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C 단계에도 수익모델을 찾지 못한 스타트업의 선택지는?
지난 주 인도네시아에서 중소영세상인들을 위한 장부앱과 쇼핑앱을 운영하던 스타트업 Lummo가 사업을 중단하고 보유 현금 900억 원($70Mn)을 모두 투자자들에게 돌려준 후 폐업에 들어간다는 소식이 알려졌습니다. 2022년 1월 완료된 시리즈C 당시만 해도 단숨에 천억 원($80Mn)의 자금을 모으며 기업가치 7천억 원을 인정받았지만 결국 유의미한 사업 모델을 찾지 못했다고 판단, 사업을 중단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시리즈C 당시 타이거글로벌의 리드로 세콰이어캐피탈, DST글로벌, 헤도소피아, 제프 베조스의 개인 투자사 베조스 익스페디션, 구글의 CapitalG로부터 투자를 유치하며 동남아 스타트업 업계에서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던 Lummo였기에 폐업 소식은 더욱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팬데믹 기간 넘치는 유동성에 힘입어 명확한 사업모델 없이도 수천억 원씩 펀딩을 받았던 전 세계 스타트업들이 폐업(Shut-down)과 사업 전환(Pivot) 사이에서 고심하고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창업자와 투자자 간의 긴장관계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애초에 목표했던 'Product-Market Fit (PMF)'을 찾는데 실패했으니 빨리 회사를 정리하고 각자 갈 길을 가자는 목소리가 커지는 반면 창업자들은 시장 환경이 조금 어려워지니 투자자들이 금새 태도가 돌변했다고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얼마나 심각하길래
인도네시아 전역에 분포된 와룽(Warung)이라고 불리는 350만 개의 5인 미만 영세상점은 전국 식료품 매출의 70%를 담당할 정도로 인니 국민들의 일상 생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와룽의 디지털화는 지난 몇 년간 스타트업들이 앞다투어 진출했던 인기 분야였습니다.
2019년 나란히 등장한 Lummo와 BukuWarung은 무료 장부앱을 배포해 와룽들을 사용자로 유입시킨 후 결제와 소액대출까지 진출하여 B2B 핀테크 기업으로 발돋움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바탕으로 대규모 투자 유치에 성공한 인도네시아 대표 핀테크 스타트업입니다.
- Lummo - 시리즈C 기업가치 $550Mn (세콰이어, DST, 타이거글로벌 등)
- BukuWarung - 시리즈A 기업가치 $220Mn (굿워터, Valar Ventures 등)
문제는 한 달 매출이 20 - 30만 원에 불과한 와룽을 대상으로 돈을 번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하루하루 장사하기 바쁜 사용자 입장에서는 장부앱을 꾸준히 이용할 인센티브가 없으니 프로모션 시에만 가공데이터를 입력하고 이탈하는 체리피킹이 반복됩니다. 앱에 기록된 데이터에 대한 신뢰도가 낮으니 이를 대출심사에 활용하는 것도 불가능하게 됩니다.
최근 공개된 공시 자료에 따르면 Lummo의 FY22(3월 결산) 매출은 약 30억 원, 경쟁사인 BukuWarung의 FY21 매출액은 5백만 원에 불과하였습니다. 수백억 원에 달하는 투자금이 무색한 재무 성과를 보인 것입니다.
Lummo는 2021년 장부앱의 수익화 가능성이 낮다는 것을 깨닫고 시리즈C 당시 와룽의 물품 공급을 중개하는 B2B커머스로 사업을 전환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무려 천억 원에 달하는 시리즈C 자금을 투자받은 것이 2022년 1월이었습니다. '무한대'의 런웨이를 확보했으니 사업은 순항하고 있다고 호언장담했던 스타트업이 1년만에 백기를 들고 사업포기를 선언한 것입니다.
'폐업'할 것인가 '피벗'할 것인가
아직 수익 모델은 찾지 못하였지만 보유 현금은 남아있는 스타트업들이 1) 애초의 가설이 틀렸음을 인정하고 조금이라도 자금이 남았을 때 사업을 중단하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2) 계속 피벗을 하며 새로운 사업 모델을 찾는 것이 맞는지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폐업 👍) 스타트업은 PMF를 찾기 위한 임시 조직일 뿐
실리콘밸리를 포함한 해외의 경우, Lummo의 사례처럼 스타트업이 남은 투자금을 돌려주고 폐업을 선택하는 사례가 꽤 있습니다. '스타트업'을 바라보는 관점이 한국과는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린스타트업, 비즈니스모델 캔버스, 디자인씽킹 등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활용되고있는 스타트업 방법론을 체계화한 스티브 블랭크 교수는 일찍이 스타트업을 '반복적이고 확장 가능한 비즈니스 모델을 찾아내기 위해 만들어진 임시조직'이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블랭크 교수의 스타트업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PMF를 찾지 못한 스타트업이 폐업을 결정하는 것은 전혀 비난받을 일이 아닙니다. 애초에 스타트업은 창업자의 역량과 시간, 벤처캐피탈의 자본과 경험을 투입해 특정 가설을 검증하고자 한 프로젝트성 '임시조직'이었기 때문에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고 개인이 '실패'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실리콘밸리에서는 처음부터 스타트업을 창업자의 '개인 사업'이 아닌, 특정 목적을 가진 '임시 조직'이라고 보는 시각이 존재하기 때문에, 창업자의 이탈도, 스타트업의 M&A도 훨씬 자유로운 편입니다.
블랭크 교수는 스타트업의 '피벗' 또한 A 사업이 안된다고 B, C, D 사업을 시도하는 것이 아닌, 애초에 설계한 비즈니스 모델의 가설을 바꿔보는 좁은 의미로만 한정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는 실리콘밸리 투자자들이 새로운 사업을 시도하고 싶은 창업자에게 기존 스타트업을 '폐업'한 후 '재창업'을 하라고 권유하는 것과도 일맥상통합니다.
(피벗 👍) 초기 스타트업은 결국 창업자에 대한 투자, 한 번 투자했다면 끝까지 밀어줘야
물론 그동안 자신의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스타트업에 쏟은 창업자와 여러 포트폴리오 기업을 관리하는 벤처캐피탈이 동일 선상에서 의사결정을 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평판을 포함, 스타트업에 모든 것을 걸었던 창업자가 사업에 더 애착을 가지고 계속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스타트업이 전혀 다른 사업으로 피벗하여 성공한 사례는 너무나도 많습니다. 결국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란 '아이디어'에 대한 투자가 아닌, '창업자'에 대한 베팅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창업'이란 것을 단순히 과학실험처럼만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은 무수한 스타트업 성공 스토리를 통해서도 쉽게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2009년 설립된 슬랙(Slack)은 Glitch란 MMORPG 게임을 출시하여 시리즈B까지 유치했던 스타트업이었습니다. 2012년 게임사업을 중단하고 폐업을 고민하던 중 내부에서 사용하던 커뮤니케이션 툴에 주목, 전혀 다른 엔터프라이즈 SaaS로 사업을 전환하여 대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만약 슬랙의 초기투자자였던 Accel과 a16z가 게임사업 중단 후 폐업을 종용했다면 슬랙의 성공 과실을 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후 마크안데르센은 한 인터뷰에서 슬랙의 창업자 스튜어트 버터필드의 피벗을 지원했던 이유로 '어차피 실패한 투자라고 생각해서 그냥 버터필드가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 내버려뒀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모두의 의구심과 냉소를 뿌리치고 성공을 만드는 것은 결국 창업자이지 투자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최종 선택은 창업자의 몫, 그렇다면 투자자의 역할은?
물론 폐업이냐 피벗이냐에서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의사일 것입니다. 스타트업이 'PMF를 발견하기 위한 임시 조직'이거나 '창업자 개인 사업의 연장선'이거나 결국 핵심은 창업자가 '계속할 의사가 있는지'이기 때문입니다.
실리콘밸리의 유명 그로쓰 전문가이자 엔젤투자자인 고쿨(Gokul Rajaram)은 만약 창업자가 투자자와 직원들에 대한 책임감과 의무감에 계속 피벗을 하고 있다면 투자자들이 용기를 내어 '이제 그만 해도 괜찮다'고 말해주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만약 창업자의 시도가 자칫 '피벗'을 위한 '피벗'이 되어버리면 침몰하는 타이타닉에서 책상 위치를 바꾸는 행위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에어비앤비의 창업자 브라이언 체스키는 위기상황일수록 경영자는 '경영 의사결정'이 아닌 '원칙에 바탕한 의사결정'을 해야한다고 조언합니다. 한치 앞을 알기 어려운 시장 상황에서 자원이 한정된 스타트업이 모든 실험을 다 해본 후 데이터를 가지고 의사결정을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스타트업의 피벗 여부도 결국 성공에 대한 가능성이 아닌, 애초의 열정과 비전이 유지되고 있는지, 계속 피벗을 하는 것이 모두의 시간을 가장 의미있게 쓰는 것인지를 가지고 의사결정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Lummo의 창업자들은 아마도 또다시 피벗을 감행하는 것보다 900억 원에 달하는 남은 투자금을 돌려주는 것이 모두를 위한 최선의 의사결정이라고 판단하였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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