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rnertable : 가만히 기대고 싶은 손

🎼 Mitski 「Glide (cover)」, 2022

뒤늦게 봤습니다. 애프터 양-

안녕하세요. 구독자 님!

벌써 한 달이 지나고 여름은 완전히 물러났어요.

이 글을 쓰는 지금 부산엔 가을비가 촉촉하게 내리고 있습니다. 저는 손님이 아무도 없는 동네의 작은 카페에 있어요. 주문해주시는 분이 제 요청을 잘 못 알아들으셨는지, 제가 주문을 잘 못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1L짜리 아메리카노를 받았습니다. 세로 방향으로 선 아이패드보다도 키가 큰 커피 컵. 저는 이 거대한 컵이 왜 난감한지 모르겠어요. 왜인지 부끄럽기도 하고요.

오랜만에 쓰는 편지로 무슨 이야기를 전해볼까 생각하며 다이어리를 살펴봅니다. (다행히) 한 달간 저는 방 밖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네요.

기억에 남는 장면을 몇 가지 골라보았습니다.

📚 9월 첫째 주의 책 : 미셸 자우너 『H마트에서 울다』 문학동네, 2022

이미 알고 계실지도 모르는 책을, 다 읽으셨을지도 모르는 책을 이제야... 추석 연휴를 앞두고 어떤 책을 읽을까 책장 앞을 어슬렁어슬렁 걷다가 『H마트에서 울다』를 골랐어요. 엄마랑 음식에 관한 이야기니까 추석이랑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거든요. 이 책 잘 읽고 연휴를 보낼 거라고 말하니, 같이 책 읽는 어떤 분께서 "친정 가서 울겠네" 하셨어요. 한 마디를 더 보태기도 하셨죠. 엄마 레시피를 잘 받아 놓으라고요. 아쉬울 때가 있을 거라고요.

이 책은 한국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라온 작가 미셸 자우너가 어머니의 암 투병과 죽음을 경험하고 그 후 애도의 과정을 써 내려간 일종의 '이별 기록'입니다. 작가는 한인 마트에서 그리운 음식을 떠올리며 식재료를 살 때마다 엄마를 생각하며 울 수밖에 없다는 말로 글을 시작합니다. 책 속에는 한국인이 사랑하는 수많은 한국 음식이 등장하고, 그 음식과 함께 한 모녀의 시간이 담겨있어요. 한국인 독자라면, 엄마와 평범한 관계를 누려보았다면 전부 내가 아는 맛이고, 전부 엄마와 나눈 맛이기에 이 책을 읽는 동안 엄마를 떠올리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맛있어?” 엄마는 김 봉지를 뜯어 내 밥그릇 옆에 놓았다.
“진짜 맛있어!” 나는 입안에 아직 음식이 반쯤 남은 상태로 연방 쓰러질 듯한 시늉을 하면서 대답했다.
엄마는 내 뒤 소파에 앉아, 내가 걸신이라도 들린 듯이 어귀어귀 먹는 동안 얼굴쪽으로 흘러내린 머리를 어깨 뒤로 걷어주었다. 내 몸에 닿는 엄마 손길이 친숙하게 느껴졌다. 살짝 끈적끈적한 크림기가 남아 있는 차가운 손은 더는 내가 화들짝 피하기 바쁜 불쾌한 손이 아니라 가만히 기대고 싶은 손이었다. 마치 엄마의 애정에 이끌리는 어떤 중심이 내 안에 새롭게 생겨난 것만 같았다. 내가 그 자기장에서 떠나 있었을 때까지 새롭게 충전된 중심이. 나는 또다시 엄마를 기쁘게 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그동안 홀로서기하느라 좌충우돌한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대 엄마가 웃음을 터뜨리게 만들고, 그걸 달콤하게 음미하고 싶었다. 스웨터를 세탁기에 돌려버려 두 치수 작게 쪼그라뜨린 일을, 점심을 먹으러 고급 식당에 갔다가 무료인 줄 알고 시켜 마신 탄산수에 12달러를 쓴 일을 재미나게 들려주고 싶었다. 엄마, 엄마가 옳았어, 라고 순순히 인정하고 투항하고 싶었다.
미셸 자우너 ⌜H마트에서 울다⌟ 중 (p.123)

저는 '순순히 인정하고 투항'하는 일이라곤 없던 딸이었어요. 하지만 엄마가 없는 날을 겨우 상상해보게 만드는 이 책 때문에 저는 '절대 항복'의 마음으로 추석을 보냈습니다. 기쁘게 하고 싶어 안달이 나는 마음, 가만히 기대고 싶은 마음,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대고 싶은 마음은 왜 끔찍한 상상을 애써 하고 난 후에야 생기는 걸까요.

평소에는 무겁다고 손사래 치던 엄마의 선물 꾸러미를 몽땅 챙겨왔어요. 미리 담아둔 피클과 묵은지, 직접 기른 애호박과 고추, 물만 넣어 끓이면 찌개가 뚝딱 완성되는 냉동 냉이된장, 반찬 몇 가지와 종류별로 담은 과일. 박스째 차에 싣고 돌아오는 길 위에서 이 책을 다시 떠올렸어요.

오늘은 아침부터 엄마의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고구마 농사 흉년이라 조금만 보냈어. B급 샤인머스캣도.]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던 고구마를 삭제하고 답장을 보냈습니다. [고마워!]

🎬 9월 셋째 주의 영화 : 요아킴 트리에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2021

여름 내내 다니던 글방이 끝났어요. 어느 날의 글방에서 A 선생님이 제게 어떤 영화 제목을 말씀하시며 보았냐고 물으시더라고요. 제가 좋아할 것 같다고 하시면서요. 누군가 책을 추천해달라고 하면 저는 늘 도망가는 사람이었어요. 한 사람의 취향을 알게 되기까지, 그리고 그에 맞는 추천을 하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시간과 노력을 들여도 자주 실패하고 만다는 것을, 책을 팔며 처절하게 깨달았거든요. (눈물)

A 선생님과 제가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눈 일이 열 번이 채 되지 않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사랑하면 누구나 최악이 된다>를 제게 추천해주신 걸까요? <라우더 댄 밤즈> 감독이네. 봐야지, 봐야지,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그사이 글방이 끝났어요. 이렇게 어영부영 살다가는 곧 영화관에서 보는 데 실패하겠다 싶어서 급하게 예매했습니다. 이른 아침에 상영하더라고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커피를 만들고 서면으로 향했지요. 영화관에는 다 합치면 10명이 되려나 싶은 소수의 여성뿐이었어요. 두 시간이 넘게 '율리에들'과 함께했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너무 좋아! 내적 비명 지르며 나왔어요.

𝚃𝚑𝚎 𝚆𝚘𝚛𝚜𝚝 𝙿𝚎𝚛𝚜𝚘𝚗 𝚒𝚗 𝚝𝚑𝚎 𝚆𝚘𝚛𝚕𝚍

나한테 더 맞는 길을 찾으며 몇 번 진로를 바꾸다가 어느덧 서른이 된 율리에. 취향은 잘 맞지만 이미 인정받는 만화가인 애인(악셀)이 아이를 낳고 안정된 미래를 꾸려가길 원하자, 율리에는 그와 함께라면 자신이 늘 조연인 것 같다고 느끼는데요. 마음을 동하게 한 새로운 애인(에이빈드)은 나이도 비슷하고 뜨거운 열정도 불러 일으키지만, 율리에가 원하는 지적・예술적 대화가 어려운 상대임을 깨닫습니다. 율리에가 겪는 모든 일들(사랑, 작별, 임신과 출산, 커리어, 가족...)은 저와 제 친구들이 지겹도록 나누는 이야기라서. 오랜만에 만나 새로 사귄 애인 얘기 들려주는 '내 친구' 같았어요.

요아킴 트리에의 오슬로 3부작 가운데 마지막 작품이라고 불리는 이 영화를 보며, 언젠가 오슬로에 가기 전까지 두 편의 영화를 미리 봐 둬야지. 오슬로에 간다면 흰 반바지를 입고 조깅을 해야지. 해 질 녘에는 율리에처럼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에서 한참 시간을 보내야지. 가능하면 울고 싶은 시절에 가야지. 그러니까, 가능하면 천천히, 나중에 가야지. 생각했습니다.

📅 9월 넷째 주의 일 : D-100

9월 22일은 2022년이 100일 남은 날이라는 말을 어디에서 주워들었어요. 큰일이다, 큰일이다… 되뇌다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100일간 매일 무언가를 해볼 사람들을 모아 작은 온라인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지난 22일부터 7명이 모여서 매일 인증과 함께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어요.

왼손으로 글씨 쓰는 연습을 하는 분, 도스토옙스키 전작 읽기를 앞두고 참고 도서를 필사하시는 분, 영어 원서를 읽으며 공부하시는 분, 11시 이전 취침을 목표로 하시는 분, 인체 드로잉 연습을 하시는 분, 어려운 철학서를 읽으시는 분, 그리고 홈트레이닝 중인 저. 매일 사진이 하나씩 올라올 때마다 카운팅을 하며 하루를 보내요. 오후 3시에 두 명. 저녁 9시에 벌써 다섯 명이나 사진을 올렸네! 11시 59분이 되면 ‘7’이라는 숫자가 쌓였는지 살피며 하루를 정리합니다. 일곱을 세며 지내는 날들.

남은 올해는 행운의 숫자를 외며 마무리하려고 해요. 오늘은 10월 5일, D-87이랍니다. 구독자 님의 남은 87일이 좋은 수(數)로 가득하시기를 빌어요.

🍵 10월 첫째 주의 장소 : 하동 당일치기

지난 주말엔 하동에 다녀왔어요. 동거인과 제가 이유도 맥락도 뜬금도 없이 자주 부르는 노래가 조영남의 ‘화개장터’인데요. (대체 왜?) 월요일까지 쉬는 연휴가 귀해서 무얼 할까 고민하다가, 역시 이유도 맥락도 뜬금도 없이 하동에 가기로 했습니다. 화개장터 말고는 하동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는데요. 검색해 보니 구례와 함께 여행 가기 좋은 곳이라고. 녹차밭이 많고, 청학동이 있는 곳이라고 하더라고요. 생각보다 할 게 많잖아? 기대를 품고 맛있는 만둣국 한 그릇 끓여 먹은 후 출발했습니다.

차가 무시무시하게 밀렸어요. 어쩐지 날씨가 너무 좋더라니… 4시간 가까이 차 안에 갇혀있었고, 친절한 내비게이션은 주유소 하나 없는 국도로만 안내를 이어갔어요. 텀블러 두 개에 꽉 채운 커피를 모두 비운 우리는 금세 위험을 감지했지요. 총 세 건의 교통사고와 여덟 건의 노상 방뇨를 목격하며 겨우 도착한 하동.

급히 발견한 식당에서 무사히 소화가 끝난 커피를 내보냈어요. 사진 찍으러 온 사람뿐이던 다원, 을씨년스러운 화개장터을 거쳐, 재첩국만 서둘러 마시고 돌아왔습니다. 마음에 들었던 곳은 ‘삼성궁’이었는데요. 고조선 시대의 소도를 복원한 곳이라고 하더라고요. 슬리퍼를 신고 한참 산길과 돌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요. 아담하고 푸른 연못이 두 번이나 등장해서 선물을 받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걷는 내내 볼 수 있는 수많은 석상의 얼굴을 보는 재미도 있었고요. 그래도 집이 최고지, 외치면서 깊은 밤에 익숙한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9월의 마지막 주는 코너테이블 레터를 생각하며 보냈어요.

또 석 달 동안 열심히 편지를 써 봐야지. 한 명, 두 명 늘어나는 구독자를 보는 즐거움을 만끽해야지. 부산에서 지내는 시간을 감사히 여겨야지. 하면서요.

구독자 님은 가을을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구독자 님의 늦여름과 초가을의 이야기도 궁금해져요.

2022.10.05.
부산에서 성은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