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rnertable :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

🎼  Jim O'Rourke 「Eureka」, 1999

구독자 님 안녕하세요!

오늘 편지는 조금 늦었습니다. 늑장 부리다가 말이지요. 시간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여유로웠던 거 있죠.
아래에 소개할 책에서 등장한 앨범을 넣어보았어요. 내내 트랙들 오가며 편지 썼습니다. 들으며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 10월 둘째 주의 일 : 책방 한탸와 부산국제영화제

인스타그램 피드가 온통 부산국제영화제 이야기로 가득하던 주간. 프로그램 북은 진작 근처의 책방에 들러 받아와 놓고 던져둔 채 펼쳐 볼 생각을 못 하고 있었는데요. 심심했던 어느 날, 영화나 한 편 볼까 싶어 예매 창을 켰습니다. 당연히 매진이더라고요. 새로고침을 몇 번 누르는 사이 취소된 자리가 하나 등장해서 본 <어느 짧은 연애의 기록>. GV도 좋았습니다. 재치 있는 질문과 답변, 커다란 웃음소리와 집중하는 눈빛 같은 것들을 혼자 즐긴 것이 아쉬울 정도로요.

또 다른 영화 예매해 볼까, 생각만 하다가 토요일이 금방 지나갔습니다. 대신 부산국제영화제를 즐기러 간 책방 한탸 사장님을 대신해 일요일의 책방을 지키기로 했어요. 오랜만에 책방을 돌보는 날이라 기대를 품고 책방에 갔습니다. 영화제 기간이라 그런지 몇 달 전 책방을 하루 봤던 날보다 사람이 많았고, 빈 손으로 나가는 손님은 별로 없어서 보람찼어요. 그렇지, 책 파는 맛이 이런 거였지! 구멍 난 서가를 보는 재미를 만끽하고, 집에 와 짜장면을 시켜 먹었습니다. 완벽한 연휴였어요. 

🏡 10월 둘째 주의 장소 : 태종대

친구 커플이 부산 여행을 온다며, 접선 장소를 태종대로 지정해주었어요. 먼 옛날 저도 여행자로 부산에 왔을 때 들렀던 희미한 기억이 전부인 곳. 영도에서도 끝까지 달려가야 하는 곳. 도착해보니 낯선 태종대 바다는 한적하고 근사하던데요! 어느 조용한 아드리아해에 온 것 같다는 느낌도 찰나. 조개구이를 파는 집집에서 손님을 끄는 소리(주차됩니다. 자리 많아요. 조개 양껏 줄게 아가씨...)가 태종대를 가득 메웠습니다. 

간신히 자리를 잡고 친구들과 둘러앉아 조개와 술을 먹었습니다. 등 뒤로 바다가 만드는 물소리가 계속 들려왔어요. 시끄러운 음악 대신 바다 사운드가 흐르는 식당이라 술맛이 두 배로 좋았습니다. 왠지 쌀쌀한 날씨에 더 잘 어울리는 장소가 아닌가 싶습니다.

📚 10월 둘째 주의 책 : 백은선 『나는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하고』 문학동네,  2021

오늘 엄마로부터 [시간날때전화좀]이라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전화를 걸었어요. 오늘 종일 집에 있었다고 답하자, 엄마는 밖에 나가라는 말을 빙빙 돌려 했습니다.

엄청 중요한 일을 처리했고, 네가 부탁한 도서관 심부름도 했어. 돌아오는 길에 횡단보도에 서 있는데, 옆에 있던 할아버지가 말을 걸더라고. 애국가 3절을 아냐고. 가을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 딱 애국가 3절 같은 날이라고. 그래서 내가 고개를 들어봤더니 정말 말 그대로 공활한 거야. 공활한 하늘 보는 건 쉽지 않아. 근데 그 할아버지 참 귀엽지 않아? 하늘도 챙겨 보시고, 하늘 보라고 말씀도 하시고.

나가서 하늘 좀 보라는 말을 이렇게 길게 할 게 뭐람. 오후 세 시를 훌쩍 넘겨 밖으로 나왔습니다. 요즘은 일 년에 얼마 되지 않는 아주 짧은 '테라스기(期)', 혹은 '열린창문앞좌석기(期)'인데요. 어제는 테라스가 있던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고, 오늘은 창문을 활짝 열어둔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일주일만 지나도 따뜻한 카페 찾아 헤매고 그러겠지요? 찰나 같은 가을, 놓치지 않을 거야.

공활한 가을 하늘 아래 이틀 동안 읽은 책은 백은선 작가의 산문집입니다. 웃었다, 울었다, 어느 페이지는 사진 찍어서 친구도 보내주었다, 필사했다, 오만 난리를 치며 읽은 책. 코 풀고 다시 읽고, 새 커피 주문해서 다시 읽고, 그러는 내내 차분한 가을바람이 계속 곁에 있었습니다.

그중 돌에 대해 쓴 한 토막을 소개하고 싶어요. 작가는 돌을 몹시 좋아한다고, 여러 지역의 돌을 수집한다고, '돌'이라는 제목의 시집 한 권을 묶는 생각을 한다고 해요. 여행지에서 돌을 주우며 돌에 반하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저도 어느 여행지에서 만난 돌이 있어요. 주운 것은 아니고 산 돌입니다. 위시 스톤(wish stone)이라고 불리는 관광지의 흔한 기념품인데요. 제가 처음으로 가장 큰 용기를 냈다고 생각하는 여행지에서 몇 달러를 주고 데려왔어요. '쓸모'가 없는 기념품은 죄다 잃어버리거나, 적극적으로 내다 버리면서 모르는 사이 제 공간에서 천천히 사라졌는데요. 유일하게 이 작은 돌만 제 책상 한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불안할 때면 하염없이 문지르게 되는 일종의 '애착 돌(?)'이 되었어요. 이미 상품으로 한참을 살고 있었을 제 애착 돌과 비교하자면, 작가가 고심해 골라낸 자연 속의 돌 컬렉션이 훨씬 근사해 보이지만. 돌이 주는 기쁨이 무엇인지는 저도 이 상품 덕분에 잘 알게 되었답니다.

언젠가 시인이 완성할 돌 장식장이나, 돌 시집을 기다리면서. 미처 읽지 못한 시인의 시집도 찾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아끼는 작은 돌을 어루만지면서요.

구독자 님에게도 가까이 두고 신비로움과 애정을 느끼는 자연물이 있는지 궁금하네요. 자체로 노래이고 타임머신인, 매일매일 보고 싶은 그런 것이요.

일주일 사이에 날이 많이 차가워졌어요.

얇은 덧신으로 버티던 발도 한없이 차가워져서 양말 없인 힘들더라고요. 벌써 여름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는데...
구독자 님은 가을을 만끽하시는 중일지, 저처럼 더운 어느 날을 그리며 겨울을 두려워하시는 중일지 모르겠네요.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길 빕니다!

그래도 아직은 좋은 가을이니까, 테라스와 열린 창문 앞 좌석을 놓치지 마세요! ☺️

2022.10.12.
부산에서 성은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