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모비딕(백경), 허먼 멜빌

운명에 대항하는 자, 유죄인가? / 독후감

2020.12.20 | 조회 2.11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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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느의 고전 읽기

변치 않는 가치를 지닌 고전 문학 이야기

이번 레터는 허먼 멜빌의 역작이자 미국의 가장 훌륭한 비극 소설 중 하나라고 여겨지는 모비딕에 대한 독후감이에요.

사납기로 유명한 거대한 향유고래 모비딕에게 한쪽 다리를 잃은 노년의 에이해브 선장은 모비딕에 대한 복수를 목표로 다시 바다로 떠납니다. 처음부터 승산이 없을 것 같은 이 복수극은 에이해브 자신뿐 아니라 함께 하는 항해사와 선원들을 모두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 무모한 일이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예정된 종말을 향해 나아가고, 그의 분노에 찬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결국 벗어날 수 없던 비극적인 결말은 한동안 먹먹한 여운을 남겼습니다.

그는 무엇에 그토록 저항하고 싶었을까요? 신? 운명? 허망한 삶?

‘그의 분노는 정당했던 걸까?’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고 싶다가도 옳고 그른 것보다는 예정된 그의 죽음 자체가 그 자신에게는 어떤 의미였을지를 생각해 보는 게 더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본격적인 감상문을 적기 전에, 인상 깊었던 구절들을 먼저 남겨볼게요. 기억하고 싶은 문장을 모두 표시하는 게 힘들다고 느껴질 정도로 마음을 울리는 표현들이 가득했어요. 생생하고 서정적이며 아름다운 서사들이 이어져서 아예 문단 하나 혹은 한 페이지를 통째로 표시한 곳도 많아 그중 힘들게 몇몇 문장을 골라봤습니다.  

 

훌륭한 빌대드 선장은 평범한 일관성이 부족했다. 그는 양심의 가책 때문에 무기를 들고 침략자들과 맞서기를 거부했지만, 그 자신은 대서양과 태평양을 무한정 침략했다. 인간을 살육하는 데에는 철저히 반대했지만, 일단 선장복을 입으면 거대한 고래의 피를 몇 통씩 흘려보냈다. 이제 관조적인 인생의 황혼을 맞아 경건한 빌대드가 추억 속에서 이런 것들을 어떻게 조화시키는지는 나도 모른다.

허먼 멜빌, 모비딕 (작가정신, p.116)

 

"고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내 보트에 절대로 태우지 않겠다"고 스타벅은 말했다. 이 말은 가장 믿을 수 있고 쓸모 있는 용기는 위험에 맞닥뜨렸을 때 그 위험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데에서 나온다는 뜻일 뿐만 아니라,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은 겁쟁이보다 훨씬 위험한 동료라는 뜻이기도 했다.

허먼 멜빌, 모비딕 (작가정신, P.160)

 

그에게 용기는 감정이 아니라 다만 자기한테 유용한 것이었고, 실제로 꼭 필요한 경우에 언제든 쓸 수 있도록 늘 가까이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이 포경업에서 용기란 쇠고기나 빵처럼 반드시 배에 갖추어야 하고 어리석게 낭비하면 안 되는 주요 품목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했다.

허먼 멜빌, 모비딕 (작가정신, P.160~161)

 

인간의 광기란 참으로 교활하고 음흉할 때가 많다. 겉보기에는 광기가 사라진 것 같지만 사실은 훨씬 포착하기 어려운 형태로 변형되어버린 것에 불과할 때도 있는 것이다.

허먼 멜빌, 모비딕 (작가정신, p.243)

 

에이해브는 다른 문제도 잊지 않았다. 강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을 때면 인간은 모든 천박한 생각을 경멸하지만, 그런 순간은 금세 덧없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신이 만든 제품인 인간의 본질적 상태는 바로 천박함이고, 그것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고 에이해브는 생각했다. (중략) 이 뱃놈들한테서 돈벌이의 희망을 빼앗지는 않겠다고 에이해브는 생각했다. 그렇다, 돈이다.

허먼 멜빌, 모비딕 (작가정신, p.274~275)

 

용기를 잃은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게 되면 비통한 마음에 피를 토하는 느낌이 든다. 그런 수치스러운 광경을 보면, 아무리 독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도 그런 것을 허락한 운명을 원망하지 않을 수 없다. 

허먼 멜빌, 모비딕 (작가정신,p.162)

 

독후감은 객관적으로 전체 줄거리를 요약한다거나 주제를 명시하지 않고 그저 제 감상을 남깁니다. 제가 특히 언급하고 싶은 특정 부분에 대해서만 기록하기 때문에, 작품의 전반적인 정보를 다 설명하지 않습니다.

 

  * 작가 '허먼 멜빌' 및 '모비딕'에 대한 스포일러 없는 간략 소개는 ↓

 

 


 

1. 분노는 나의 힘 – 에이해브

고래뼈로 만들어진 의족을 달고, 흔들리는 배 갑판 위에서 골똘히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듯 상념에 종종 잠기던 에이해브를 선원들은 처음에는 위엄 있고 신비로운, 어딘가 범접할 수 없는 선장의 모습으로 느낍니다. 사실은 출항하는 순간까지도 갑판에 나타나지 않고 선실에 머무르며 복수만을 생각하던 그는 이 항해를 결심할 때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죠. 대부분의 선원들은 초반에는 홀린 듯 모비딕을 잡으러 가자는데 열성적으로 동의하지만 긴 항해 동안 에이해브의 제정신이 아닌듯한 모습을 서서히 발견해갑니다.

처음에는 그의 분노를 그저 이 작품의 극적인 요소 정도로만 이해했어요. 그저 자신이 정복하지 못한 고래에 대한 패배감 때문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고, 구약성경에 포악한 군주로 나오는 ‘에이해브’와 같은 이름이라고 하니 그저 폭군일 뿐인가 하는 짐작도 해봤고요. 자신의 불행을 모두 그 모비딕과 연관 지어 생각하는 모습에서, 주변에서 힘들지 않게 볼 수 있는 불평과 분노를 동력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을 떠올리기도 했어요.

에이해브는 아담 이후 지금까지 모든 인류가 느낀 분노와 증오의 총량을 그 고래의 하얀 혹 위에 쌓아 올려, 마치 자기의 가슴이 대포라도 되는 것처럼 마음속에서 뜨거워진 포탄을 그곳에다 겨누고 폭발시켰던 것이다.

허먼 멜빌, 모비딕 (작가정신, p.242)

 

이야기 후반부 어느 날씨 좋은 날 에이해브가 1등 항해사 스타벅에게 속내를 털어놓을 때 그제서야 그의 마음을 다르게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 찬란하고 행복에 찬 공기, 그 상쾌한 하늘이 마침내 그를 어루만지고 쓰다듬었다. 오랫동안 그렇게 잔인했고 가까이 가기도 어려웠던 계모 같은 세상이 이제 자애로운 두 팔로 그의 고집 센 목을 끌어안고, 아무리 잘못을 저지르고 제멋대로 구는 자식일지라도 구원하고 축복할 수 있다는 듯이 그를 껴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다

허먼 멜빌, 모비딕 (작가정신, p.642)

40년 동안 계속 고래를 잡았어. 40년 동안의 고난과 위험과 폭풍우, 40년 동안 바다의 공포와 싸웠다네. 정말이야, 스타벅. 그 40년 가운데 육지에서 보낸 날은 3년도 안 돼. 내 인생을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황량한 고독이었어. (중략) 오오, 그 지루함, 그 무거움, 고독한 지휘관은 기니 해안의 노예와 다를 게 없어!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면, 지금까지는 그처럼 뼈저리게 깨닫지 못하고 그저 어렴풋이 느꼈을 뿐이었지. (중략) 늙은 에이해브는 얼마나 바보였던가! 고래를 추적하는 이 투쟁은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왜 지치고 마비된 팔로 노를 젓고 작살을 잡고 창을 던지는가? 지금 에이해브는 얼마나 더 부유해지고 더 좋아졌는가? 보라. 오오, 스타벅! 이렇게 피곤한 짐을 지고 있는 내게서 불쌍한 다리 하나를 빼앗아 가다니, 너무 심하지 않은가?

허먼 멜빌, 모비딕 (작가정신, p.643~644)

 

그의 분노는 한평생 거친 바다에서 고래잡이로 충실하게 살아온 자신에게 해를 끼친 모비딕에 대한 직접적인 증오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신에 대한 원망이었을 수도 있겠죠. 다리를 잃고 집으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발작적으로 울부짖던 그는 아마도 끊임없이 신이 있다면 자신에게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건지 수백 번 물어봤을 듯합니다. 결국 해답을 얻지 못했다 느끼지 않았을까요? 신이 있다면 신을 만나러 그의 목소리를 들으러 가는 방법은 다시 모비딕을 만나는 것이 유일하다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비딕을 잡아 죽인다면 그 또한 대답일 것이고, 복수에 실패한다 해도 이렇게 가만히 영문도 모른 채 당하고 있지 않겠다는 마음이었을 수도 있지요.

 

 

2. 신과 운명, 죽음의 의미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에이해브 선장의 복수극은 그저 무모한 객기처럼 느껴집니다. 방향을 측정하는 사분의를 내다 버리게 되고, 나침반은 고장 나며, 측정기와 측심줄 역시 엉망이죠. 급한 순간 생명을 구해줄 부표마저 떠내려가면서 선택의 여지가 없어 예전에 만들었던 관을 부표로 재활용하게 됩니다. 제대로 되는 것 하나 없이 불길한 징조만 가득해요.  

에이해브 선장의 분노, 모비딕과 가까워질 때 자꾸만 겪게 되는 불운의 징조들은 이야기의 화자인 ‘이슈메일’이 배를 타기 전 교회에서 들은 목사의 설교 내용을 상기시킵니다. 신에게 복종하지 않고 도망가려다 고래에게 잡아먹히고 회개한 요나의 이야기. 에이해브는 요나인 걸까요? 운명에 순응하지 않는 것도 죄가 될까요?

비극적인 결말을 예상하면서도 에이해브는 멈추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 이 모든 게 자신의 의지인지 아니면 이미 정해진 운명인지도 확신할 수 없지만 그저 이대로 계속하는 수밖에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죠. 살다 보면 그런 순간을 드물게 만나게 됩니다. 선택의 기로에 섰지만 사실상 선택이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 에이해브는 적어도 비겁하지는 않았는데, 그가 신을 믿었다면 그 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의 선택과 비극적인 결말이 너무 안타깝다가도 어쩌면 다리를 잃은 뒤 더 이상 평안하게 살아갈 수 없는 그의 마음 상태로는 그렇게 운명과 한판 승부를 결심할 수밖에는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어쩌면 패배처럼 보이는 죽음이 결과적으로는 그에게는 일종의 구원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신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믿음이란 것은 어디까지 나를 내어줘야 하는 건지요? 그리고 저처럼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삶의 태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살면서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에이해브처럼 저렇게 운명을 마주 보고 끝까지 저항하는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생을 누리는 것보다 오히려 더 의미 있을 수도 있겠죠.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판지로 만든 가면일 뿐이야. 하지만 어떤 경우든, 특히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정한 행위를 하는 경우에는, 그 엉터리 같은 가면 뒤에서 뭔가 이성으로는 알지 못하는, 그러나 합리적인 무엇이 얼굴을 내미는 법이야. 공격하려면 우선 그 가면을 뚫어야 해! 죄수가 감방 벽을 뚫지 못하면 어떻게 바깥세상으로 나올 수 있겠나? 내게는 그 흰 고래가 바로 내 코앞까지 닥쳐온 벽일세. 때로는 그 너머에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건가.

허먼 멜빌, 모비딕 (작가정신, p.217)

 

가장 큰 향유 고래는 길이 26미터에 이르기도 한다는 설명이 책에 있었어요. 
가장 큰 향유 고래는 길이 26미터에 이르기도 한다는 설명이 책에 있었어요. 

 

 

3. 글을 닫으며

약 680페이지 분량의 방대한 비극 소설 모비딕, 온갖 인물과 사건이 가득한 풍부하고 극적인 서사에 압도되어 정신없이 한번 완독한 뒤 어쩐지 놓친 게 많을 것 같다는 생각에 재독을 했습니다

두 번째 읽을 때는 책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 작품을 쓰게 된 작가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되었어요.  

고래를 의미하는 다양한 언어의 어원, 고래에 대한 온갖 문장들로 야심 차게 시작해 이어서 선원과 포경선, 그리고 고래의 생물학적 구조, 습성 등 강박적이라고 할 만큼 고래와 고래잡이에 대해 빠뜨린 것 하나 없이 적은 데다가 극적인 서사까지. 모든 요소를 치밀한 계획 아래 엮어 완성한 이 대작을 집필할 때 작가는 아마도 인생의 큰 숙제를 하나 한다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봅니다. 이렇게 영혼을 갈아 넣어 만든 작품이 정작 발표했던 당시에는 막상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고 하니 그때 심정은 또 어땠을까요.

에이해브, 그리고 이렇게 대작을 남기고도 생전에 자신의 성과를 한껏 누리지 못한 작가 생각에 먹먹한 여운이 오래가는 작품이었습니다.

 

전능한 바다의 거대한 파도가 끝없는 잔디밭에서 굴러가는 거대한 공처럼 여덟 개의 뱃전을 따라 굴러갈 때 내는 공허한 굉음, 보트를 두 동강으로 쪼개버릴 것처럼 날카로운 파도의 칼날 같은 물마루 위에 잠깐 올라선 순간 잠시 유예된 보트의 고통, 다음 순간 갑자기 파도 사이의 골짜기로 곤두박질치는 급강하, 맞은편 물마루로 올라가기 위한 격렬한 다그침과 부추김, 건너편 비탈을 썰매처럼 미끄러져 내려가는 보트, 보트장과 작살잡이들의 외침소리, 노잡이들이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헐떡이는 소리,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새끼들을 쫓아가는 성난 암탉처럼 상앗빛 ‘피쿼드’호가 돛을 활짝 펴고 네 척의 보트에 바싹 다가가는 놀라운 광경, 이 모든 것은 한 마디로 전율을 불러일으키는 광경이었다.

허먼 멜빌, 모비딕 (작가정신, p.288)

 

 

이 책을 이미 읽으신 분들 함께 감상 나눠요. 댓글 남겨주세요!

다음 뉴스레터는 12월 25일에 발행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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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한결같은 빛을 발하는 고전 문학을 통해 마음의 위안을 얻고 있어요. 

누구나 들어봤음직한 작가의 작품, 너무 유명해서  마치 읽은 것 같지만 사실 들춰본 적도 없는 책, 어릴 때 아동용 요약본만 읽었던 책들, 그런 고전들 위주로 읽고 소개합니다.  

 

한달에 두세편의 작품을 소개하며, 한 작품당 두편의 뉴스레터가 발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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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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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선주

    1
    almost 4 years 전

    분노로 이루어진 삶이, 정해진 운명에 끝없이 저항하는 삶이, 누군가에게는 더 ‘의미있는 삶’이라는 말이 와닿네요. 오늘도 좋은 글 감사해요.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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