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rnertable : 무용한 독서에서 유용한 거짓으로

🎼  Mac Miller 「Circles」, 2020

안녕하세요. 구독자 님.

이번 레터는 20대 대통령 선거일에 보내게 되었네요.
투표는 무사히 하셨나요?
저는 무채색 옷을 입고 주말에 사전투표를 했습니다. 어떤 색도 바깥에 바르지 않으려고 고심했어요. 생각보다 줄은 길지 않아서 빠르게 투표를 마쳤습니다.

여유가 생긴 오늘은 서울-부산 왕복 비행이 예정되었던 동거인을 아침의 공항까지 데려다주었어요. 행사에만 참석했다가 곧바로 돌아올 동거인의 픽업을 위해, 공항 근처의 2층짜리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몇 시간을 보내기로 했는데요. 이 카페는 휴일인데도 사람이 없어서, 여유로운 마음으로 편지를 천천히 적을 수 있었습니다. (bgm은 엉망이었는데요. 음악이 나오지 않는 에어팟을 끼고, 노이즈 캔슬링으로 간신히 버텼습니다.)

구독자 님은 무사히 투표하셨는지 궁금하네요.

후련한 마음으로 투표장을 나오셨을지,
어딘가 모르게 뒤를 닦지 않은 마음으로 나오셨을지 궁금합니다.
(주변엔 후자가 많은 것 같지만요.)

이번 레터도 부디 잘 수신해주시기를 빌면서.

저는 한 주 이렇게 살았습니다.

🏋️‍♀️ 3월 첫째 주의 일: 생일들

삼월 첫째 주에는 제 생일이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제 이름이 마음에 안 든다며 구시렁거렸는데요. 저는 제 생일도 그리 마음에 든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왜 이 모양일까요?) 학창 시절을 떠올려보면, 제 생일은 늘 새로 입학하거나, 반이 바뀌거나, 학교를 옮겼을 때라서. 제 생일이 다가오는 것이 영 부담스러웠거든요. 직전 해에 멀리 이사하거나, 다른 학교로 떠난 친구들과는 만나기가 쉽지 않았어요. 아직 충분히 친해지지 못했다는 느낌이 드는 같은 반 무리가 우연히 제 생일을 알게 되면 어색한 축하를 건넸고, 우정은 완전히 영글지 않아서 민망한 마음으로 축하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생일에 큰 기대를 걸지 않게 됐어요. 생일이 다가오기 얼마 전이 되면, 새로운 반 친구가 카드나 선물을 건넬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잠들기 전에 시뮬레이션하곤 했지요. 저도 적절한 감사와 미안함(?)을 표현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거든요.

물론 시간이 흐르고 이제 반이나 학교가 바뀌는 것과 큰 상관없이 늘 똑같은 사람들에게 축하를 편히 받습니다. 이번 생일도 그랬고요.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축하의 인사를 건넸던 사람들이 축하의 메시지를 보내주었어요. 제겐 지난 한 해가 큰 변화들(폐업, 결혼, 이사…)로 가득했는데, 우정의 영역에서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는 걸 보여주는 단면처럼 느껴졌어요. 그게 무척 다행이라고 느껴지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했습니다.

제목이 생일‘들’인 이유는 제 생일만 있었던 건 아니었기 때문이에요. 결혼과 함께 제게 새로운(in-law) 가족 구성원이 늘었는데요. 그중 한 분인 시할머니의 팔순이 있는 주이기도 했답니다. 고속도로 위를 두 시간가량 달려 아주 작은 면 단위의 시골 마을에 도착했는데요. 결혼 전 인사를 드리러 갔던 작은 동네에 들어서니, 1차선 도로를 따라 늘어선 하나로마트와 고깃집, 방앗간과 국밥집이 정겹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제 떠나는 사람이 많은 동네라 빈 상점이 전보다 늘어난 것처럼 보였지만요.

케이크 위의 촛불도 불고, 노래도 부르고, 사진도 찍었는데요. 반나절 간의 잔치 중에 할머니는 자주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어떤 계기도 없고, 눈물의 원인이 될만한 단서를 찾기도 어려운 데다, 무엇보다도,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 눈물이라서, 우시는지 모르다가도 실은 울고 있다는 걸 화들짝 깨닫게 되는 그런 울음이라서, 우리는 모두 할머니의 울음을 뒤늦게 알아차리곤 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할머니는 울지 않을 때에도 우는 중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울음이었어요. 팔십 년 가량을 울어본 사람은 어느덧 울음의 경지에 오르게 되는 걸까요? 저는 굉장히 자주 울고, 소리를 내지 않는 울음을 시도하지만 어김없이 실패하고 마는데요. 저도 팔십 년을 울다 보면 울면서도 울지 않을 수 있고, 울지 않으면서도 울 수 있을까, 하고 상상해보았습니다. 

아이와 노인을 만나고 오는 날은 머릿속이 복잡해집니다.

그렇게 복잡해진 생각을 강제로 멈추고 나면, 건강과 안녕만 빌게 됩니다.

☕ 3월 첫째 주의 장소 : 데팡스 가든센터

부산에 이사 올 때 식물 친구 없이 온 것은 아니었어요. 저와 동거인은 아직 동물을 돌볼 깜냥은 되지 않아서. 책방에 살던 여러 화분 가운데 크로톤 한 그루를 챙겼고요. 책방 손님이자 작은 식물 가게를 운영하는 분으로부터 데려온 수채화 고무나무 한 그루도 함께 왔거든요. 게다가 작년에 살던 집은 해가 꽤 잘 들어서, 바질 씨앗을 사다 심어서 그 잎을 요리에 쓰기도 했고요. 방울토마토와 봉숭아를 키우기도 했는데요.

살다보면 별것 아닌 이유로 갑자기 생활 패턴이 무너지고 평소같은 하루를 챙기지 못하는 시기가 오지 않나요(저만 그런가요...). 기억나지 않는 이유로 고꾸라져버린 어떤 시기부터 식물 돌보기에 실패했습니다. 결국 크로톤과 고무나무를 제외하고 제가 부산에 내려와 심은 모든 작은 화분은 세상을 떠났어요. 게다가 조금은 어둑한 곳으로 이사를 하고 나니, 더는 식물을 들이지 않겠다는 다짐도 하게 됐고요.

그 와중에 큰 규모를 자랑하는 부산의 한 화훼 단지, 데팡스 가든센터라는 곳에 다녀오게 되었어요. 예전부터 얼른 가 보자고 노래를 불렀던 곳인데요. 팔순 잔치 때 쓸 꽃을 찾겠다며 뒤늦게 가보게 되었어요. 날이 많이 풀려서 봄맞이 소풍을 간다는 마음으로요. (방문 시기는 참 잘 선정한 것 같고요.) 우리 집을 위한 것은 사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문을 열었지만 도착하자마자 눈이 휘둥그레 돌아가서 신이 나버렸어요. 그중에서도 [동서양 난] 코너가 마음을 단숨에 빼앗아갔는데요. 그림처럼 피어있는 알록달록한 호접란이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저와 동거인은 둘 다 입을 헤벌쭉 벌린 채로 '너무 예쁘다!'를 연발했습니다.

생일이라고 화분을 보낸 친구가 둘이나 있더라고요. 저희 집에 곧 몬스테라와 사랑목 화분이 도착할 예정인데요. 저는 자꾸만 꼿꼿하게 선 동,서양난 코너의 화분들이 떠올라요. 아무래도 요즘의 취향은 아닌 것 같지만, 동양식 난초와 소나무 분재, 작은 매화나무를 사고 싶어서 위시리스트를 한 줄씩 늘려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꾸 아른거리는 걸 보면, 입양이 머지않은 모양입니다.

📚 3월 첫째 주의 책 : 크리스티앙 보뱅 『작은 파티 드레스』 1984Books, 2021

책방을 운영할 땐 매일매일 온라인 서점의 신간 코너를 살펴보았지만, 이제 그 정도의 노력은 쓰지 못합니다. SNS, 팟캐스트, 유튜브, 뉴스레터 등을 통해 관심있는 사람들이 발신하는 책 정보에만 의지하는데요. 최근에 자주 보였던 1984Books의 크리스티앙 보뱅 책들이 궁금해져서, 크리스티앙 보뱅이라는 글자가 보이면 야금야금 사 두었어요. 그중 이번 주에는 『작은 파티 드레스』를 다 읽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지금 읽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짧은 3n년 인생 가운데 제가 위태롭다고 느꼈던 특정한 시기 중 이 책을 읽었다면 (천천히 펼쳐지는 따뜻한 문장과는 관계없이) 크게 아팠을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이 책을 다소 안전하게, 기쁨을 만끽하며 읽을 수 있어서 참 좋았고요. 더불어 앞으로 내가 어떤 시간을 만나게 되면 이 책을 다시 꺼내어 읽게 될지도 그려져서 제 자리와 멀지 않은 책장에 꽂아두었습니다. 올해에도 몇 번이고 어떤 페이지를 찾게 될 것 같아요. 이런 책은 확실히 좋은 책이죠?

150페이지도 채 되지 않는 책의 거의 대부분을 필사해버려서, 어느 부분을 인용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네요. 읽어보셨다면 어떤 마음이셨을지 궁금합니다. (제 주변엔 본인 취향이 아니라고 하신 분도 있었거든요!) 

구독자 님은 어떤 한 주를 보내셨나요?
3월은 평탄하게 맞이하셨는지요. 
지내시는 곳의 날씨는 따뜻하게 변했는지도 궁금합니다.

'새봄'이라는 단어를 좋아해요. 띄어쓰기하지 않는 한 단어랍니다.
딱 이 시기에만 쓸 수 있는 말이라서. 2월 말부터는 주변 사람들에게 새봄, 건강하게 보내라고 말하곤 해요.

혹시 구독자 님은 시장에서 장을 보시나요?
지금 봄동이 좌판을 점령했어요.

2022.03.09.
부산에서, 성은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