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디 서의 사적 리뷰 | 이들은 다른 곳에 전선(戰線)을 긋는다

TMI.FM의 DJ 랜디 서 | 대중음악은 언제나 세상의 단면을 반영합니다. 특히 이 분야의 여성들은 아티스트로서, 제작자로서 혹은 팬으로서 다층적인 생각의 지점을 건드리곤 합니다. [랜디 서의 사적 리뷰]는 국내외 여성 아티스트의 음악을 소개하고, 거기서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순간을 짚어봅니다. 📻

케이팝 신(scene)은 걸그룹 강세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10월 17일에는 그룹 (여자)아이들과 르세라핌이 동시에 컴백하며 인상적인 활동을 보여줬다. 타이틀곡 "Nxde"를 내세운 (여자)아이들의 다섯 번째 미니앨범 [I Love]는 데뷔 이래 가장 많은 음반 판매량을 올렸음은 물론, 국내 주요 음원 사이트의 주간 차트, 그리고 케이블과 공중파 음악 프로에서 모두 1위에 오르는 ‘올킬’ 기록을 수립했다. "ANTIFRAGILE"이 실린 동명의 르세라핌 두 번째 미니앨범은 60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렸고, KBS [뮤직뱅크]에서 2주 연속 1위에 올랐다. 두 팀 모두 뜨거운 활약을 보여준 10월이었다.

애쓰지 않는 쿨함(Effortlessly cool)

세대 구분법이란 것이 참 애매하긴 한데, 두 팀은 대체로 4세대 케이팝 그룹이라 불린다. 4세대의 시작점이 어디인지 아직도 분분한 이유에는 3세대 대표 아티스트들, 예를 들면 2013년 데뷔한 방탄소년단이나 2016년 데뷔한 블랙핑크 등이 한국을 넘어 세계에서까지 사랑 받으며 케이팝 아이돌의 수명이 유래없이 연장되었고, 심지어 건재하기 때문도 있다. 세대를 묶는 기준에는 연도나 당대의 시대정신 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내게는 4세대의 특징 중에 ‘애쓰지 않는 쿨함(Effortlessly cool)’이 가장 눈에 띈다.

시초는 3세대의 블랙핑크였다고 볼 수도 있겠다. 4세대는 대체로 ‘타고 나길 멋지고 예쁜 나’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무심한 자세로 메타버스 속을 활보하는 전사 에스파, 날 때부터 ‘공주님’이었을 것만 같은 나르시시즘의 아이브, 그리고 공들였을 것이 분명하나 그렇게 보이지 않는 세련된 마감의 뉴진스까지.

4세대 아이돌, 특히 여성 아이돌은 물 위의 백조처럼 우아하게 대중 앞에 선보여진다. 거듭된 오디션 프로(엠넷 [프로듀스] 시리즈 등)로 인해 절박한 아이돌(연습생) 서사가 끝의 끝까지 소진되어서일지도, 혹은 2년 간의 팬데믹으로 모두가 피로한 끝에 이제는 좀 더 편안한 것을 추구해서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자)아이들과 르세라핌은 4세대 중에 조금 튀는 존재다. 이들에게는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 있다. ‘애쓰지 않는 나’보다는 ‘애쓰고 부수며 나아가는 나’를 보여주고 있다. 걸그룹 성공기에 ‘언더독’ 서사가 처음은 아니다. 2세대의 카라 등은 일명 ‘짠내’ 나는 무명 시절을 거쳐 마침내 인기가도에 올랐다. 그러나 이때는 그들의 고생스러운 서사가 음악에 바로 반영되지는 않았다. 노래와 콘셉트는 일관되이 사랑스럽거나(‘Pretty Girl’ 등) 모험 만화처럼(‘루팡’ 등) 기획 되었다. (해체설 이후 첫 컴백이었던 ‘STEP’ 정도가 예외였다) 이들의 근성을 알아본 것은 주로 팬들이었고, 그보다는 먼 대중은 안쓰러워서 응원하고픈 친근한 아이돌 정도로 여겼다. 반면 4세대의 (여자)아이들이나 르세라핌은 넘어서고자 하는 도전 과제를 음악 속에서 적극적으로 호명한다.

(여자)아이들의 경우, 리더 전소연이 데뷔 전 출연한 [프로듀스 101]을 비롯해 아이돌 연습생 래퍼로 나간 [언프리티 랩스타 3], 그리고 팀으로 출연해 데뷔부터 이어지던 상승세에 확실한 박차를 가한 [퀸덤] 등, 2010년대 케이블 채널 엠넷이 벌린 각종 음악 서바이벌 판을 십분 활용하여 끊임없이 자신들을 증명해왔다. 힙합 아이돌, 또 셀프 프로듀싱 아이돌은 퍼포먼스 뿐만 아니라 작사 작곡, 기획과 창작까지 평가의 대상이 되는 쉽지 않은 자리다. 더군다나 주체가 여성이라면 도덕적 잣대에서 좀 더 혹독한 평가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타격을 입었을 때 커리어에 완충이 될만한 안전망, 곧 로열한 팬덤이 보이그룹보다 적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여자)아이들은 이런 조건을 실시간으로 뛰어넘으며 성장해왔다. 지금은 ‘서낳괴(서바이벌이 낳은 괴물)’ 전소연을 비롯해 민니와 우기 등 한국어가 모국어가 아닌 멤버들까지 작사와 작곡으로 음반에 참여하고 있다. 트랙마다 만들고 부른 각자의 개성과 에너지가 흘러넘치는 이들 음반은 외부에서 곡을 수급해오는 일반적인 제작 방식에서는 보기 어려운 다이내믹이 있다. 방탄소년단의 초기 음반이나 최근 미국 빌보드200 앨범 차트에서 호성적을 낸 스트레이키즈 등이 떠오르기도 한다.

르세라핌도 만만치 않다. 사쿠라의 경우 미래가 보장되다시피 한 일본 탑 아이돌의 입지를 뒤로 하고 한국으로 건너와 케이팝 신인으로 재데뷔했다. 가슴이 뛰는 일을 따라 프로페셔널 발레를 그만 두고 케이팝에 뛰어든 카즈하도 큰 도전을 한 경우다. 허윤진은 [프로듀스 48]에서 일명 ‘악마의 편집’으로 인해 ‘욕심 많은 여자애’라는 이미지를 뒤집어쓰고 데뷔 기회 밖으로 밀려난 바 있었으나, 이제는 욕심을 비롯한 자기 감정을 아예 가사로 쓰고 부르는 가수가 되었다. 데뷔곡 "FEARLESS"와 이번 타이틀 "ANTIFRAGILE" 모두 최정상에 오르겠다는 야심을 숨기지 않는다.

물론 두 팀은 각각 큐브와 쏘스뮤직이라는 중견 기획사의 차세대 그룹으로 회사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점에서 이전 세대의 ‘언더독’과는 차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들은 과거 같으면 아이돌로서 약점으로 비쳤을지 모를 인생 서사들을 오히려 전면에 내세워 강점으로 승화 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4세대 특유의 여유 있는 이미지와는 다른 지점을 공략한다. 3세대의 유산이라 할 만한 허슬(Hustle), 또는 ‘독기’를 지닌 팀들이다.

케이팝의 장벽은 낮다

두 팀 모두 신곡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동시에 비판도 있었다. (여자)아이들에는 란제리룩 콘셉트가 곡의 메시지를 가린다는 지적, 르세라핌에 대해선 멤버들의 마른 몸이 강한 여성을 표방하는 기조와 상충된다는 지적 등이 보였다.

두 가지 시선 모두 외모의 도덕률에 대한 생각들이다. 어떤 복장이 남 보기에 바람직하거나 불온한가. 어떤 몸이 강함에 대한 설득력을 높이거나 혹은 떨어뜨리나. 혹은 그런 평가 자체가 온당한가. 어떤 외모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충분한 모범이 되는가. 명제의 옳고 그름을 떠나 한번 생각해볼 만한 주제이긴 하다.

그러나 걸그룹은 이렇게 주제 의식이 형형한 음악을 들고 나올 때조차 결국 가장 뜨거운 심판대에는 '외모'가 주제로 오른다. 그만큼 케이팝의 향유자가 눈에 보이는 요소들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반증일 것이다. 화려한 비주얼은 케이팝이 유튜브와 틱톡 등 현재의 영상 중심 미디어 생태계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한 결정적 요인이지만, 그게 전부라 치부하기엔 작품의 다른 영역들을 그냥 흘려보내기가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여자)아이들의 "Nxde"는 마릴린 먼로의 일생에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마침 9월 중 넷플릭스에 공개된 마릴린 먼로 전기 영화 [블론드]가 먼로의 일생을 무례하고 관음적으로 다루어 지탄 받은지 한 달여가 된 시점에 나왔다. 곡이 쓰여진 시점은 영화 공개보다 선행했던 것 같다. 분명한 것은, 적어도 (여자)아이들과 전소연은 넷플릭스 대형 영화의 감독보다는 마릴린 먼로를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있다.

작품은 약간의 비유와 상징, 아이러니로 구성 되어있다. 복잡한 층위는 아니지만, 곡의 의도된 ‘어그로’는 온라인 곳곳에서 오독을 낳았다. 그 오독까지 작품의 일부로 계획 되어 보인다-예를 들면 검색 엔진에서 더 이상 여자 누드 이미지를 검색할 수 없다며 분노하는 단순한 인간상이라든지 말이다. (박찬욱의 2016년작 [아가씨]가 웹 검색 결과에 미친 ‘정화 현상’의 영향과 비슷하다)

어떤 감상자들은 마릴린 먼로나 뱅크시 등 아이코닉한 이름들을 소환하면서도 예술적으로 충분히 복잡하지 않다며 그저 '가요'로 보기도 했다. 발화자의 아비투스가 살짝 엿보이는 이런 반응은, 아마도 후자의 감상자들은 전자 같은 인간상과 결코 섞일 일이 없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한다. 그리고 케이팝은 그 모든 스펙트럼 위의 청자들과 만나는 낮은 장벽의 예술이다.

르세라핌의 ‘ANTIFRAGILE’을 들으면서는 방탄소년단의 "Mic Drop"을 여러 번 떠올렸다. 위버스매거진 퍼스트뷰에 보낸 르세라핌의 "ANTIFRAGILE" 리뷰에서는 “프리지안 모드 리프(초반의 “Anti ti ti ti fragile fragile” 뒤에 반복되는 ‘고대 문명 발상지 음악 같은 신비한’ 선율), 크레딧에 보이는 빅히트 뮤직 프로듀서 슈프림 보이, 가창자의 실제 서사와 밀착된 가사 등”을 이유로 꼽았다.

"Mic Drop"은 ‘흙수저’라 모욕 받던 힙합 아이돌이 힙합 아이돌로서 보여줄 수 있는 극한을 보여준, 케이팝 인정 투쟁의 하이라이트 모먼트이자 대중 예술의 야심작이었다. ‘ANTIFRAGILE’은 이와 비슷한 길을 간다. 멤버들은 비난의 목소리를 담은 가사에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는다. 중간중간 들리는 오케스트라 힛 소리가 펀치에 맞춰 짜릿한 타격감을 선사한다.

이들은 다른 곳에 전선(戰線)을 긋는다

‘애들 유희’, ‘진정한 가수’가 될 수 없는 존재. 케이팝 아이돌은 청소년이 성인을 대상으로 분함을 삼키며 안간힘 쓰듯 인정을 얻기 위해 투쟁 해왔다. 공감하지 못 하는 사람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허황된 분투였을지 모르나, 어차피 어느 나라를 보든 대중 음악 속 청춘들의 저항은 분명한 대상이 있든 없든 큰 상관이 없었다. 다만 그 에너지가 보는 사람을 빨아들이고, 같은 마음인 젊은이들이 음악에 자기 마음을 해갈해가며 함께 한 시대를 살 뿐이다.

(여자)아이들의 노래도, 르세라핌의 노래도 모두를 만족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대중 음악이 쉽게, 둥글게, 누구의 신경도 거스르지 않으며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오만한 작품이었을 것이고, 또 겨우 이정도로 크래프트맨십 혹은 의식 있는 창작자임을 주장하냐고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부족한 작품이었을 것이다. 그런 주관과 비판이 전부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 작품은 그런 기준과는 다른 곳에 전선을 긋는다. 그리고 그 선 앞에서만큼은 멋지고 통렬하게 싸우고 있다. 그들이 굳이 쉬운 전선을 골랐다며 폄하하고 싶지는 않다.

‘Nxde’의 뮤직비디오에는 뱅크시의 ‘풍선과 소녀’를 오마주한 장면이 있다. 이 회화 작품은 2018년 소더비 경매장에서 낙찰과 동시에 스스로 절반을 파쇄해버린 문제작이다. 작품이 감상자(혹은 소비자)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작품이 완성되어 손을 떠난 순간부터 작가는 대개 대꾸할 수 없다. 작품을 벗어나 감상에 개입하고 싶어하는 작가는 촌스럽다는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수용하는 대중 측이 선의의 접근을 할 의도가 현저히 부족한 상황이라면, 작가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섹스심볼로 고정된 이미지로 평생을 뒤챈 마릴린 먼로에 뱅크시의 반격을 함께 묶어, (여자)아이들은 먼로를 위로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반격의 서막을 알린다. 분명 흥겨운 노래인데도 “꼴이 볼품없대도, 망가진다 해도 / 다신 사랑받지 못한대도”에서는 비장미가 읽힌다.

‘ANTIFRAGILE’도 비슷하다. 뮤직비디오 속 르세라핌은 지구와 충돌하는 운석에 직격타를 맞고도 툭툭 털고 일어나 재와 연기 속에서 정면을 노려본다. 정상을 간절히 바라는 가사 중간에는 “더 높이 가줄게 내가 바랐던 세계 제일 위에 / 떨어져도 돼” 같은 라인이 들어있다. 추락도 각오했다는 질주는 더없이 선언적이다.

이렇게 말라서, 이런 옷을 입어서, 그저 대중 아이돌이라서 어떻게 원하는 메시지를 전하겠니. 이런 아쉬운 목소리에도, 두 팀은 하려던 이야기를 계속 한다. 까마득하게 많은 불특정 대중 앞에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이유는 그저 충동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그것을 “용기”라고 부르고 싶다. | 📻 DJ 랜디 서 | rndy.s.music@gmail.com 

📻 재미로 보는 (여자)아이들과 르세라핌의 평행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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