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경의 핫 아메리카노 | 미국 드라마 황금기, 드디어 막을 내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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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경(Janis Hong): 한국에서 영화 잡지 기자로 일하며 각종 영화계 대소사를 기록하다가 미국 뉴욕으로 이주. 그곳에서도 계속 영화 및 각종 팝컬처와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영어권 음악만 듣던 팝 덕후가 뒤늦게 미국에서 케이팝 팬으로 거듭났고, 최근에는 [기생충] [미나리] [오징어 게임] 등의 작품 덕에 한국과 미국의 접점에 집중하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 북미주재원으로도 활동 중. 

미국 미디어 생태계를 관통하는 용어와 함께 첫인사를 드립니다. 미국에 오기 전부터 미국 영화와 드라마에 빠져 살다가 정작 미국에 와서는 ‘미드’뿐 아니라 ‘한드’도 부지런히 챙겨보고 있는 콘텐츠 소비자입니다. 제가 미국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왕좌의 게임]이 3부작 영화로 기획되었다가 모두 거절당해 드라마로 만들게 되었다는 인터뷰를 읽었는데 이제는 스핀오프인 [하우스 오브 드래곤]을 보고 있네요. 격세지감입니다. 😅

오늘 소개할 용어는 ‘피크 TV(Peak TV)’입니다. 미국 미디어 업계에서 흔히 사용되는 관용어로 TV 드라마 제작 붐을 반영한 용어입니다. 영화급 영상과 내러티브를 보여주는 미국 드라마의 황금기를 뜻하는 용어라고 보면 됩니다.

[브레이킹 배드]와 [왕좌의 게임]이 휩쓸었던 2010년대로 시기를 국한하는 이도 있고, 시작 시점을 [소프라노스]가 등장한 1999년부터로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 2013년 넷플릭스가 [하우스 오브 카드]를 성공리에 런칭하면서 OTT 오리지널 시대를 열었다는 입장도 있죠.  2022년에도 여전히 이 용어는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드라마 제작편수는 나날이 증가해서 매년 ‘산 봉우리(peak)’를 갱신하고 있기 때문이죠.    

TV 시장의 '피크'는 언제일까?

2015년, 미국 케이블 채널 FX 회장 존 랜드그래프가 ‘피크 TV(Peak TV)’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여러 채널에서 역대급 시리즈가 쏟아지면서 TV 황금기라고 불렀던 시기에 그는 ‘피크 TV가 끝나가고 있다’며 우려를 표명했죠. 그해 422여 편의 성인 대상 대본 드라마가 만들어졌는데 그 숫자가 최고점이라 생각한 겁니다. 수요를 훨씬 웃도는 과잉 공급 상태라 판단했겠죠.

그러나 이후 최고점은 더 높아져만 갔습니다. 2021년은 새로운 최고점을 기록했습니다. 미드 제작편수는 2019년의 532편에서 2021년의 599편으로 늘어났죠. 팬데믹 동안 리모트 업무만 하고 있는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모두 드라마만 만들고 있었나 봅니다. 지금도 여전히 FX 회장인 존 랜드그래프는 얼마전 ‘텔레비전 비평가 협회’ 기자 모임에서 “2022년이 최고점이 될 것이다. ‘피크 TV’의 꼭대기를 기록할 것이다’라고 과거 예언을 정정했습니다. 2022년을 기점으로 제작 편수가 감소할 거란 의미죠. 

근거가 없는 예측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작년부터 미국 언론에서는 ‘피크 TV 시대는 끝났다’는 논조의 칼럼이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프라임타임 에미상을 앞두고 이 유례없는 TV 드라마의 시대가 지속될지 아닐지 모든 논거를 동원해 근미래를 예측하느라 바쁩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제작 편수는 성인용 미국 드라마가 통계 대상이기에 [오징어 게임]같은 글로벌 드라마는 제외되어 있습니다. 30분 내외의 시트콤이나 다큐멘터리도 포함되지 않습니다. 이 모든 작품을 포함한다면 1년에 제작되는 컨텐츠의 수는 어마어마하겠죠. 넷플릭스를 열 때마다 쌓여가는 컨텐츠에 밀린 숙제 대하듯 피로감이 몰려온다는 사람들의 한숨도 납득이 갑니다. 하지만 현재 상황을 볼 때 이런 선택 장애 고민이 추억이 될 날이 멀지 않아 보입니다.

2022년은 거대 배급사 기반 스트리밍 플랫폼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는 해입니다. 디즈니는 훌루(한국에선 ‘스타’)와 디즈니플러스, ESPN플러스 등 모든 스트리밍 플랫폼을 합해 전세계 구독자 수 2억 명에 도달했습니다. 전세계 2억 2천만 이상의 구독자 수로 1위를 지키고 있는 넷플릭스를 부지런히 뒤쫓고 있죠. 2022년 2분기 기준 미국내 HBO와 HBO맥스를 합한 구독자 수는 9210만 명이고 늦게 진입한 파라마운트플러스는 4330만, 피콕은 2700만입니다. 아마존 프라임 고객에게 무료로 제공되는 프라임 비디오 또한 구독자 수가 2억 명을 넘어가죠. 공중파와 케이블TV, OTT가 모두 오리지널 제작에 나서면서 제작 편수는 급증했고, 팬데믹 시기 동안 스트리밍 시청 문화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 다음은 무엇일까요? 재미있는 컨텐츠를 더 많이 만들어 구독자 뺏어오기 경쟁을 해야하는 걸까요? 지금같은 제작 편수가 유지된다면 수치상으로 ‘피크 TV’ 시기는 계속될 것입니다. 하지만 ‘피크 TV’는 점점  TV 드라마가 컨텐츠 세상을 지배한다는 의미의 상징적 용어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할리우드는 더이상 ‘영화’만 만드는 공장이 아닙니다. 할리우드 인력이 대거 TV로 이동했죠. 한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오징어 게임] [D.P.] [수리남] [미스터 브레인] 등 창작자들에게 영화와 TV의 경계는 점점 흐려지고 있습니다.  

윈터 이즈 커밍: 비용 조정의 시대가 온다

‘피크 TV’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고 주장하는 측은 각 OTT 기업이 비용 조정에 들어갔다는 데 주목합니다. 구독 모델로 더이상 수익 창출이 힘든 가운데 광고가 대안으로 떠올랐습니다. 2022년 상반기에 넷플릭스와 디즈니 둘다 광고가 포함된 플랜을 준비한다고 발표했습니다.

디즈니는 지난 실적 발표에서 12월부터 광고를 보지 않으려면 현재 구독료에서 3달러를 더 지불해야 한다는 광고 미포함 플랜을 공개했습니다. 넷플릭스는 광고 플랜을 위해 마이크로소프트 팀과 손을 잡았다고 발표했지만 플랜의 시행 날짜는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과연 광고는 TV 제작 편수 유지에 득이 될까요, 실이 될까요? 

광고로 계산기를 두드리기 이전에, 각 플랫폼의 예산 재정비가 ‘피크 TV’ 트렌드에 이미 가시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블룸버그’는 피크 TV 시대가 끝나고 긴축재정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경기불황과 인플레이션을 우려하면서 제작비 감축에 들어갔고 이는 잇달은 드라마 취소 사태를 낳고 있습니다. 드라마 역사상 최고 제작비가 들어간 아마존 프라임의  [반지의 제왕: 힘의 반지]같은 프로젝트를 앞으로는 만들지 못할 거라고 합니다. (물론 현재 인기가 치솟고 있어 입장이 달라질 수도 있겠죠)

워너브러더스 디스커버리는 후반 작업 중인 [배트걸] 제작을 중단하며 극장에서도 HBO 플랫폼에서도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했어요. 더불어 HBO맥스는 공개되지 한 달도 안 된 시점에서  [고디타 크로니클( Gordita Chronicles)] 추가 시즌 제작을 취소하며 “단기적으로 라이브 액션 어린이 가족 프로그래밍에 집중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린이 드라마 타켓층과 HBO맥스 구독차 층이 매치하지 않는다는 의미겠죠.

넷플릭스는 올해 1분기 실적 발표 후에 영국 해리 왕자의 아내 메건 마클이 관여한 애니메이션 제작을 취소한다고 발표했죠. 제작에 관여한 스타 이름만 보고 투자를 하던 시기도 끝나고 더 철저한 검증을 거쳐서 제작을 확정짓는 시대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TV 드라마는 여전히 중요한 컨텐츠일 테지만 현재와 같은 제작 편수가 지속되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미국 드라마 시장이 정점에 달했기 때문일까요? 이번 프라임 에미상 후보진은 여느 때보다 훌륭했습니다. 한국 드라마로는 최초로 에미상 6개 부문을 수상했을 뿐만 아니라 비영어권 작품으로도 최초로 감독상(황동혁)과 남우주연상(이정재)을 수상한 [오징어 게임]은 물론, 넷플릭스의 [기묘한 이야기] [오자크] [베터 콜 사울], HBO의 [석세션] [배리] [유포리아] [화이트 로터스] [나의 직장상사는 코미디언], 훌루의 [돕식: 약물의 늪] [아파트 이웃이 수상해], 애플의 [세브란스: 단절] [테드 래쏘], 파라마운트플러스의 [옐로우 재킷] 등 여러 플랫폼에서 야심차게 만든 수작들이 넘쳐났습니다.

앞선 블룸버그 기사는 “할리우드 기차는 계속 움직이고 있지만 브레이크 밟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라는 문장으로 끝납니다. 제작에 투자를 아끼지 않던 미국의 피크 TV 시대가 드디어 막을 내릴지 몰라도 수작 드라마 발굴은 계속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한국에도 '피크 TV'가 올까? 

어쩌면 이제 미국에 이어 한국이 ‘피크 TV’ 현상을 이어받고 있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디를 가든 넷플릭스만 켜면 그 어디보다 한국 드라마를 많이 만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적어도 미국에서는, 넷플릭스를 제외한 다른 플랫폼에서는 한국 드라마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디즈니플러스가 공개한 [그리드]나 [빅마우스]같은 작품도 미국에선 제공되지 않습니다. CJ엔터테인먼트와 제휴하는 파라마운트플러스는 이준익 감독의 [욘더]부터 한국 콘텐츠를 배급합니다. 

얼마 전 멕시코시티 여행을 갔다가 호텔 계정을 통해 잠깐 넷플릭스에 접속했던 일이 있었어요. 이전의 다른 게스트가 보던 드라마가 떴는데,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였죠. 당시 이 작품이 멕시코 비영어권 드라마 1위를 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때 처음으로 그 인기를 목격한 듯 했습니다. 과연 우리는 지금 한국 드라마의 황금기를 경험하고 있는 중일까요? 기승전 ‘한드’가 되어버렸지만 ‘피크 TV’는 비단 미국에서만 벌어진 현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 홍수경 janis.ho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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