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디 서의 사적 리뷰 | "ETA"의 가사를 흥미롭게 보는 이유

🎧 TMI.FM의 DJ 랜디 서 | 대중음악의 여성들은 아티스트로서, 제작자로서 혹은 팬으로서 다양하게 활동합니다. [랜디 서의 사적 리뷰]는 국내외 여성 아티스트의 음악을 소개하고, 거기서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순간을 짚어봅니다. 

노래, 특히 가요는 대개가 1인칭 시점이다. 나의 상황이나 감정을 그대로 읊는 것처럼 들리게끔 말이다. 그래서 대중 문화의 여러 미디엄 중에도 가요는 특히나 부르는 사람의 직접 발화인 것처럼 들리고, 향유자의 마음에 직접 와닿는다. 어떤 작품은 픽션일 수도 있다. 어떤 작품은 실화에 기반한 노래이더라도 미리 만들어진 이상 부르는 순간마다 그 때의 진실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듣는 이는 노랫말을 마치 화자의 진심처럼 느낀다. 우리가 은연 중에 느끼는 대중 가요의 보편 문법이다.

뉴진스의 새 EP [Get Up]은 총 세 곡을 타이틀곡 삼아 프로모션 중인데, 이중 ‘ETA’의 가사가 흥미롭다. 이 곡은 정식 발매 이전 7월 1일에 뉴진스의 팬미팅 [Bunnies Camp]에서 처음으로 공개 되었고, 온라인에 그날로 ‘직캠’이 풀려 신보의 기대감을 모으는 역할을 했다. 작사에는 래퍼 빈지노가 그의 본명 Sungbeen Lim으로 참여했고, 이전에도 뉴진스의 많은 곡에 가사를 담당한 Gigi, 그리고 원 작곡자 Ylva Dimberg가 함께 했다.

전주부터 알람 같은 브라스 신스가 쏟아진다. 전작 ‘Ditto’부터 볼티모어 클럽이나 저지 클럽 등 2000년대 미국 동부에서 발생한 클럽 사운드를 참고했다고 했는데, ‘ETA’의 브라스 사운드는 아마 볼티모어 클럽 유명곡 ‘Samir’s Theme’을 본딴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이다. 사실 국내 가요 신에서 이렇게 빽빽 거리는 브라스 기용이 처음은 아니다. 2010년대 케이팝이 2000년대의 팀발랜드 스타일 팝을 들여올 때에 트리플렛 리듬의 브라스 모티프를 쓰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그 시대 사운드는 저런 악기에 주로 쨍한 ‘쌩목’ 보컬이 매칭 되었고, 때에 따라 오토튠도 즐겨 쓰였다. 걸그룹 곡으로는 애프터스쿨의 'Diva'나 포미닛의 'Muzik' 같은 곡이 있다. 그러나 'ETA'는 희한하게도 그 뒤에 울적한 표정의 코드 진행이 패드로 뭉글하게 깔리고, 위엔 힘을 뺀 보컬이 얹혀 2010년대의 케이팝과는 전혀 다른 무드를 만든다. 정신 없이 울리는 호른의 알람과 달리는 브레이크 비트에도 노래는 묘하게 애상적이고 우울한 분위기를 낸다.

가사는 상황을 제시한다. 친구의 남자친구가 바람을 피우는 장면을 목격한 화자가 친구에게 이를 이르는 내용이다. ‘너 어디야, 언제 도착해 (What’s your ETA)’ 하고 재촉한다. 보통 1인칭으로 나를 말하는 가요의 가사에서는 말하는 “나”와 듣는 “너” 이렇게 1인과 2인만이 상정 되지만, ‘ETA’는 화자가 사건의 제3자이다. 보통 가요 가사에 핍진성을 더 하는 트릭이라면 특정 지명 같은 고유 명사를 등장 시키는 것이 있는데, ‘ETA’ 역시 ‘혜진이가 엄청 혼났던 그 날 / 지원이가 여친이랑 헤어진 그 날’처럼 고유 명사인 친구들 이름을 등장 시켜 핍진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가 누구를 지칭하는 이름은 아니다. 가상의 친구들을 묘사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게도 붕 뜬 유리감을 준다. 특히나 뉴진스의 소속사 하이브의 다른 레이블들을 보거든 팀 멤버가 직접 가사를 쓰거나 제작 단계에서 멤버들을 인터뷰 해 노래 속에 멤버들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는 시도를 꾸준히 해왔는데 반해, 뉴진스의 ‘ETA’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연극적이다.

독특한 감각을 자아내는 지점은 화자가 플러팅하는 남자의 말을 옮기는 부분이다.

뉴진스는 남자애의 흉내를 내어 느끼하거나 우스꽝스럽게 부르지 않는다. 원래의 자기 목소리 그대로 애틋하게 부른다. 여기에 집중하면 가사의 장면 맥락을 알고 있음에도 묘하게 화자인 뉴진스가 1인칭으로 자기 마음을 속삭이는 것처럼 들린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기대하는 가요의 가사가 1인칭이기에, 하니가 ‘Heard him say:’ 하고 한 번 끊어준 뒤에는 가사가 무심코 1인칭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사랑을 속삭이고 있는 것은 곧 화자가 된다. 본래 후렴은 노래에서 중심이 되는 부분이다. 가사 역시 노래의 주제가 될 만한 라인이 자리한다. 그래서 더 그렇게 들린다. 김동률의 ‘사랑한다는 말’ 속 “친구의 얘기처럼 돌려 한 말”이라는 가사처럼 말이다.

아이돌로지 편집위원 스큅은 트위터의 본인 계정에 “ETA는 아무리 생각해도 화자가 다그치고 있는 (아마도 여성일) 친구를 좋아하고 있는 걸로 해석해야 곡이 완성되는 것 같다. 이 편이 퍼포머의 존재가 개입된 해석이자, 우울하게까지 들리는 곡과 가창의 복잡미묘한 감성을 집어낼 수 있는 해석”이라고 말했는데,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코러스 후반에서는 수선스럽게 ‘언제 도착해 (What’s your ETA)’를 외치지만, 전반에서 말한 사랑 고백의 잔상이 여전히 남아있다.

그간 케이팝에 이렇게 제3자가 등장하는 가사가 종종 있었다. 걸그룹 노래에는 주로 ‘걸 토크’를 위시해 나왔던 편이다. 좋아하는 남자애 이야기를 소란스럽게 나누는 소녀들이라는 클리셰의 수행이었다. AOA의 ‘심쿵해’나 소녀시대의 ‘I Got A Boy’ 같은 곡이 그 예다. 

한편 이런 가사는 음악적인 무드에 따라 표면적 내용 뿐만 아닌 묘한 분위기로 연결 되기도 한다. 에프엑스의 ’NU ABO’는 친한 언니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며 고민 상담 하는 내용이지만, 소녀시대의 동생 그룹인 이들에게 “언니 팬”이 슬슬 모이기 시작한 시점에 내놓은 가사라 생각하면 가사에 ‘언니’가 등장한 자체가 하나의 어필 포인트처럼 느껴진다.

브라운아이드걸스의 ‘Cleansing Cream’은 한발 더 나아간다. 언니에게 이별의 슬픔으로 고민 상담을 하는 내용이라지만, 예민한 감정선이나 자매 간의 위태로운 분위기를 담아낸 뮤직비디오와 함께 들으면 화자가 사랑하는 사람은 ‘언니’가 아닐까 싶은 인상을 남긴다. ‘걸 토크’의 주제가 남자 고민 뿐이라니 벡델 테스트 탈락감이지만, 그런 중에도 변화구와 같은 시도들이 있었다는 얘기다.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든 그저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그렇게 해석했을 가능성도 있다.

대중 문화에서 퀴어들이 유명 작품을 퀴어적 시선으로 해석하며 이룬 서브컬쳐는 역사가 길다. 최근에도 많이 보인다. 예를 들어 싱어송라이터 테일러 스위프트는 이성과 공개 연애 하는 모습을 여러 번 보인 셀럽이지만, 어떤 팬들은 그런 그의 노래들에서도 퀴어 연애의 설렘이나 삶의 아픔 등을 읽어낸다. 아예 테일러 스위프트 본인이 성소수자는 아닐까 기대하는 팬들도 적지 않다. 'Gaylor(Gay + Taylor)'라는 말까지 만들어내며 제법 큰 지지를 받고 있는 팬 가설(fan theory)이다.

[해리 포터] 시리즈 역시 지금은 작가인 조앤 K. 롤링의 약자 혐오적 행보 때문에 빛이 바랬다지만, 양육자에게 학대 당하고 사회로부터 숨어야만 하는 특별한 사연의 주인공이 퀴어 팬들에게 많은 공감을 샀다. 이런 퀴어적 해석은 작품을 읽는 여러 방식 중에 하나를 추가하며 문화를 보다 풍성하게 한다.

다시 ‘ETA’로 돌아와, 화자가 통화하는 여자 친구를 좋아한다고 해석하면, 연극의 한 장면 같았던 이 노래는 그 어떤 곡보다 내밀하게 느껴진다. 패드 신스의 우울한 화성 연주와 안쓰러움이 묻어나는 보컬 가창이 화자의 태도처럼 들린다. 이 패드 신스는 작은 음량의 휴대폰 스피커로만 들으면 브라스 신스나 브레이크비트에 묻혀서 잘 들리지 않는다. 이어폰을 끼면 더 잘 들린다는 점이 더 비밀스러운 속마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해석을 간직한 채로 EP의 다음 트랙 ‘Cool With You’를 들으면 곡의 서글픔이 배가 된다.

실은 가사를 맨 마지막까지 들어보면 친구에게 ‘Lose that boy in her arm’이라고 했던 화자는 ‘Need a boy on my arm / Want a boy on my arm / Need you boy on my arm’이라고 말을 바꾼다. 이걸 들으면 어쩌면 화자는 친구와 그의 남자친구 사이를 이간질 해서 그 남자애를 차지하려는 악한 속셈이 있었을 수도 있다. 박지윤의 ‘Steal Away’에서 ‘네 남자친구 내가 뺏었어’ 라며 “악녀”를 연기했던 화자가 노래의 맨 끝에 ‘(이게) 내가 헤어진 이유’라고 읊조리는 반전이 있었던 것처럼. 이 부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위에 풀어놓은 퀴어적 해석은 그저 오해였을 수 있다. 

돌고래유괴단의 신우석 감독이 담당한 뮤직비디오는 화자 뉴진스와 통화한 여자친구 에바(Eva)가 남자친구를 차로 치어 죽이는 장면, 그리고 그가 바람을 피우는 모습은 사실이 아니라 에바의 망상이었다는 내용을 담았다. 감독의 의도는 최근 그가 소셜미디어 DM으로 온 문의에 답한 내용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전파 되며 어느 정도 드러났다. 그가 의도한 ‘ETA’ 뮤직비디오의 주제는 경각 없이 소문을 옮기는 행위의 위험성과 그에 따른 파국적 결과다.

신우석의 해석에 의하면 ‘ETA’는 반드시 연극이어야만 한다. 화자 뉴진스가 헛소문을 퍼뜨리는 악행을 했다는, 그 결과로 끔찍한 결과를 맞았다는 현대판 우화가 되려면 말이다.

이 접근도 흥미롭지만, 나는 그 위에 적은 퀴어적 해석이 더 마음에 든다. 작가의 의도는 아닐지라도 말이다.

요즘 뉴진스에 대한 이런 평이 여럿 보인다. 그들이 게임 체인저인 이유는 이들이 개개인의 캐릭터성을 부각 시켜 팬들의 ‘과몰입’을 유도하는 아이돌이기보다는 팀 자체를 브랜드화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의 이런 생각은 어쩌면 ‘과몰입’할 틈을 좀처럼 만들어놓지 않은 서늘한 작품에 억지로 기존 케이팝 같은 해석을 시도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애초에 퀴어적 서사는 많은 경우 드러나있기 보다는 아는 사람만 알아보게 숨겨져 있다. 그래서 이렇게 표면을 긁어 창의성을 발휘해보는 것에도 나름의 타당성이 있다 주장해본다. 이 역시 케이팝의 맛을 다방면으로 즐기는 방식이다.

패드 신스와 보컬의 말투에 더 집중하는 이 해석은 화자를 제3자가 아닌 이야기의 1인칭 주인공, 그것도 애틋한 짝사랑의 비밀을 간직한 소녀로 만든다. 내가 음악을 들을 때 워낙 화음이 그러내는 색채감이나 가창의 톤, 느낌에 더 귀를 기울이는 타입의 청자라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직까지는 인물을 1인칭으로 놓고 독해하는 고전적 가요 문법을 고집하는 사람이라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나는 이 편이 즐겁다. 글자로 쓰인 가사만 곧이 읽을 때는 발견할 수 없을, 음악으로 쓰인 감정의 암호를 읽어내는 기분이 든다. 🎧 DJ 랜디 서 대중음악 해설가 | rndy.s.music@gmail.com 

📻 뉴진스 - ETA | 2023

"EVA, 저거 좀 봐." "말도 안돼." "네 남친 아냐?" "야 빨리 좀 와!" "어머머. 쟤네 좀 봐." "야 네 남친 맞지?" "맞다니까!" "우리 공연하러 가야 돼." "그래 그래 전화할게! 다시 전화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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