도 많다 보니 순례길을 걷는 느낌이 들진 않았습니다. 다만 30분 정도 해안 길을 걸으며 느낀 건 '해안 길은 정말 땡볕을 걷게 하는구나', 'No pain No happy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해안 길 끝에 까미노를 상징하는 노란 화살표가 그려진 표지판이 보였습니다. 어쩐지 외로웠는데 그 표지판을 보니 누군가 알아봐 주는 것 같아 반가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나름 화살표 찾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집에 오는 길까지 1시간 반 정도 걸었는데 발이 정말 아팠습니다. 다들 어떻게 걷는 건지 존경심이 들었습니다.
걸으면서 든 질문은 '이렇게 까미노 루트를 따라 1시간씩 걷는 걸로 까미노가 될까?' 하는 거였습니다. 까미노를 까미노로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너무 힘들지만, 오늘 계획한 만큼의 길을 걷기 위해 발을 내딛는 감각이 까미노를 만드는 걸까요? 그럼 나를 관광객이 아닌 이곳에 사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일지도 궁금해집니다.
이렇게 별거 안 해도 2주가 지났다는 게 한편으로는 무섭게 느껴집니다. 워홀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영원히 미룰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시작하고 난 뒤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반드시 1년이 지나는 시점이 오고야 마는 것입니다. 1년 뒤, 나는 무엇이 달라져 있을까요? 스페인에 더 머물고 싶어질까요, 아니면 하루라도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질까요? 그때쯤엔 스페인 번호로 오는 전화도 받을 수 있을까요?
이번 레터는 신뢰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그런 것 치고는 레터 약속 시간에 대한 신뢰를 저버렸지만요. 아무 계획도, 연고도 없이 언어도 안 통하는 이 도시를 뭘 믿고 왔을까. 생각해 보면 결국은 사람을 믿고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어떤 연결 지점이 없어도 여기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서로를 도울 수 있을 거라는 참 희한한 믿음이요. 이 믿음이 짙어질 때도, 옅어질 때도 있겠지만 1년간 사라지지 않고 유지되길 바라며, 구독자 님도 제가 약속 시간을 지키리라는 믿음을 잃지 않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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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커피
지구에서 존재하는 위치만 바뀌었는데 가만히 그 공간에 존재한다는 자체가 어렵고, 재밌고, 무섭고, 설레는 하루를 보내고 있으시네요! 더 많은 얘기 기대하겠습니다 :)
Buenas Noches
맞아요. 사실 저라는 사람은 그 사이에 변한 게 없을 텐데 위치만 바뀌었는데 모든 것이 도전처럼 느껴지는 게 참 신기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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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체
오전에 레터가 오지 않아 이번 주는 넘어가는건가 하고 슬퍼하던 참이었어요. 퇴근 후 메일함에 레터가 와 있는걸 보고 정독하기 위해 자세를 고쳐 앉았답니당. 새 집을 계약한 것도, 새 카드를 발급받은 것도, 5분 간단 요리를 15분만에 완성한 것도 별일 아닌 듯 싶지만 하루하루 무사히 넘기고 있는 것 같아서 뭔가 가슴이 뭉클합니다.(?)ㅠ.ㅠ 제가 표현을 잘 못하는데 아무튼 수요일이 기다려집니다. 다음 주에는 슬프지 않게 출근 전에 레터가 와 있길 희망합니다. 돌아오는 주도 화이팅해요!
Buenas Noches
에공 또 슬픔을 드리고 말았는데 이것저것 바쁜 주였다는 변명을 해봅니다. 다음주엔 꼭 출근 시간에 보실 수 있도록 맞춰볼게요! 저도 놀러가고 하는 것보다 원래라면 아무 것도 아니었을 일을 해냈을 때가 더 기록하고 싶더라고요. 이때만 느낄 수 있는 감정 같아서요. 부지런히 기록해보도록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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