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아카이브 49. 헬렌 미렌의 시간들 (배우특집 ep.7)

헬렌 미렌 (Helen Mirren)의 시간들

헬렌 미렌은 연극부터 시작해 영화, 시리즈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곳에서 활동해 온 관록의 연기파 배우입니다. 여전히 계층 간의 구분이 존재하는 영국 내에서도 실력으로 존재감을 증명하며 여성 기사 작위에 해당하는 ‘데임(Dame)’ 작위를 수여받은 워킹 클래스 출신의 배우인데요. 지금까지 데임 작위를 받은 배우는 주디 덴치(007 시리즈의 MI6 국장!),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이전에 소개한 <레터스 투 줄리엣>에 출연한 배우입니다!), 메기 스미스 (해리 포터 시리즈의 맥고나걸 교수!) 등이 있습니다. 지금은 연기파 배우로 알려져 있지만 데뷔 당시에는 섹스 심벌 이미지가 강한 배우였다고 하는데요. 연기 내공만으로 작품을 통해 연기력을 증명하며 아카데미를 비롯해 골든 글로브와 에미상까지 거머쥐었습니다.

헬렌 미렌은 1967년 ‘내셔널 유스 시어터(Natioanl Youth Theatre)’에서 배우로 첫발을 내디뎠는데요. 해당 극장은 영국을 대표하는 국립극장으로서 영국 연극의 명맥을 유지하며 계승하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연극 무대에서 탄탄하게 연기력을 쌓아 <에이지 오브 컨센트(Age of Consent)>를 통해 영화배우로 데뷔하며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렸고, 이후 <롱 굿 프라이데이(암흑가의 금요일)>에 출연해 차세대 스타로, <칼의 고백>과 <조지 왕의 광기>로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두 번이나 수상하며 연기파 배우로서의 입지를 굳혔습니다.

헬렌 미렌의 이름을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리게 된 작품으로는 <더 퀸>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영화가 개봉했던 해에 기자들로부터 ‘헬렌 미렌의 해’라는 평을 받았을 만큼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주며 베니스 영화제, 아카데미, 골든 글로브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어요. 특히 헬렌 미렌은 미국의 HBO와 영국의 채널 4가 공동으로 제작한 2부작 <엘리자베스 1세>로 에미상에서도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는데요. 영국의 두 엘리자베스 여왕을 모두 연기하고 영미권의 연기상을 휩쓴 유일한 배우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헬렌 미렌에 입덕한 시기가 늦은 편으로 <레드: 더 레전드>에서의 연기를 보고 고혹적인 섹시함에 반해 팬이 되었는데요.🤭 그녀의 필모그래피를 돌려 보면서 세월의 흐름에 관계없이 때로는 고혹적인 아름다움을, 때로는 섹시함을, 때로는 근엄함을, 때로는 인간미를 보여주는 그녀의 연기 내공에 감탄하게 되더라고요. 언론에서 표현한 말을 빌리면 “젊음에 사로잡힌 세상에서 장년에 접어든 여성들의 희망(인디펜던트)이고, 데임 작위를 받은 배우들 가운데 예순이 넘어서도 섹슈얼한 전율을 뿜어낼 수 있는 사람(더 타임스)이다”라는 표현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게 됩니다. 이번 헬렌 미렌 특집에서 추천할 작품은 그녀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더 퀸>과 개인적으로 그녀의 필모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인 <우먼 인 골드>입니다.🤗

더 퀸 (The Queen), 스티븐 프리어즈, 2006년 개봉

<더 퀸>은 1997년 다이애나 전 왕세자비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후 그녀의 장례 절차를 두고 영국 왕실과 의회 사이에 있었던 일주일 간의 갈등을 그린 작품입니다. 영국 왕실과 엘리자베스 2세를 향한 언론의 비난과 민심 그리고 왕실의 대응을 그린 영화는 작품성과 함께 주연을 맡은 헬렌 미렌의 연기력으로 입소문을 타며 흥행에 성공했습니다. (개봉 당시 미국에서 단 3개의 상영관에서 개관해 이후 500% 이상의 스크린 수를 넘겼다고 해요.😲)

감독과 각본가는 다이애나 전 왕세자비 사망 후 여왕이 버킹엄 궁에서 추도사를 발표하기 전까지의 일주일을 그려냈는데요. 당시 다이애나를 좋아했던 많은 이들이 왕실과 여왕이 그녀를 죽음으로 내몬 것과 다름없다고 비난을 쏟아낼 때, 궁 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에 집중하며 여왕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냈습니다. 이는 단순한 상상력이 아닌 광범위한 취재를 바탕으로 만든 것이라고 하는데요. 총리나 왕실과 가까운 익명의 정보원들을 만나며 당시 여왕의 반응은 어떠했는지, 당시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의 대처는 어떠했는지 등을 바탕으로 했다고 해요.

엘리자베스 2세를 연기한 헬렌 미렌 역시 여왕을 아는 사람들을 만나 사소한 습관이나 여왕과 관련된 일화들을 모아 연구했다고 하는데요.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가장 도움이 되었던 것은 마릴린 크로포트가 쓴 엘리자베스 2세의 전기 『리틀 프린세스』와 여왕이 12살 때 차에서 내리며 인사하던 짧은 순간이 담긴 영상이었다고 하는데요. 이는 헬렌 미렌 본인이 젊음을 잃지 않고 노년의 여왕을 연기하기 위해 소녀 시절의 엘리자베스 2세를 끊임없이 들여다보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당시 그녀의 연기력이 영화의 흥행과 평단의 호평을 끌어낸 만큼 실제로 여왕도 영화를 보고 헬렌 미렌의 연기를 마음에 들어 하며 저녁 만찬에 따로 초대하기도 했다고 해요.😆

1997년 8월 영국 왕실에서 배출한 가장 유명한 여인인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왕실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던 다이애나 비의 사망 소식은 영국 국민을 슬픔에 빠지게 하는데요.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버킹엄 궁전으로 향하는 추모 행렬이 끊이지 않지만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가족 휴가를 위해 머물던 발모럴 성에서 조의에 대한 어떤 표현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에 국민들의 불만이 커져가고, 언론도 여왕의 태도를 비난하기 시작하자 군주제 위기론까지 거론되며 여왕의 심기가 불편해지는데요. 한편 새로 부임한 토니 블레어 총리는 멀어지기만 하는 왕실과 국민들 사이에 다리를 놓기 위해 여왕을 설득하기 시작합니다.

영화는 왕실을 대표하는 여왕과 의회를 대표하는 총리 사이의 관계를 흥미롭게 그렸는데요. 블레어의 총리 임명 장면과 엔딩 시퀀스에서 보이는 미묘한 분위기 변화는 두 사람의 감정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여왕은 총리의 추모 메시지 요청에도 ‘다이애나가 더 이상 왕실이 일원이 아니며 슬픔도 품위 있게 대응해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합니다. 왕실의 계속된 묵묵부답에 의회의 의견을 넘어 왕실과 국민 사이에 간극이 생길 위기에 처하자 총리는 이를 중재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여왕이 지닌 왕관의 무게와 그 뒤에 가려진 고뇌를 이해하게 되는데요. 이는 왕실에 반대하는 입장인 노동당 당수로서 총리가 된 입장에서 상당한 변화라고 할 수 있고,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을 것 같은 여왕 역시 총리의 충고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임으로서 왕실과 의회가 다이애나의 죽음을 두고 줄다리기를 한 일주일의 시간이 대립이라기보다 서로의 위치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으로 느껴지기도 했어요.

<더 퀸>에서도 엘리자베스 2세의 생애를 다룬 넷플릭스 시리즈 <더 크라운>을 보고도 느꼈지만, 엘리자베스 2세는 평생 군주로서의 책임감을 막중하게 느낀 인물이라 생각했는데요. 다이애나의 사망 후 추도사를 발표하기 전까지 보인 모습은 냉정함 보다 언제나 군주의 도리가 먼저였던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렇기에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도 인간 엘리자베스와 군주 엘리자베스 사이에서 혼자 감내해야 하는 고독을 섬세하게 표현한 부분들이었어요. 무엇보다 여왕의 품위와 위엄 뒤에 소박함을 간직한 여왕의 모습은 헬렌 미렌의 연기를 통해 현실감을 얻어 더욱 생생하게 와닿습니다.

우먼 인 골드 (Woman in Gold), 사이먼 커티스, 2015년 개봉

<우먼 인 골드>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아델레 블로흐-바우어 부인의 초상’의 주인공 아델레의 조카 마리아 알트만이 초상화를 되찾기 위해 오스트리아 정부를 상대로 한 8년의 걸친 법정 싸움을 그린 실화 바탕의 작품입니다. 마리아 알트만에 대한 이야기는 BBC 다큐멘터리를 통해 먼저 소개되었는데요. 감독이 이를 보고 이야기에 매료되어 영화를 구상하게 되었다고 해요. 영화를 제작할 당시 마리아 알트만은 사망한 후였기 때문에 마리아의 변호를 맡은 랜디 쇤베르크의 증언을 토대로 영화를 완성했다고 합니다. 영화는 과거의 재연보다는 ‘2차 세계 대전과 홀로코스트에 얽힌 개인의 고통과 이를 치유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춰 인물의 감정 변화를 섬세하게 그렸습니다.

마리아 알트만이 되찾으려는 작품은 구스타프 클림트가 그린 ‘아델레 블로흐-바우어 부인의 초상’으로 오스트리아의 모나리자로 불리며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입니다. 그림 속 주인공인 아델레는 사업가 페르디난트 블로흐의 아내로 그녀의 초상화는 남편이 클림트에게 부인의 초상화를 부탁하면서 탄생했는데요. 자녀가 없었던 부부는 그림을 조카들에게 남긴다는 유언을 남기면서 작품의 소유주가 조카들 가운데 한 사람인 마리아 알트만에게 넘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가 나치에 합병당하면서 당시 집안의 예술품이 몰수당했고, 마리아는 고국을 떠나 미국으로 탈출하는 과정에서 초상화는 오스트리아의 소유가 되었는데요. 이후 마리아가 유언이 담긴 편지를 발견하면서 초상화를 되찾기 위해 소송을 진행하며 그녀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예술품이나 문화재 환수는 국가 간의 이해관계와 과거가 복잡하게 얽힌 민감한 문제인 만큼 이전까지는 이와 관련한 소송에서 승소한 사례가 드물었다고 하는데요. 특히 오스트리아 국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작품인 만큼 마리아의 소송은 시작부터 쉽지 않았으며 해당 사건은 이후 비슷한 사례의 판결에 긍정적인 선례를 남기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당시 마리아의 변호를 맡았던 랜디 쇤베르크 역시 오스트리아에서 망명한 유대인 출신 작곡가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손자로 이후 예술품 반환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유명 화가 클림트는 자신의 후원자였던 아델레를 모델로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을 그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녀가 죽고 난 뒤 남편 페르디난트는 나치에 의해 오스트리아 정부에 그림을 몰수당하고, 이 그림을 조카들에게 남긴다는 유언 만을 남긴 채 생을 마감합니다. 세월이 흐른 1998년, 이미 노년에 접어든 아델레의 조카 마리아 알트만은 유언이 담긴 편지를 발견하게 되고 가족들의 추억이 담긴 그림을 되찾기 위해 무려 8년간 오스트리아 정부를 상대로 외롭고 긴 싸움을 시작합니다.

마리아가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소송을 재기했을 때 초상화는 오스트리아 국보에 해당하는 위상을 지니고 있었기에 문화재 반환으로 파생될 다른 문제를 이유로 반환 소송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거부됩니다. 유대인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던 마리아는 현재의 자국인 미국 법원에 이를 문의하여 얻은 판결을 토대로 국제사법재판소를 통해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권한을 얻으면서 8년간의 긴 싸움이 시작되는데요. 마리아가 초상화를 돌려받고자 한 이유는 그림이 지닌 금전적 가치가 아닌 가족과 고국에 대한 추억을 되찾고 싶은 마음과 과오를 저지른 이들의 인정과 사과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빈에서 열린 환수 위원회에서 마리아의 연설은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데요. 마리아에게 고국은 생존을 위해 가족과 이별하고 떠나야만 했던 그리움의 대상이자 마냥 그리워만 할 수 있는 곳이 아닌 행복했던 추억과 아픔이 공존하는 공간입니다. 영화는 마리아의 소송 과정을 따라가며 마리아의 모습과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의 태도를 극명하게 보여줌으로써 역사 속 과오가 현재에도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Epilogue

 🎞함께보면 좋은 추천 콘텐츠: <굿 라이어(Good Liar)>, 빌 콘돈, 2019년 개봉

<굿 라이어>는 부유한 미망인에게 사기꾼이 접근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니콜라스 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입니다. 영화는 미망인 베티와 사기꾼 로이의 과거와 현재를 교차해서 보여주며 두 사람이 가진 비밀이 조금씩 드러나게 되는 과정을 담았습니다. 거짓과 거짓이 첨예하게 맞서는 과정에서 숨겨진 진실이 드러나게 된다는 흥미로운 소재를 관록의 두 배우 헬렌 미렌과 이언 매켈런의 연기력으로 한층 더 풍부하게 만들었는데요. 헬렌 미렌과 이언 매켈런(반지의 제왕의 간달프!)의 첫 만남으로 화제를 모았던 작품으로 함께 보기 좋은 콘텐츠로 추천드립니다!

🔖 Reference (씨네아카이브 참고자료 출처 표기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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