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rnertable : 보고 싶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가능성

🎼  남경운 「에코」, 2022

안녕하세요. 구독자 님.

한 주 잘 지내셨나요?

이곳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어요.

동굴 같은 지하의 체육관에서 운동을 마치고 올라왔는데, 바닥이 이미 새카맣게 젖었더라고요.

내리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인지, 커다란 책가방을 멘 아이들이 두 손으로 이마에 처마를 만들고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었어요.

마냥 그치기를 기다릴 수는 없어서, 저도 그 틈에 끼어 비를 홀딱 다 맞았는데요.

비 맞는 일도 무척 오랜만이라서, 재미있더라고요.

꽃잎이 다 떨어지기 전에 마음껏 구경 다닌 것이, 3월을 끝내고 4월을 시작하는 시기에 가장 잘한 일인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내일도 비가 온다고 하던데. 수일 동안 비가 내리고 나면 이제 남은 꽃잎은 별로 없을 것이고, 알록달록하던 풍경이 초록으로 변하겠지요.

👩🏻‍🤝‍👩🏻 4월 둘째 주의 일: 엽서와 택배, 그리고 가족 생각

설 연휴에 친정에 들렀고, 그 이후엔 한 번도 올라가지 않았어요. 2월의 시작에 들렀으니 두 달이 쏜살같이 지나갔네요. 중간에 가려는 계획이 있었는데, 코로나 확진자가 급증하는 시기와 겹쳐서 포기했어요. 3월에는 저도 미미한 코로나 의심 증상이 이어져서 또 포기했고요. 그러다 보니 가족들과는 메시지로, 전화로만 연락을 주고받곤 했는데요.

(뭔갈 줬다 잘 뺏는) 동생이 어느 날, 자신이 예전에 줬던 헤드셋을 보내줄 수 있냐고 했어요. 쓰던 게 고장이 났다고요. 마침 저는 거의 쓰지 않아서 알겠다고 했고요. 당분간 올라갈 계획이 없으니 택배로 보내겠다고 했어요. 택배 속에 헤드셋과 인화해두었던 가족 사진 몇 장을 함께 담았어요. 엄마와 아빠, 그리고 동생에게 각각 엽서도 써서 넣었고요.

각자 가정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시는지요? 저는 가장 말 많고, 까불고, 장난치고, 제멋대로이고, 시끄럽고, 스킨십 많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구성원은 모두 (사랑의 크기와 무관하게) 잘 표현하지 않고, 조용하고, 무뚝뚝한 편이죠. 평생 이들과 같이 살았기 때문에 저 또한 크게 다른 종류의 인간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는 칙칙한 집안에 활력을 불어넣으려고 애를 쓰는 편에 속했는데요.

남성 호르몬이 급격하게 줄어드는 게 분명한 아저씨는 아직 딸이 집에 없다는 사실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는 소식이 들렸어요. (아니, 분가한 지 1년이 지났는데...) 엄마는, 통화할 때 어디냐고 물으면 가끔 홀로 벤치에 앉아 있다고 했고요. 동생은 무언가 필요할 때만 용건을 전하는 연락을 했어요. 아무래도 다들 제가 필요한 게 분명했어요.

말로는 간지러워서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엽서에 적어 보냈는데요. 동생과 아빠는 여느 때처럼 답이 없습니다. 엄마로부터 짧은 답장이 왔어요.

‘엄마는 니가 생각하는 거처럼 그렇게 나약하지 않아~^^’

엄마가 평소에 쓰는 모든 특수문자(~, ^^)가 다 들어가서, 마음이 가벼워졌어요. 엄마가 가볍게, 가벼운 말만 전하고 싶었던 게 분명해서요. 제가 아무래도 작은 엽서에 너무 무거운 걱정을 담았나봐요.

🌸 4월 둘째 주의 장소 : 대저생태공원

30대는 쭉 코로나 시국이었으니(나이가 드러나죠?), 잔디 위에서 시간을 보낸 건 20대뿐이었네요. 대학 교정에서 신문지를 깔고 동기들과 짜장면을 시켜 먹던 장면이나, 편의점에서 산 맥주와 과자로 한강 공원에서 몇 시간은 어렵지 않게 죽이던 날들. 굳이 무거운 기타를 들고 와서 노래를 불러주던 친구 A와, 치킨 배달을 받기 위해 운동화를 꺾어 신고 뛰어가던 친구 B, 하얀 에코백에서 와인을 꺼내던 친구 C, 그리고 흐릿한 화질의 휴대폰 카메라로 얼굴을 모아 찍던 셀카. 전부 어렵지 않게 떠올라요.

그렇지만 이런 시간이 사라졌기 때문에, 한강에서 보자는 약속같은 건 할 수 없기 때문에, 이제 없는 일이라고만 생각했어요. 함께했던 친구들의 지나간 머리 스타일과 옷차림, 돗자리의 무늬, 그리고 기름진 음식들이 다 '지난 일'이라고만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주말에 우연히 이 익숙하고 평화롭던 장면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풀과 사람이 대저생태공원에 가득했어요. 충동적으로 떠난 길이었는데요. 주차를 위해 한참 줄을 서서 거북이처럼 움직이다가 야트막한 언덕을 하나 넘고 나니, 유채꽃이 물 대신 넘실거리는, 노란 바다를 보는듯한 광경이 펼쳐졌어요. 저와 동거인은 소리를 꽥! 질렀답니다. 큰 기대 없이 나선 길이었는데 수확이 엄청났어요. 아직은 강한 봄바람이 부는 터라 유채꽃 무더기가 한들한들 흔들리고 있어서, 지평선이라는 말 대신 수평선이라는 말을 쓰고 싶은 장관이었답니다. 유채꽃 사이사이에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머리는 전부 튀어 오르는 물고기 같았고요.

사람들이 무척 많았지만, 공원의 크기는 그것을 능가하는 사이즈라서, 여유롭게 꽃길을 걸을 수 있었습니다. 걷다 보면 돗자리에 대자로 누워 말없이 책을 읽는 커플이나, 허허벌판 가운데 캠핑 의자를 펴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부모와 아이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와 쑥을 캐는 어머니들을 계속 만날 수 있었어요. 평범한 봄 의식이 이제 가능해지려는 걸까요?

구독자 님도 평범하게, 평범한 봄 보내셨는지요? 아마 그러셨으리라 믿어요.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바꾸는 사람들이 부쩍 많더라고요. ‘업데이트한 친구’ 목록을 보면 온통 꽃 사진뿐이고요. 봄의 좋은 점은 이게 다고, 이 정도로 충분하잖아요.

📚 4월 둘째 주의 책 : 에드거 앨런 포 『도둑맞은 편지』 바다출판사, 2009

구독자 님은 추리나 공포 장르를 좋아하시나요? 저는 초등학교 저학년 이후로 좋아했던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때는 문방구에서 500원이나 1,000원 정도를 내면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책을 팔곤 했는데, 그런 책 표지에는 대부분 ‘오싹오싹’, ‘공포 특급’, 괴담’, ‘빨간 마스크’ 같은 글자가 씌어 있었어요. 왜 그렇게 문방구의 책들을 사 모으고 싶었는지는 모르겠는데, 무튼 굉장히 좋아했던 기억이 납니다. 모서리가 나달나달하게 닳을 때까지 가지고 다니고, 친구들과 돌려봤어요. 하지만 저는 다소 심약한 편이라서, 머리를 감거나 세수할 때마다 자동적으로 재생되는 괴담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고, 자기 전에도 종종 생각이 나서 수면에 방해가 되더라고요. 점차 공포와는 담을 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음의 안정, 중요하니까요.

중, 고등학교 시절에도 친구들은 열심히 공포, 스릴러, 추리 소설을 찾아 읽었던 것 같은데, 저는 취향이 아니라며 피해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이번 주에는 재미있게도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소설을 묶은 『도둑맞은 편지』를 읽었어요.

실은 에드거 앨런 포가 궁금해서가 아니라, 보르헤스가 선집한 세계문학 전집으로 알려진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되게 예쁘지만 품절입니다...)가 집에 있길래 독파해보고 싶었고, 마침 에드거 앨런 포 단편집은 그 전집 시리즈의 1권이었기 때문이었어요(재미없어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다, 이왕 전집을 읽을 거라면 당연히 1권부터 읽는다, 이런 종류의 강박이 있습니다).

싱거운 단편도 있었지만, 마지막 단편인 「함정과 진자」는 인상적이었는데요. 종교재판으로 인해 사형선고를 받은 주인공에게 가해지는 미지의 고문을 그린 이야기에요. 저 또한 수감자이자 고문을 받는 사람의 마음으로, 말 그대로 엄청난 공포를 느끼면서, 오스스한 냉기에 휩싸인 채로 마지막 장을 덮었습니다. 문방구에서 팔던 괴담집을 읽을 때 일어나던 반응이 일어나서, 초등학생이 된 기분을 느꼈지 뭐예요.

오랜만의 공포 체험, 즐거웠습니다.

2권은 공상과학소설의 선구자로 알려진 허버트 조지 웰스의 단편집이라고 해요. 이런 리듬이라면 독파에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아요.

구독자 님은 한 주 어떻게 보내셨나요?

4월도 절반이 지나가려고 해요.

오래 쓴 컴퓨터는 버퍼링이 많이 걸리는 걸 보니, 곧 먼 길 떠나려나 봅니다. 속도가 느려 답답해도 나이 많은 컴퓨터 앞에 자꾸 되더라고요. 남은 4월의 반은, 아직 만 1살이 되지 않은 새 컴퓨터 앞에 앉는 연습을 해보려고 해요. (구독자 님은 차이를 감지하지 못하시겠지만) 다음 주의 편지는 새로운 도구로 써 보겠습니다.

건강한 한 주 보내세요!

2022.04.13.
부산에서, 성은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