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rnertable : 침묵의 시간을 거치지 않고서는

🎼 박지우 「Happiness or Sadness」, 2021

안녕하세요. 구독자 님.

한 주 잘 지내셨나요?

별일 없는 한 주를 보냈습니다.

너무도 고요해서, 이번 주 뉴스레터는 대체 어떻게 채우지, 걱정이 들 만큼 조용했어요. 키트를 거듭 사용해도 음성이 뜨는데, 컨디션은 좋지 않아서요. 집 밖에도 거의 나가질 않고, 집에 온종일 있었습니다.

급하게 커피가 필요할 때 잠시 카페에 들르거나, 사람이 유독 없는 시간에 맞추어 런닝을 하고 왔어요.

평일 아침에는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러 작은 작업실에 가는데요. 화실의 선생님도 확진 소식을 알려주셔서... 유일한 출퇴근 스팟도 잃은 한 주.

그래도 꾸역꾸역 끄적인 짧은 레터를 보냅니다.

저는 한 주 이렇게 살았습니다.

🏋️‍♀️ 3월 셋째 주의 일: 루미큐브

눈 뜨고 있는 시간의 대부분은 루미큐브를 켜 놓은 상태로 패를 옮기면서 지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빨래를 개면서도, 심지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면서도 부지런히 눈을 굴려 숫자를 맞췄어요. 제가 휴대폰 게임 시간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건 건강하지 않은 시기를 지나는 중이라는 뜻이기도 해서, 초조하기도 했지만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실제로 한 주 동안 레벨의 숫자는 두 번 바뀌었고, 돈은 많지 않아요. 3만 원 정도. 그런데 이 지금은 3만 원이라는 이 숫자가 하루 사이에 1천 원에서 7만 원까지 왔다 갔다 한다니까요. (판돈의 크기가 100원부터 1만 원까지 오간다고요. 얼마나 과도하게 하고 있는지 아시겠지요?) 게임의 횟수는 무척 많지만, 실은 진심을 다하지 않습니다. 다른 일들을 하면서도 무한 플레잉하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일을 할 때, 게임이 뒷전이 되어버리고, 그렇게 뒷전인 상태로 게임이 진행되지요. 그러면 반드시 질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얼마나 진지하게 임하는지 여부와 승패는, 무관한 것이 분명해요.

한마디로, 게임은 자체적으로 일정한 밸런스를 맞추기 위한 설계가 이미 되어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떤 판은 깔린 패부터 게임의 전개 양상까지 내가 1등이 되도록 모든 것이 짜여있다는 확신이 드는 반면, 또 어떤 판은 단 한 개의 타일도 손에서 내려놓지 못한 채 허무하게 라운드가 끝나기도 하거든요. 어느 정도의 레벨에 이르고 나면, 그저 확률 싸움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돈이 없어도, 연이어 져도 크게 슬프지 않은 채 게임을 이어가요. 어차피 나를 1등으로 만들어주는 판이 확률적으로, 반드시 존재한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이를테면 조커 두 개가 동시에 들어오거나, 혹은 조커 두 개가 동시에 들어오거나...)

지금도 이 글을 쓰면서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패를 보니 아무래도 이번 판은 다른 승자를 위한 들러리가 되는 시간인 것 같네요. 마치 라디오처럼, 백색소음처럼, 깨어있는 시간에 1부터 13까지의 알록달록한 숫자 패가 들어왔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저는 감흥도 재미도 없이 게임과 함께 지냅니다.

달이 바뀌면 그만둘 수 있을까요? 날 좋을 4월에는 방에서 루미큐브를 하며 시간을 죽이지 말아야 할 텐데요.

☕ 3월 셋째 주의 장소 : 사진 현상소

2020년도에 찍은 필름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가, 뒤늦게 현상소에 맡겼어요. 무거운 필카, 자주 들고 다니지도 않는데다 아무래도 카메라는 편한 디지털에 손이 더 자주 가는 사람이라서요. 필름 카메라를 찍는 친구도, 영업하는 친구도 그동안 많이 만나왔지만, 아직 능숙하게 다루지 못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전 영영 필카 애호가로 살지 못할 것 같아요. 14살, 중학교에 올라가자마자 사진부에 가입했는데요. 그때도 필름 카메라 대신 디지털카메라를 샀었거든요. 액정도 없던 은빛의 디지털카메라는 순식간에 고물로 바뀌었지만요. 컴퓨터실로 달려가 USB만 연결하면 바로 전에 찍은 사진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게 어찌나 기뻤는지 몰라요. 성격 급한 사람은 아무래도 필름 카메라와 가까워지기 힘들겠지요.

그런데 2020년에 떠난 여행에는 굳이, 필름 카메라를 들고 가서, 2년 넘게 사진을 확인하지 못한 거 있죠. 미루고 미루다가 중구에 갈 일이 생겨 한 현상소에 방문했어요. 드디어 2020년도의 사진이 모두 봉인 해제 되었는데요.

문제는 어디에서 찍은 건지 모를 사진들이 꽤 많았다는 거예요. 특히 위의 허허벌판 사진들의 배경이 대체 어딘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찍을 수 있는 사진의 숫자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 굳이 카메라를 꺼낸 뒤 셔터를 누른 건 그곳이 인상적이거나 좋았기 때문이었을텐데. 생각나는 장면이 하나도 없다는 게 어찌나 황당하던지요.

그러나 이런 마음은 낯설지 않더라고요. 발신자가 떠오르지 않는 메일, 약속 장소와 약속 상대가 잊혀진 수년 전 다이어리 속의 일정, 언제 건네받은 지 기억나지 않는 명함과 명함의 주인, 감정만 나열해서 가늠하기 어려운 일기장 속의 중대한 사건 같은 것들. 그런 조각과 우연히 만났을 때의 느낌과 꼭 같아서요.

오래 살지도 않았는데 벌써 까맣게 사라진 풍경과 사람이 산더미 같다는 건 왜인지 아쉽기도 하고, 가뿐하기도 했습니다.

📚 3월 셋째 주의 책 : 김남희 『길 위에서 읽는 시』 문학동네, 2016

구독자 님은 침대맡에 책을 두시나요?

저는 침대 옆에 간식과 머리 끈, 책과 연필 같은 잡동사니를 쌓아두는 타입이라, 동거인과 협탁을 각자 하나씩 두고 쓰는데요. 조명과 충전기 외에는 어떤 물건도 없는 동거인의 깔끔한 협탁과 달리, 제 협탁은 조금만 충격을 가해도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상태로, 판형과 두께가 제각각인 책들이 탑처럼 쌓여있습니다. 자기 전, 단편 소설을 한 편씩 읽어볼까 하고 단편집 몇 권을 올린 것을 시작으로, 시집과 에세이, 매거진과 사진집이 차례로 올라왔고, 동거인은 제 협탁을 애써 외면합니다.

집에 갇혀있었던 지난 한 주 동안 침대에서는 김남희 작가의 『길 위에서 읽는 시』를 읽었어요. 이 책은 책방에서 함께 글 쓰고 책 읽던 동지들에게 오래전 선물로 받았었는데요. 이제야 펼쳐보게 되었지 뭐예요. 작가님의 사인까지 정성스레 받아주신 책이었는데 말이죠. 무려 2020년 11월 27일 자.

1년 반이 지나고 읽어본 책에는 우리 일상에 거의 사라진 두 가지, 시와 여행에 관한 이야기가 들어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마음을 다해 읽을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자유뿐일 20대를 고대하면서 여행 에세이를 읽던 사춘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요.

아이슬란드 사람들에게 직업을 물으면 소방관, 간호사, 경찰 등이라고 제각기 답하고는 한결같이 “그리고 음악을 해요”라고 덧붙인다는 말이 있다. 모두가 뮤지션이라더니, 여행중 내가 만난 이들도 그랬다. 박물관에서 표를 팔던 청년은 록밴드에서 베이스 기타를 맡고 있다 했고, 동네 사진관에서 일하던 처녀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같이 팔고 있었다. 이 나라에는 어디에나 예술가가 넘쳐났다. 음악도, 미술도 혼자 있는 침묵의 시간을 거치지 않고서는 만들어낼 수 없는 것들이었다.
김남희 『길 위에서 읽는 시』 P.22

혼자 있는 침묵의 시간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시절인데다, 부산에 내려와 사는 삶이 종종 여행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터라 책의 초반에 등장한 ‘침묵의 시간’이라는 글자에 사로잡혔어요.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침묵’과 ‘시간’은 저를 점령했더라고요.

지금 적고 있는 뉴스레터는, 저를 둘러싼 침묵을 견디기 어려워서 시작한 것이기도 한데요. 새삼, 침묵은 견디는 게 아니라 반겨야 하는 게 아닌가 싶더라고요. 귀한 침묵의 시간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정말로 많으니까요. 뉴스레터에서 한 주간의 일상에 관하여 조잘거리는 것을 넘어서, 곱게 빚어내고 싶은 것들이 분명 제 안에 있고, 그것을 잊지 말자고 다짐했어요. 알지 못하는 사이, 침묵은 모두 사라지고 소음을 견디는 삶이 저를 덮칠지도 모르니까요. 그 땐 질그릇 하나 빚는 것도 사치가 될지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