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낙관과 비관이 함께하는 첫 번째 밤

마드리드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그리고 스페인에 당도해서 5월의 근황과 향후 1년간의 향방에 대해 적었습니다.

2025.06.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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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enas Noches

스페인 시각으로 밤마다 스페인에서 워킹홀리데이하는 이야기를 적습니다.

첫 레터를 마드리드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쓰고 있습니다. 사실 스페인 가기 전에 소회나 다짐이나 뭐 그런 걸 담은 레터를 먼저 쓰고 싶었는데요. 한 달 동안 백수로 지내도 글을 쓰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고백하자면 스페인에서의 삶에 대한 별 계획이 없습니다. 스페인에서 처음으로 머물기로 정한 도시인 산세바스티안에서 임시로 지낼 숙소를 예약한 것도 2주가 채 안 됐습니다. 아직 숙소도 예약 못 했는데 '글은 무슨 글이냐'며 글쓰기를 미뤄왔습니다. 비행기라는, 모바일 데이터도 안 터지고 14시간 동안 탈출할 수 없는 방이 주는 불편한 자유 덕분에 비로소 글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Buenas Noches'는 스페인어로 '좋은 밤이에요'라는 뜻의 저녁 인사입니다. 이 문장을 레터 이름으로 정한 가장 큰 이유는 제 스페인 이름을 'Noche'로 정했기 때문입니다. 'Noche'는 '밤'이라는 뜻인데, 이 단어를 이름으로 정한 이유를 설명하자면 좀 구구절절해집니다. 제 이름은 한자로 '별을 바란다'는 뜻을 갖고 있어요. 별이 빛나기 위해선 그만큼 어두운 밤이 필요하잖아요. 제게도 그랬습니다. 글을 자주 쓰던 때에는 늘 밤에 글을 썼어요. 과제 제출 마감이 자정이어도 꼭 글은 밤 10시부터나 써지기 시작했어요. 2시간 안에 마무리되면 다행이었지만 교수님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제출하면 봐주시겠지, 하는 마음으로 새벽 6시쯤에야 제출했던 적이 많았습니다. 요즘엔 글을 쓰지 않다 보니 밤을 새우는 일도 거의 없었고요. 그러다 가끔 뭔가를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곤 했습니다.

저한테는 가끔 언어로는 설명하지 못하겠지만 '나'라는 퍼즐을 완성하기 위해, 필요한 조각일 것만 같은 감정이 쌓일 때가 있는데요. 주로 글을 쓰면서 그 감정이 어떤 감정이었는지 골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글을 쓰지 않다 보니 언어화되지 못하고 휘발되는 감정들이 많아졌고요. 그런 감정 조각들을 좀 잃어도 존재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지만요. 빛나기 위해서는 밤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도 비행기 안이 밤처럼 어두운 덕분에 글을 쓸 수 있었네요. 역시나 예상대로 구구절절해졌는데요. 

 

레터 이름에 맞춰 이 레터는 스페인 시각으로 매주 새벽 1시에 보내려고 합니다. 스페인은 한국보다 7시간 느리니까, 한국엔 아침 8시에 도착할 거예요. 사실 자정에 보내려고 했는데 서머타임이 적용돼서 시차가 8시간에서 7시간으로 줄었더라고요. 발행하려는 순간에 알았어요. 스페인에 서머타임이 적용될 때까지는 저에게 1시간의 보너스 시간을 주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밤의 감성으로 쓴 글을 삶에 대한 회의감을 충전하는 출근길에 보시려면 조금 어리둥절하실 수도 있겠지만요. 매주 불현듯 일상과 멀리 떨어진 스페인과의 시차를 느껴보시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첫 레터를 수요일에 보냈으니 매주 수요일에 보내겠다고 선언해 보겠습니다.

 

아직 스페인에서의 삶이 제대로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에 5월에 어떻게 지냈는지 근황을 적어봅니다.

고향인 광주에서 보낸 5월에는 하고 싶은 것이 정말 많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흔들리는 지반 위에서도 균형을 잡고 설 수 있는 기술을 익히고 싶었어요. 하지만 기대가 큰 만큼 배신도 컸던 한 달이었습니다. 일을 안 하니 여유 시간도 2배는 될 거라는 기대도, 주 5일은 수영을 나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광주 한 달 살기 기록을 남길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운전을 통달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스페인어 공부를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그동안 못 읽었던 책을 읽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집 근처 광장에 나가 보드 연습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그럴듯한 스페인 워홀 계획을 세울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모두 배신당했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살면 혼자 살 때만큼의 개인 시간을 가질 수 없다는 것과 정해진 일과가 없으면 쉽게 의지가 해이해진다는 걸 간과한 결과였습니다.

그나마 한 것이 있다면, 시간이 날 때마다 운전 연습을 하긴 했습니다. 조금 숙연해지게도 마지막 운전 연습 때 사고를 냈지만요.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큰 사고는 아니었지만, 어이없는 실수로 난 사고라 의기소침해졌습니다. 너무 심란해서 그나마 보험 처리하는 법을 배운 걸 위안 삼으며 정신 승리해야 했습니다.

저의 몇 안 되는 스페인에서의 계획 중에 서핑하는 것이 있는데요. 스페인어로 가르치는 것을 이해할 자신이 없어서 일단 한국에서 서핑 수업을 듣고 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보드에서 일어나겠다는 목표를 달성했는데요. 하지만 씁쓸한 건 서핑이 그다지 재밌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를 진득하게 하는 것보다 새로운 걸 배우는 걸 좋아하고 직업도 몇 번 바꿨다 보니 초보로 지낸 시간이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초보가 존중받기가 참 힘들다고 느꼈는데요. 이번에 잘하지 못하는 것들을 배우면서 울컥 모멸감이 치솟는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회사에 다니는 3년 동안은 안정적인 생활 기반을 만들어 나가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동안 많은 것이 익숙해져 그런 감정을 느낀 게 굉장히 오랜만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덜컥 겁이 났습니다. 스페인에 가면 언어도 잘 못하고 모든 것에 있어서 초보일 텐데 그 모멸감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싶어서요. 방법은 울면서 계속 하기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어서 설렘과 기대보다 불안이 더 큰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집에 한 달이나 있었는데 서울에서 보낸 짐을 정리하지 못했습니다. 부모님 댁에 택배 상자들과 온갖 잡동사니를 1년간 방치해놓는 불효를 저지르게 됐는데요. 뭘 처분하는 게 너무 어렵더라고요. 몇 년이고 들여다보지 않을 거면서도 막상 필요할 땐 곧바로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고, 늘 내 곁에 있으면서도 일상을 방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모순적인 바람이 있습니다. 이사를 준비할 때나 10년 전에 받은 쪽지를 발견하고 잠시 마음이 훈훈해질 뿐. 사실 영원히 그 쪽지를 발견하지 못했어도 상관없었을 것입니다. 그 잠깐 마음을 훈훈하게 데우기 위해 서울에 집도 없으면서 몇 년이고 잡동사니를 버리지 않고 모으고 있던 것입니다.

그런 저에게 재앙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실수로 카카오톡 채팅 기록을 날려 먹어서 5월 이전의 대화가 모두 사라졌습니다. 저는 채팅방 모두가 나가서 '대화상대 없음'이 뜨더라도 채팅방을 나가지 않을 정도로 모든 데이터를 보존하는 편이라 이번 사태에 대한 상심이 컸습니다. 카카오톡을 믿고 그간 다시 읽고 싶은 수많은 정보를 제 카톡방으로 보내뒀건만.

그 와중에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 영감을 받아 이름 지어진 서점인 '소년의 서'에 들렀습니다. 서점에 5월 18일이 있는 2025년 5월부터 시작하는 1년짜리 오월 달력이 걸려 있었습니다. 문득 제 올해도 5월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5월이 끝나갈 때쯤 5월 안에 하고 싶었지만 계속 미뤄뒀던 일들을 벼락치기로 해치우면서 뭐든 마음만 먹으면 해낼 수 있다는 희망을 조금 회복했습니다. 부랴부랴 레터를 쓰는 것도 그런 희망 회복 운동의 일환입니다. 레터에 좀 더 그럴싸한 말을 쓰기 위해 좀 더 고군분투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고요.

요새 유독 대학 입학을 위해 처음 상경했던 때의 장면이 자주 떠올랐습니다. 서울에 연고도 없고 뭘 잘 몰라서 지하철역에서 기숙사까지 멀지 않은데도 택시를 탔고 택시는 먼 길을 빙빙 돌아갔던 그 순간이요. 인생에서 가장 많은 것을 바꾼 시점을 꼽으라면 그때입니다. 어쩌면 한 번 더 삶의 국면이 전환될 거라는 예감이 든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면서 느껴야 하는 모멸감을 느낄 일도 없었겠지만요. 오히려 그런 감정들을 해소해 나가는 과정을 처음부터 기록할 기회라는 생각이 듭니다.

 

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대통령 당선 소식을 찾아봤습니다. 공교롭게도 오늘은 나라의 국면이 전환되는 번째 밤이기도 했는데요. 어떤 점에서는 낙관적인 마음이, 어떤 점에서는 비관적인 마음도 듭니다. 스페인에 도착한 감상도 비슷했는데요. 도시의 언어가 스페인어로 되어 있는 풍경이 주는 기분 좋은 낯섦과 유럽은 아름답다는 감상이 주는 낙관. 관광으로 유명한 나라답게 무료로 그냥 주는 것이 별로 없고 영어를 생각보다 알아듣겠다는 비관이요. 제가 앞으로 스페인에서 보낼 1년만큼이나 한국의 1년이 어떨지 궁금해지는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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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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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돌체의 프로필 이미지

    돌체

    0
    about 1 month 전

    매주 수요일 아침이 기대될 것 같아. 몸 조심히 잘 다녀와!

    ㄴ 답글 (1)
  • 옐의 프로필 이미지

    0
    about 1 month 전

    앞으로 어떤 생활을 겪고 레터로 주실지 기대가 돼요. 다치지 않고 나로 가득 채울 수 있는 워홀이 되길 바라요. 때때로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겠지만 노체님이라면 잘 지내실 거 같아요!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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