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rnertable : 나는 푸에르토리코 사람이야

🎼  나희경 「Samba Em Preludio」, 2012 

구독자 님 안녕하세요!

11월 5주 차의 편지인지, 12월 1주 차의 편지인지 오락가락한 편지를 보냅니다.
마음은 이미 12월이 시작된 것을 넘어 한창인 것 같아서요.

가만히 앉아 책 읽는 시간은 거의 없었고,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채로 살다가 11월의 끝을 보내는 것 같아요.

레터 덕분에 지난 한 주를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 11월 다섯째 주의 일 : 가구 공부 

책방 문을 처음 열 때가 생각나요. 인터넷 쇼핑으로 손쉽게 해결한 것도 많았지만, 책장만큼은 실제도 보고 사고 싶었던 수년 전의 어느 날이요. 검색해보다 근방의 도시에 '가구 단지'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요. 아빠 차를 얻어타고 책장을 고르던 날이 선하게 떠오릅니다. 창고 같은 매장에 줄 지어 선 책장 사이사이를 걸었던 날. 당시에 샀던 책장은 아직도 제 뒤에 서서 무거운 책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부산에 새로 들인 몇 가지 가구도 온통 인터넷 주문으로 손쉽게 해결했는데요. 서울에서 쓸 큼직한 가구들은 아무래도 미리 살펴보고, 만져보고, 앉아보고, 또 누워보고 싶었어요. 당연히 부산에도 가구들이 모여있는 동네가 있었습니다. '좌천동'이라는 곳이더라고요. 근처 공영주차장이 가득 찬 걸 보니 주말에 가구를 보러 온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었어요.

침대와 소파를 주력 아이템으로 두고 여러 곳을 들락날락했습니다. 계산기를 하나씩 손에 든 분들이 바로 곁으로 와 이 상품이 어떤 가죽으로 만들어졌는지, 매트리스 안에 든 스프링의 개수가 몇 개인지, 타사의 제품과 어떤 차별점이 있는지 한참을 설명해주셨어요. 그래서 얼마인가요? 물으면 그들은 하나같이 가격을 절대 입 밖으로 내지 않고 계산기를 한참 두드리다가 몇 자리 숫자를 보여주곤 했습니다.

마치 다 함께 짠 듯한 그 방식이 무척 흥미롭고, 또한 피로해서. 짜장면을 먹고 들른 마지막 침대 매장에서는 완전히 지쳐버렸습니다.

🍷 11월 다섯째 주의 장소 : 발효포도 

구독자 님은 아지트라고 부를 만한 곳을 갖고 있으신가요? '가지다'라는 동사를 쓰고 보니, 아지트는 일종의 소유물인지도 모르겠어요. 그 공간에서 무언가를 소비하면서 월세의 일부를 지불하는 공용 공간. 그러니 내가 1/n 정도 소유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지도 모르고요. 아마 많은 사람이 저와 같이 아지트를 원하고, 실제로 누군가는 이미 갖고 있을텐데요. 그런 생각이 부산에 내려오던 제게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끝내 저는 부산에서 아지트라고 부를 만한 공간을 만들지 못한 것 같아요. (눈물) 그러다 지난 주말에 잠시 들렀던 와인 바가 무척 마음에 들어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와인 러버들의 아지트'라는 이름을 내건 발효포도는 저희 집과 무척 가깝더라고요. 조금 더 일찍 알았다면 참 자주 왔을 텐데.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적당히 작고 따뜻한 가게 안에서, 각각 음식과 와인을 담당한 두 분의 사장님과 드문드문 스몰토크를 할 수 있다는 게 참 좋았어요. 와인에 관한 설명을 해주시기도 하고, 준비 중인 크리스마스 디너에 대해 알려주시고, 개인적인 이야기도 나누면서 마치 새 친구를 사귀는 듯한 느낌을 받았거든요.

다시 서울에 올라가면, 진짜, 진짜로 아지트가 있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내가 사는 곳에서 슬리퍼를 끌고 걸어갈 만한 거리면 더 바랄 게 없겠다. 기분 좋게 취한 저와 와인 메이트는 집으로 걸어오는 길 내내 그 얘기만 반복했던 것 같아요. 언젠가 아지트를 '갖게' 되면 이 뉴스레터를 통해 구독자 님께 소식 전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얼마나 가까운 미래일지 궁금하네요.

📚 11월 다섯째 주의 책 : 캐시 박 홍 『마이너 필링스』 마티,  2019

구독자 님께선 책을 다 읽고 나면 어떤 일을 하시는지 궁금해요. 저는 제가 몰랐던 표현이나 개념을 검색해보고, 좋았던 구절을 노션에 타이핑해 옮겨놓는데요. 『마이너 필링스』는 제가 최근에 가장 많은 부분을 노션에 옮긴 책이에요. 좋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이제야 읽게된 책. 사람들하고 모여서 떠들고 싶은 책이었네요.

옮길 부분이 많다 보니 읽는 데 시간도 오래 걸렸고요. 밑줄도 하염없이 치고. 오랜만에 맹렬한 독서를 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인종주의, 소수적 감정, 언어, 미국문화, 여성 예술가의 삶, 자본주의, 유머의 역할... 대체 어떤 부분을 구독자 님과 공유하면 좋을지 잘 모르겠어요. 함께 읽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글로 전하려면 이 책을 몽땅 나누고 난 후 시작해야 할 것 같아서요.

인상깊었던 일부를 남겨봅니다. 이미 읽으셨다면 댓글을 남겨주셔도 좋고, 앞으로 읽으실 거라면 읽은 후의 감상을 함께 나눠봐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책을 나누어드리는 작은 이벤트는 11월 25일 자로 종료했어요!

보내주신 이런저런 코멘트가 감사하고, 또 반갑더라고요.

제가 자주 연락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책방에서 만났지만 연락한 지 오래된 사람들도 있었고, 전혀 알지 못하는-아마도 뉴스레터로 처음 만난 것이 분명한- 사람들도 있어서. 그 모든 응답이 마치 답장받은 것처럼 느껴졌어요.
구독자 님께서 응답을 해주셨다면, 감사하다는 말을 다시 드리고 싶어요.

11월이 이렇게 끝나고, 12월이 시작됩니다.
한 해를 작정하고 돌아보아도 이상하지 않은 날이 오네요.
저는 슬슬 11개월간 써온 노트를 한 장씩 들춰볼 계획입니다.

구독자 님은 12월 계획이 있으신가요? 있다면 무엇인지도 궁금하고요.

오늘부터 날씨가 무척 추워졌고 그래서인지 편지 보내는 시간이 늦어졌습니다.

부디 따스한 곳에서 이 편지, 읽어주세요!

2022.11.30.
부산에서 성은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