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rnertable : 이제는 다르게 보인다고

🎼  Tennis 「One Night with the Valet」, 2022 

구독자 님 안녕하세요!

12월도 절반이 지나가려는 참입니다. 2022년과 작별할 준비가 되셨는지요?

저는 아직 아니라서,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당혹스러운 상태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제야 이것저것 할 일들을 새로 생각하고, 더듬더듬 해나가면서 지내고 있어요.

지난 한 주는 이렇게 살았답니다.

👶🏻 12월 둘째 주의 일 : 아가와 함께하는 오후 

출산 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친구의 집을 찾았어요. 아가와 처음 만나는 거라 잔뜩 긴장도 하고, 기대도 품은 채 이른 새벽 기차에 올랐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친구의 집에는 보행기를 탄 작은 아기가 거실을 누비고 있었어요. 친구와 꼭 닮은 눈매를 가지고요.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작고 약해 보여서 더욱 놀랍고 귀여웠는데요! 속으로는 "귀여워!"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처음 보는 아줌마의 괴성을 보고 아가가 울어버릴까 봐 흥분을 낮추느라 힘들었습니다.

친구와 저는 스무 살에 이층 침대를 나눠 썼어요. 우리는 서로의 첫 남자 친구를 봤고, 그때 자주 입던 카디건의 색깔도 기억하는 데다, 만취 후의 부끄러운 아침을 수습해주던 사이였지요. 아직도 친구가 기타를 치던 모습이나, 만화책을 쌓아 놓고 킬킬대던 여름이 선한데. 어느덧 친구는 낮잠과 우유를 거부하며 이모들 수다에 끼고 싶은 작은 생명체를 책임지고 있네요.

친구는 '복직'이라는 마음의 짐을 지고 있습니다. 제때 밥만 챙겨먹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핏덩이를 모르는 사람에게 맡긴다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고 했어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무엇도 바뀌지 않는다는 무력감은 잠시 뒤로 치워둔 채 기도합니다. 아가가 좋은 이모님과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친구가 세 끼를 무사히 잘 챙겨 먹기를요.

구독자 님에게는 어떤 마음의 짐이 있으신지요? 부담스러운 그 무게를 잘 조정하는 중이신지도 궁금합니다.

🌾 12월 둘째 주의 장소 : 징검다리와 오솔길 

엄마의 집 근처에는 작은 천(川)이 있습니다. 튼튼한 징검다리를 통해 물을 건널 수도 있고요. 건너편에는 억새가 넘실거리는 오솔길이 이어집니다. 날이 좋을 때, 사람이 없는 한가로운 평일이면 엄마와 저는 주머니에 귤이나 요구르트, 초콜릿 같은 것을 잔뜩 넣고 그 징검다리를 찾곤 했습니다. 우리는 징검다리 위에 위태롭게 앉아 이젠 기억도 나지 않는 대화를 나누곤 했어요.

주말엔 오랜만에 엄마 집을 찾았습니다. 떠나기 전 이른 아침에 함께 그 징검다리를 건너기로 했고요. 돌 위를 건너는 아슬아슬한 와중에 엄마는 문득 "지난번에 여기에서 우리 싸웠는데."라고 말했습니다. 나에겐 좋은 기억뿐인 이곳이, 엄마에겐 딸과 말다툼하고 등을 돌린 장소로 남아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엄마의 뒤를 쫓았습니다.

억새를 따라 걸으며 그런 적이 언제 있었냐고, 절대 아니라고, 발뺌했죠. 엄마는 기억이 안 나는 거냐며 웃었습니다. 초겨울 바람에 하늘거리던 억새 위엔 아침 해가 내리는 중이었고, 우리는 말싸움에 관한 진실 공방 대신 억새밭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기로 했지만요.

부산에 돌아와서도 징검다리와 오솔길에서의 한 시간을 떠올립니다. 엄마와 그곳에서 보낸 가장 최근 장면이 '다툼'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면서요. 그렇게 멋진 곳에서 무슨 이유로 싸웠을까 믿기지 않습니다. 저만 기억하지 못하는 싸움인 걸 보면, 제가 열심히 때리고 엄마가 일방적으로 맞은 게 분명해서 미안해요. 싸운 기억이 없어질 때까지 엄마와 자주 징검다리를 건너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 12월 둘째 주의 책 : 니콜 크라우스 『남자가 된다는 것』 문학동네, 2022 

온라인 독서 모임에서 읽은 책은 니콜 크라우스의 첫 단편집입니다. 돌아다닐 때마다 열심히 챙겨 다니며 야금야금 끝을 봤어요. 읽은 전작은 단 한 권, 장편소설인 『사랑의 역사』 뿐이었는데요. 단편집은 느낌이 조금 다르더라고요. 누군가와 앉아서 몇 시간은 떠들고 싶어지는 이야기들이었어요.

각각의 이야기와 그 안의 조각들로 밤을 새울 자신도 있지만, 이 편지에서는 ⌜에르샤디를 보다⌟라는 단편의 아주 짧은 부분에 대해 적어보려고 합니다. 주인공인 무용수는 영화 <체리 향기>를 보고 배우 호마윤 에르샤디에게 완전히 매료됩니다. 그의 얼굴이 "영향을 미쳤다"고 표현하면서, 그 영화는 "에르샤디의 얼굴이 전부"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으로 떠난 공연에서 그는 에르샤디를 우연히 보게 되고 순간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요. 같은 감정을 느낀 친구 로미는 후에 아래와 같은 편지를 주인공에게 보내요. 그토록 강렬한 감정에 휩싸이게 했던 에르샤디가 이제는 다르게 보인다고요. 

말할 수 없는 이유로, 속수무책으로 홀린 과거의 것들을 다시 마주하기가 어려운 이유가 바로 저런 변화 때문인 것 같아요. 구독자 님께는 그런 것들을 마주하는 용기가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제게는 그런 종류의 용기가 무척 부족하거든요. 제가 좋아했던 과거의 그 무엇이 망가질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다시 만날 기회가 오면 부지런히 도망다닌답니다.

그러나 한 시절을 보내고 나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던 것들,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제대로 보게 되는 과정을 겪게 되고, 그제야 무언가가 '쓰고 싶'어지는 마음이 생기는 걸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로미는 "그녀는 언젠가 드디어 시간이 생긴다면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싶다고, 그건 나 같은 무용수의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이 될 거라고(p.142)" 전하는 대목이 있거든요.

오늘은 평소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추웠습니다. 카페에서 오후 내내 앉아 시간을 보내고 싶었는데 너무 추운 바람에 금방 집으로 돌아왔어요.

서울에 사는 친구들은 얼마나 고된 출근이었는지 떠들고, 다시 운동하려면 봄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투정도 늘어놓던데요.
구독자 님은 따뜻한 곳에서 하루 보내셨는지 모르겠네요.

감기 조심, 늦은 코로나도 조심하세요!

다음 주에 올해의 마지막 편지로 찾아올게요.

2022.12.13.
부산에서 성은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