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rnertable : 있는 건 항상 나의 말뿐

🎼  Lucy Dacus 「Kissing Lessons」, 2022

안녕하세요. 구독자 님.

한 주 잘 지내셨나요?

이제 확실히 날씨가 따뜻해진 것 같죠?

저는 요즘 운동하러 갈 때면 반팔 차림으로 나서기도 해요. 겨울옷은 무겁기도 하고 늘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돌아다녀 내내 목 통증에 시달리기도 하는데요.

몸이 가벼워지는 계절이 거의 다 왔다는 감각이 참 좋아요.

겨울 좋아하시는 분도 많던데. 저는 겨울이면 생의 의욕이 버석버석하게 말라 바스러지는 느낌이라서.

차라리 축축하고 무시무시하고 여러모로 굉장한... 여름이 나은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봄은 여름에 비할 바 없이 좋은 계절이라서, 하루하루가 아쉽고 소중해요.

구독자 님도 만끽하셨으면 좋겠어요.

👩🏻‍🤝‍👩🏻 4월 첫째 주의 일: 17년 차 친구들과 함께

지난주 편지에서 이야기했던 친구 둘이 무사히 부산에 왔어요. 3시에 친구들을 픽업하고, 맛있는 식사와 술도 나누고, 늦은 새벽까지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지나치게 짧은 잠을 잤지요. 대화 없이 칼국수를 싹싹 비우고, 카페에선 반쯤 감긴 눈과 잠긴 목으로 남은 말을 하다가 헤어졌어요. 셋은 끌어모을 수 있는 모든 체력과 시간을 부어 짧은 여행을 했습니다.

따뜻하고 시끄러운 미포의 한 호텔에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어요. 한 친구는 바로 전날, 대학 동기의 자살 소식을 뒤늦게 들었고, 죽음 뒤에 숨겨진 이야기까지도 다른 동기로부터 전해 들었다고 했습니다. 지난 밤엔 잠을 이룰 수 없었다고 했어요. 그러니 이틀째 깨어있는 상태라고 말이지요. 다른 친구는 직장 내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스캔들과 최근에 들었던 상사의 폭언을 나눠 주었습니다.

학창 시절을 함께 보낸 사이라서 각자의 가족과 사정도 잘 알고 있었는데요. 누군가의 엄마가 고생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누군가의 동생이 친 사고를 들으며 '어휴!'를 동시에 외치기도 하고, 누군가의 아빠가 청승맞게 변한 이야기를 들으며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어요.

매일 밤 제발 잘 좀 자자. 뭔가 망할(또는 망한) 것 같아도 너무 낙담하지 말자. 엄마랑 아빠 잘 챙기자. *넷플릭스에 재미있는 거 올라오면 실시간으로 알려주자. 그런 말들로 끝난 장녀 셋의 밤.

호텔이고 뭐고, 내 집에서 자는 게 최고더라고요. 셋 다 잠을 설쳤는데, 그리고 셋 다 요즘 잠을 못 자는데. 오늘 밤은 다들 잘 좀 잤으면 좋겠는데 말이에요. 오늘 편지는 그 친구들과 함께 학교에 다닐 때 입었던 오래된 카디건을 걸친 채 쓰는 중이에요. 손목 부분은 반들반들 닳아 색이 변했지만, 조금씩 긴 세월 동안 부드러워진 옷감의 느낌이 좋아요, 내 친구들처럼.

(*저희는 여자 셋이 친구로 나오는 드라마를 꼭 함께 봤습니다. 최근에는 「서른 아홉」을 정답게 마쳤습니다.)

🌸 4월 첫째 주의 장소 : 진해 여좌천

지도를 자주 봅니다. 마냥 멀게만 느껴지던 도시들이 우리 집에서 몇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지 살펴보고는, 가까워서 놀라고 말아요. 이번 주 주말에 다녀온 진해도 그런 곳 가운데 하나였는데요. 수도권에서 사는 게 얼마나 편협하고 무식한지 말해보자면 끝이 없지만요. 저는 진해가 ‘시’인 줄 알았어요. 진해시. 그런데 진해는 ‘창원시’ 안에 있는 ‘구’더라고요. 주말엔 '창원시 진해구'에 다녀왔습니다. 벚꽃이 아름답기로 소문이 자자했기 때문이었는데요.

그 소문은 스무 살의 제게도 흘러와서, 20대 내내 진해 군항제에 가보고 싶다고 3월이 되면 노래를 불렀어요. 그렇지만 진해는 지구 반대편, 어떤 나라의 이름처럼 느껴져서, 가볼 계획을 세울 엄두도 내지 않았어요. 비행기 표 끊고 외국에 가는 게 오히려 쉬웠던 시절이었어요. 이제는 '이웃 나라'라는 말도 사라져버린 것 같은 시절이지만요.

진해는 제가 사는 곳에서 차로 1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요. ‘진해’라는 행정구역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었어요. 동네의 가로수가 온통 벚나무였기 때문이에요. 상가의 간판 속에도 ‘벚꽃’이라는 단어를 가져다 쓴 사업장이 더러 보였어요. 동네 전체가 연한 핑크빛으로 물들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압도적인 크기와 수로 무장한 나무들이 끊임없이 황홀한 펀치를 날려주었어요. 헤실거리며 주차할 곳을 찾아 헤매다가 우연히 한 작은 아파트 단지에 들어섰어요. 너무 고요해서, 벚꽃 파티가 열린 진해구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동네인 것처럼, 그러니까 진짜 '먼 나라'처럼 느껴지는 곳이었어요. 생각해 보면 관광지는 다 이렇지 않나요. 몇 블록만 건너면 어김없이 조용하고, 낙후된 곳이 인사를 건네잖아요. 그리고 종종 그런 보물 같은 곳에 반해버리기도 하고요.

벚꽃을 보겠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지만, 어김없이 핑크빛 나무들로 둘러싸인 곳이었어요. 아파트를 마주한 얕은 천(川)을 끼고 인도(人道)로 사용되는 나무 덱 위에는, 생김새는 물론이고 출처와 역사가 다 다를 것이 분명한 의자 다섯 개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습니다. 아마 아파트 주민들은 분주한 아침이 보내고 나면, 이곳에서 벚꽃 비를 맞으며 해도 쬐고, 수다도 떨며 시간을 죽이겠지요?

그 광경이 마법처럼 눈앞에 그려져서 아무도, 그 어떤 소리도 나지 않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한 아파트 단지를 뱅뱅 둘러 걸었습니다. 벚꽃 축제를 홀로 누린 것 같은 그 기분을 오래오래 잊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면서요.

📚 4월 첫째 주의 책 : 존 버거 『A가 X에게』 열화당, 2009

제가 좋아했던 사람이 존 버거 이야기를 자주 했어요. 인터넷에서 만난 사람이었는데요. 실제로 만난 적은 없어요. 그 사람이 쓴 따뜻한 글을 열심히 읽었고, 설레는 마음으로 댓글을 달곤 했어요. 그 사람도 제 글을 읽어주고, 댓글을 달고, 메시지를 보내줬어요. 추측건대 저보다 나이는 많은 것 같은, 그래서 언니- 하고 부르고 싶은 사람이었는데요. (남동생 둔 K-장녀에겐 언니가 로망인 것 아시지요?) 그래서 존 버거라는 이름이 적힌 책이 보이는 족족 사들였어요. 저는 그때 되게 어렸어요. 책을 읽지는 않았어요. 읽기가 무서웠어요. 왜 무서운지도 몰랐고요.

『A가 X에게』의 포장을 이번 주에 드디어 뜯었지요. 오랫동안 가장 읽고 싶었고, 가장 읽기가 무서웠던 책 중에 하나였어요. 벽돌같이 두꺼운 책보다도, 악명 높은 과학서나 철학서보다도 무서웠어요. 얇은 래핑을 벗기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 줄은 몰랐어요. 읽고 난 후에는 (구)코너스툴의 편안한 책방 사람들과 줌으로 만나 책에 관한 짧은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이 책은 폐쇄된 채 버려진 옛 교도소 73호 감방의 마지막 수감자, 사비에르의 수납칸에서 발견된 편지 뭉치를 옮겨 놓았다는 설명으로 시작해요. 사비에르는 '이중종신형'이라는 끔찍한 형벌을 받고 수감되어, 살아서 풀려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이인데요. 그를 사랑하는 활동가이자 약사인 아이다가 그에게 편지를 꾸준히 보낸 거예요. 둘은 면회도 허락되지 않아서, 편지가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창구였어요. 편지에는 아이다의 일상이 담백하게 담겨있을 뿐인데요. 그들이 나눴던 큰 사랑은 그대로 전해지는 신기한 책이었어요.

어떤 편지 묶음은 끝내 일기가 되는 것 같다고, 뉴스레터를 쓰면서 종종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 책 역시 답장을 볼 수 없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아이다가 사비에르에게 쓴 모든 글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살아가는 한 약사의 일기 뭉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드릴까요? 최근에 친구에게 보낼 편지를 쓰다 말고 잘게 찢어 버렸어요. 다 읽고 나니 편지가 아니라 일기 같아서요. 수신자에 관한 생각을 하는 대신 제 일상만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은 것 같아서요. 좀 시끄러운 사람이 된 것 같아서, 민망해서요. 그렇지만 가끔 제게 답장을 보내주시거나, 댓글을 달아주시는 분들 가운데 "너무 내 이야기만 한 것 같다"라고 적는 분이 많다는 거예요. 글을 받은 저는, 기쁘게 읽었는데 말이죠.

결국 편지를 받는 사람은, 보내는 사람의 평범한 하루나 크고 작은 마음이 궁금한 게 전부라고. 그러니까, 보내는 사람의 일기장 한 페이지를 받고 싶은 거라고 생각했어요. 『A가 X에게』는 아이다의 일기장 한 권을 통째로 받은 거나 다름이 없었어요. 그래서 몇 배로 좋았어요.

존 버거를 좋아하던 '언니'가 이제 어디에서 어떤 글을 쓰는지, 아니, 글을 계속 쓰고 있기는 한 건지, 알 수 없어요. 제가 오래 기억하고 싶은 시절 인연 중 하나인 이유는 그가 따스하고 온화한 사람이었다는 게 확실하기 때문이에요. 만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잖아요. 고르는 단어나, 자주 쓰는 어미 같은 것만 봐도요. 무엇을 카메라로 담는지만 봐도요.

사비에르가 탈출에 성공해 아이다를 만났기를 비는 것만큼, ('언니'를 포함해 잊지 않고 있는) 시절 인연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빌어요. 그 사람들이 나눠준 일기 조각들로 버틴 시간이 분명, 분명히 있었어요.

구독자 님은 한 주 어떻게 보내셨나요?

오늘 편지도 늦어서 죄송해요.
『A가 X에게』를 처음부터 다시 천천히 읽다보니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 버렸더라고요.

앗, 그리고 매주 조금씩 구독자가 늘고 있었는데요. 이번 주에 처음으로 새로운 손님이 없었습니다. 괜히 아쉬운 마음.

혹시 즐겁고 읽고 있으시다면, 좋아하는 친구들에게 뉴스레터 링크를 나눠주시겠어요?

조용히 앉아 적는 한 주간의 기록이, 얼마나 멀리 닿을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2022.04.06.
부산에서, 성은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