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으로 시작한 검로드는 어떻게 1인 기업으로 거듭나게 되었을까?
검로드(Gumroad)는 디지털 창작물의 판매를 중개하는 '마켓플레이스 + SaaS' 서비스입니다. 노션 템플릿 또는 전자책을 판매하는 크리에이터들이 주로 사용하는 사이트로 유명하며, 유사한 크리에이터 플랫폼인 파트레온(Patreon)이나 엣시(Etsy) 대비 디지털 창작물에 특화되어있다는 장점 및 초보 사용자에게 최적화된 노코드 툴을 제공한다는 점이 주목을 받으며 해외에서는 꽤 알려진 서비스입니다.
검로드는 창업자인 사힐 라빈지아(Sahil Lavingia)의 턴어라운드 스토리로도 유명합니다. 2019년 2월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블로그 글 Reflecting on My Failure to Build a Billion-Dollar Company가 유명세를 타며 일약 스타가 된 사힐은 현재 검로드를 운영하면서 자신의 펀드를 만들어 엔젤 투자도 하고, 최근에는 자신의 경험담을 담은 책 The Minimalist Entrepreneur도 출간한 특색있는 창업가입니다.
오늘 뉴스레터에서는 사힐의 블로그 글 및 그 이후의 여정을 통해 어떻게 검로드라는 대규모 벤처 자금을 투자받은 스타트업이 추가 자금 조달에 실패한 후 1인 기업으로 전환하며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그리고 사힐이 제시하는 스타트업 슬림다운(Slim-down) 전략이 어떤 스타트업에게 유효한 전략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이드 프로젝트에서 스타트업으로
2012년 설립된 검로드의 시작은 전형적인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의 창업스토리를 따라갑니다. 핀터레스트의 두 번째 직원으로 합류하여 엔지니어로 근무하던 사힐은 '크리에이터들이 자신의 컨텐츠를 구매자들에게 직접 판매할 수 있는 플랫폼'이란 아이디어를 테스트하는 베타 사이트를 만들어 Hacker News를 통해 론칭하였는데, 출시 첫 날 무려 52,000명이 가입을 하며 기대 이상의 성과를 기록합니다.
사이드 프로젝트로 시작한 검로드가 인기를 끌자 사힐은 핀터레스트를 그만두고 검로드에 올인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시작과 동시에 Accel Partners, First Round Capital, 맥스 레프친, 크리스 사카, 론 콘웨이 등 유명 벤처캐피탈과 엔젤투자자로부터 $1.1Mn의 시드 자금을 유치합니다. 실리콘밸리가 가장 선호하는 창업스토리에 부합하는 모든 요건을 갖추었기에 투자자들이 앞다투어 줄을 섰던 것입니다.
- 19살의 나이
- 대학 중퇴
- 고성장 스타트업의 초기 직원
- 스톡옵션 베스팅 전 퇴사를 결정할 정도로 창업자가 열정을 가진 아이디어
- MVP(Minimum Viable Product) 검증 👉 사이드 프로젝트 👉 풀타임 전환
이후 5개월만에 Kleiner Perkins 주도의 $7Mn 규모 시리즈A까지 유치하며 승승장구하던 검로드는 2015년 시리즈B를 시도하지만 당시 미니혹한기로 불렸던 실리콘밸리 투자 환경과 벤처캐피탈이 기대하는 지표 달성에 실패하며 펀드레이징에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시리즈B 실패, 직원 75% 구조조정
아래 표는 사힐이 공개한 당시의 매출 지표입니다. 2014년 11월 피크를 찍은 매출은 이후 정체기를 겪게 됩니다. 당시 막 시리즈B 라운드를 시작하려던 검로드는 비상이 걸립니다.
주목할 점은 사힐의 빠른 판단력입니다. 2015년 1월 당시 지표가 꺾이며 위기 신호를 감지했을 당시 검로드는 18개월 수준의 런웨이가 남아있던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검로드와 같은 '마켓플레이스 + SaaS' 사업모델에서 실리콘밸리 탑티어 벤처캐피탈이 기대하는 지표는 매 월 20% 이상의 성장입니다. 게다가 외부자금에 의존한 사업 구조를 생각해보면, 지표가 한 번 꺾였다는 건 이미 스타트업에겐 회복하기 어려운 위기가 찾아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검로드는 이후 6개월 동안 'Small Product Lab'이란 비상 조직을 만들어 셀러 교육, 결제 수단 다변화, SEO, 글로벌 고객 확보 등 지표를 반전시키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입니다. 하지만 기존투자자를 비롯, 어떤 투자자로부터도 시리즈B 텀싯을 받는데 실패하며 2015년 10월 직원을 5명만 남기고 내보내는 구조조정을 단행하게 됩니다.
"We decided to become profitable at any cost"
사힐은 당시 1) 문을 닫고 남은 투자금을 돌려주는 셧다운 2) 애퀴-하이어 형태의 M&A 3) 몸집을 줄여 어떻게든 살아남는 슬림다운(Slim-Down) 사이에서 고민하였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스타트업은 이런 경우 1번 또는 2번 옵션을 선택합니다. 때로는 새집을 짓기 위해서 폐허더미에서 공사를 시작하기 보다는 새터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기 때문입니다.
사힐이 검로드를 어떻게든 유지시키기로 한 것은 순전히 플랫폼을 사용하는 크리에이터들에 대한 책임감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검로드는 당시에도 매 월 30억 원 이상의 거래액을 기록하던 크리에이터들을 위한 판매 플랫폼이었습니다. 검로드가 문을 닫으면 누군가는 수입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었던 것이죠. 그렇게 사힐은 검로드 서비스만은 유지한다는 생각으로 대부분의 인력을 구조조정하고 필수 서비스만 남기는 길을 선택합니다.
2015년 구조조정 직전 검로드의 재무제표는 전형적인 스타트업의 사업구조를 보여줍니다. 월 순매출은 1억 원 내외였지만 월간 운영비는 4억에 가까웠죠. 이후 대부분의 직원들을 내보내고 제품개발에만 집중한 검로드는 1년 만에 월간 지표 흑자를 이뤄냅니다.
흑자를 이룬 방법은 간단합니다. 가능한 모든 운영 비용을 삭감하는 것입니다. 회사는 월 3천만 원에 가까웠던 오피스 임차료를 줄이고 비자발적인 리모트 회사로 전환합니다. 사힐은 방에 틀어박혀 혼자서 매일 코딩과 디버깅을 하고, 고객 요청 사항을 처리하며 시간을 보냅니다. 구조조정 이전 월 4억 원에 달한 운영비는 1년 뒤 월 4천만 원 수준으로 낮아집니다. 사실 월 4천만 원이면 실리콘밸리에서는 4인 인건비도 안되는 수준입니다.
사힐은 당시의 우울감이 가장 큰 스트레스였다고 이야기합니다. 여전히 스타트업 미디어에는 누가 얼마의 펀딩을 받았다는 이야기, 누가 잭팟을 터뜨렸다는 이야기가 즐비한데 자신은 실패했다는 상실감에 더해 책임감 때문에 투자자들이 더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업을 혼자서 '하드캐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타트업에서 '1인 기업'으로
그러던 중 2017년 11월, 기존 투자자 중 지분율이 가장 높았던 Kleiner Perkins로부터 연락이 옵니다. 자신들의 지분을 정리하고자하니 액면가인 주당 $1에 지분을 재매입할 생각이 있느냐는 내용입니다.
- 실리콘밸리에서 벤처캐피탈 투자를 받은 스타트업의 창업자들이 사업 실패 시 폐업 후 재창업을 선택하는 숨은 이유 중 하나는 바로 투자자들의 '청산우선권(Liquidation Preference)'이 있습니다.
- 벤처캐피탈의 투자를 받은 경우 회사를 매각하더라도 투자 원금까지는 투자자가 먼저 배분받는 '청산우선권'이 있다보니 스타트업이 검로드처럼 폐업하지않고 살아남는 길을 택하면 창업자가 영혼을 갈아넣어 턴어라운드에 성공하더라도 회사 매각 시 투자자가 선순위로 투자금을 회수하게 됩니다.
- 따라서 생존가능성이 희박한 스타트업은 빨리 폐업하는 것이 창업자와 투자자 모두에게 최적의 선택지인 경우가 많습니다.
당시 검로드의 경우 시리즈A를 리드했었던 Kleiner Perkins의 담당자는 이미 회사를 떠났고 투자지분가치는 전액 감액된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투자사는 투자 계약 상 이사회선임권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포트폴리오 모니터링을 위해 계속 인력과 비용을 투입하기 보다는 지분을 헐값에 매각해 세금혜택을 보는 쪽을 선택한 것입니다.
반면 사힐에게 이 소식은 한 줄기 빛으로 다가옵니다. 투자자들의 지분을 액면가에 매입하게 된다면 더이상 투자금 회수에 대한 압박없이 자신의 지분율을 높여 회사를 진정한 '1인 기업'의 형태로 이끌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검로드는 벤처투자를 받은 '스타트업'에서 자체 자금으로 성장하는 '1인 중소기업'으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모든 기업이 스타트업의 방정식을 따를 필요는 없어
이후의 이야기는 보기 드문 턴어라운드 스토리입니다. 검로드는 꾸준히 성장하며 디지털 컨텐츠 전용 크리에이터 플랫폼으로 자리잡게되며, 코로나 이후 급격한 성장을 경험합니다. 특히 창업자인 사힐은 2019년 2월 블로그 글 이후 'Build-in-Public' 방식을 통해 회사의 실적과 성과를 꾸준히 트위터에 공개하였기 때문에 관련 자료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한 스타트업 성장을 위한 제3의 길을 개척하기로 결심한 사힐은 2021년 3월 리퍼블릭을 통해 전개한 크라우드펀딩을 활용하여 총 $5Mn의 투자금을 'SAFE $100Mn Cap & 20% 할인' 형태로 조달하는데 성공합니다.
당시 7,331명의 개인투자자로부터 자금을 모집한 검로드는 매 분기 유튜브를 통해 '공개이사회'를 개최하며 회사의 실적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있습니다. 특히 올해 3월 수수료 인상 이후 이익률이 급등하자 모든 크라우드펀딩 투자자에게 배당금 지급을 선언하는 등 검로드는 그 누구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기업 '성장'의 길을 개척해나가고 있습니다.
구조조정 직후였던 2016년 6월 검로드의 순매출액은 $176K였습니다. 2023년 2월 순매출액이 $1.78Mn을 기록하였으니 회사는 약 8년 만에 10배 성장한 것입니다.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빠르다고도 할 수 있고 느리다고도 할 수 있는 지표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창업가와 스타트업 직원들, 그리고 벤처캐피탈리스트들은 '자금'과 '역량'을 쏟아부어 시장성장을 뛰어넘는 스타트업의 성장곡선을 만들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힐이 이야기한대로 아무리 뛰어난 제품을 만들고 빠르게 기능을 업그레이드하여도 회사의 성장 대부분은 시장의 성장이 결정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바꿔 말하면 스타트업이 유례없는 초고속 성장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특정' 시점에 '특정' 산업이라는 요건이 갖추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1990년 대 마이크로소프트, 2000년 대 구글, 2010년 대 페이스북, 2020년 대 OpenAI처럼 말이죠.
중요한 것은 조단위 기업을 만드는 것 만이 기업의 성공기준이 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사힐은 당연히 '유니콘'을 목표로 사업을 시작하였지만 10년 간의 성공과 실패를 경험하며 지금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검로드를 통해 관계를 맺게 된 전 세계의 크리에이터들을 위해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제 30살이 된 사힐에게는 여전히 오늘이 'Day 1'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