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rnertable : 내가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곳 중에서

🎼  Son Lux, Mitski, David Byrne 「This Is A Life」, 2022 

구독자 님 안녕하세요!

12월의 편지를 보내는 날이 왔네요.

올해 다 갔다니. 마지막 달이라니. 실감이 안 나지만요...

어떤 마음으로 12월을 시작하셨을지 궁금해요. 저는 요즘 다이어리를 꺼내서 올해에 있었던, 그러나 잊고 있었던 일들을 들여다보고요. 빈칸을 뒤늦게 채우기도 합니다.

🤝 12월 첫째 주의 일 : 계약 

지난 주말, 예정에 없던 상경을 했고 계약까지 일사천리로 마쳤습니다! 집이 100% 만족스러웠냐,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쉽게 대답하기 어렵지만요. 실은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자세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외출 준비를 하던 세입자의 주말 아침을 방해하면서 구석구석을 둘러보는 게 너무 불편해서. 빨리 빠져나올 궁리를 하며 그 시간을 보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리고 여러 집을 보다 보니, 그놈이 그놈 같기도 하고....

하지만 몇 번의 임장을 통해 깨달은 건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집을 찾는 일이 하늘의 별 따기라는 것, 또 한겨울에 이 짓(?)을 더는 하고 싶지 않다는 간절한 마음이 저와 제 동거인에게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얼떨결에 계약을 끝내고 녹초가 된 몸과 마음으로 부산에 돌아왔어요.

계약만 마무리하면 여유로울 줄 알았건만. 다음 과제와 그다음 과제가 차곡차곡 쌓여 있습니다. 이사 견적을 받고, 입주 청소를 알아보고, 실측 후의 엄청난 쇼핑까지. 하루 이틀 정도는 아무것도 하지 말겠다는 다짐으로 보냈더니 오늘은 뉴스레터라는 미션이 저를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하하- 그래도 후련합니다.

🏡 12월 첫째 주의 장소 : 무사이 

부산에서 가보고 싶다고 생각한 몇 곳을 저장해두고 오래 살펴보았는데. 이러다가 영영 못 가고 서울로 떠날 게 눈에 훤해서 급히 찾아간 무사이. 서점이기도 하면서 독립영화를 상영하는 곳이기도 하고, 음료를 주문할 수 있는 카페 메뉴도 있는 곳이라 참 궁금했는데요. 지하에 위치한 대신 공간이 무척 넓고, 사고 싶은 책과 참여하고 싶은 프로그램이 많아서 즐거웠습니다.

저는 김비 작가님과 소설 창작하는 시간을 함께했는데요.  집에서 대중교통으로 1시간 정도 걸리는 곳이라 매시간 잘 참여할 수 있을지 걱정했지만 그래도 중도 이탈하지 않고 끝까지 했어요. 오래 생각했던 한 사람과 저의 감정에 관한 짧은 소설도 완성할 수 있었고요.

초행길은 언제나 멀고 험하게 느껴지는데요. 이제 1시간가량 걸려 무사이까지 가는 길이 익숙하게 느껴집니다. 그래봤자 채 다섯 번도 가지 않았는데 말이죠. 무사이가 없었다면 부산의 북구까지 향하는 일이 없었을 것 같아요.

어쩌면 마음속 동네의 범위는 자주 찾는 특정한 공간을 기준으로 만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공간이 많을 수록 동네는 구체적인 모습이 되고, 그러한 공간이 우리 집에서 조금씩 멀어질 때 동네는 조금씩 확장되고요.

저는 엄청난 길치이자 방향치인데요. 돌이켜보면 제가 좋아하고 자주 찾는 공간이 위치한 점을 기준 삼아 방위와 지리를 (겨우) 파악하며 살아왔어요. 그러니 깃발로 삼은 그 공간들이 계속 존재하는지의 여부가 저의 지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것 같고요.

모니터 속 지도를 다시 펼쳐봅니다. 제가 유독 찾지 않았던 사하구와 금정구. 그 주변엔 가고 싶다고 장소 저장을 해둔 몇 개의 점들이 보여요. 이번 겨울에는 꼭 가보겠다고 다짐하며 달력과 지도를 번갈아 살펴봅니다. 떠나기 전 제 안의 동네를 조금이라도 더 넓혀보고 싶어서요.

구독자 님의 동네는 어떤 모양인가요? 충분히 촘촘한가요? 만족할만한 크기인가요?

 🎬 12월 첫째 주의 영화 : 댄 콴, 다니엘 쉐이너트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2022

엄청난 뒷북입니다. <에.에.올> 봤어? 아직도 안 봤어? 그런 말을 들은 게 두어 달 전이니까요. 누구 하나 시원하게 줄거리를 알려주는 사람은 없고, 가서 보라는 말만 거듭하길래 궁금증이 치솟던 차. 부동산 계약을 마치자마자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영화관에 다녀왔습니다. 영화관에서 보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왔고요.

이 영화의 주된 설정은 '다중 우주'인데요. 주인공인 에블린은 남편 웨이먼드와 결혼하여 미국으로 이민을 한 후 코인 빨래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웨이먼드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미국에 오지 않았다면, 빨래방을 운영하지 않았다면... 수많은 결정을 통해 갈라진 여러 우주(everywhere)에서, 그는 다른 모습(everything)들로 동시에(all at once) 존재하고 있습니다.

빨래방을 운영하는 에블린은 '최악의 에블린'이라고 명명됩니다. 이루지 못한 것, 버린 꿈이 너무 많은 인물이라고요. 결혼하지 않고 가수가 되고자 하는 꿈을 이룬 에블린도 있고, 멋진 요리사가 된 에블린도 있고, 중국에 남아 쿵푸를 연마해 성공한 에블린도 있습니다. 에블린은 여러 우주를 넘나들며 자신이 다른 선택을 했다면 될 수도 있었을 다른 버전의 에블린을 만나게 됩니다.

(영화가 하고자 하는 말과 정반대로 나아가는 것 같지만) 저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지금의 나는, 다중 우주 속 여러 '나'와 비교했을 때 어느 정도의 수준일까. 다른 버전으로 나아가기 위한 중대한 결절점이 있었다면 그게 무엇이었을까, 하고 생각했어요. 영화의 장면들은 절 자꾸만 과거로 데려가서 헤매게 만들더라고요.

구독자 님은 <에.에.올> 보셨나요? 이미 보신 영화라면 감상이 궁금합니다. 저처럼 자꾸 회한에 잠기거나 다른 가능성을 꿈꾸셨는지도요.

올해 제가 보낼 편지는 앞으로 두 번(14일, 21일) 남았습니다.

마지막 주부터는 잠시 쉬며 내년도 계속 이 편지를 이어나갈지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지게 될 것 같아요.
계속 할 수 있을까? 같은 방식으로? 다른 곳에서? 다른 툴로?
여러 고민을 마음에 담고 12월의 끝과 새해의 시작을 보내보려고 해요.

혹시 전하고 싶은 의견이나 제안이 있다면 댓글과 이메일(my.corner.table@gmail.com)로 편하게 보내주세요! 🙆🏻‍♀️

2022.12.07.
부산에서 성은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