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디 서의 사적 리뷰(1) | 투쟁하는 아이들

매주 수요일은 덕질 경험기부터 음악/영화/웹툰 리뷰에 이르기까지, 저의 동료들이 쓰는 아티클이 실립니다. 오늘은 음악에 대해 얘기하는 '랜디 서의 사적 리뷰'입니다. 4주에 한 번 연재됩니다.

안타고니스트 서사: 이 소설 속 악당은 나였네

우리는 유명인을 이해할 때 어떤 서사 구조 속에서 그를 본다. 누군가 인기가 있다는 건 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주인공으로 놓고 그의 주변 맥락을 이야기로서 이해한다는 말과 같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에 동의할수록 인기와 지지는 높아진다.

이런 이야기의 힘에 주목해 최근 아이돌 기획사들은 그룹에 세계관을 짝지어 내놓기도 하지만, 세계관이 서사를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한다. 사람들이 마음을 빼앗기는 건 잊혀가던 그룹이 역주행을 하거나 언더독 그룹이 불리한 입지를 극복하는 일 같은 현실 속의 드라마틱한 서사다.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행운은 아니다.

아이들의 첫 정규 앨범 [I NEVER DIE]는 안타고니스트를 자칭한다. 타이틀곡 "TOMBOY"의 뮤직비디오가 보여주는 팝한 컬러감의 폭력적 이미지나 고딕 펑크룩의 영향을 받은 이-걸 패션은 지난 몇 년 간 케이팝씬에서 수시로 보였던 요소들이지만, "TOMBOY"는 여기에 안타고니스트의 서사를 더해 좀 더 설득력을 부여한다. 비주얼 뿐만 아니다. 음악 역시 거칠고 반항적인 이미지를 추구했다.

처음 들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팝 레퍼런스에는 빌리 아일리시의 "bad guy"가 있었다. 나이 어린 여성 화자가 마이너 곡조 5도 인터벌을 뼈대로 진행 되는 범죄 영화 테마 같은 노래 속에서 분노를 드러내는,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보인다. 동시대의 젊은 청자들이 열광하는 지점이다.

다만 "TOMBOY"는 "bad guy"보다 훨씬 발산적인 자세란 점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Look at you’를 흘리듯 발음하는 민니의 도입부 여섯 마디 뒤에 바로 허스키하고 풍부한 성량의 우기가 민니 한 옥타브 위의 유니슨으로 ‘I got to drink up now 네가 싫다 해도 좋아’ 하고 내지르는, 이 곡의 격렬함을 깨닫게 되는 순간 여기서 정신이 번쩍 들면 이미 곡의 중심으로 깊숙히 끌려들어와있다. 정신 없이 휘몰아치는 디스토션 기타나 욕설을 ‘삐’소리로 처리한 구간 (CD 버전에서는 무편집 버전을 들을 수 있지만, 걸그룹 무대에서 마주하는 ‘삐’소리는 오히려 더욱 창작자의 의도를 강조한다. 그래서 더욱 음악적이다) 등, 곡의 적재적소에서 귀를 잡아채는 장치가 들린다.

어두운 분위기의 기타 중심 곡이라 해서 이모 팝 펑크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그런 사운드를 모사하고는 있지만 밴드 셋업은 아니다. 특히 드럼은 어디까지나 컴퓨터 안에서 찍은 미디 소리인 티가 난다. 사운드의 장르적 분류보다는 어떤 무드를 재현하고자 했나에 중점을 두고 듣는 편이 좋은 것 같다.

안타고니스트 서사는 3번 트랙 "Villian Dies"에서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노래의 화자는 ‘모든 걸 망치는 그녀를 미워했는데 / 이 소설 속 악당은 나였네’ 하며 안타고니스트로서의 자신을 각성한다. 그리고 이대로 무력하게 빌런다운 죽음을 맞지 않겠다며 반격을 시작한다. 프로타고니스트의 입장에서 빌런의 승리는 새드엔딩이겠지만, 빌런의 입장에서 '나'는 주인공이기에 봐주지 않겠다는 자세다. 

그래서 프로타고니스트가 누구인지는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 다만 화자로서 아이들은 통념상 환영 받지 못 하는 존재, 이질적이고 반항하는 존재다. 이 통념은 고분고분한 어린 여성이란 몰드일 수도 있고, 귀엽고 무해한 이미지의 걸그룹이란 몰드일 수도 있고, 작사작곡 정도는 자아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그저 ‘실력파’ 딱지를 얻을 정도로만 할 수 있는 셀프 프로듀싱 아이돌이란 몰드일 수도 있고, 또한 그 모두일 수도 있다.

아이들의 리더이자 이번 앨범의 총괄 프로듀서 소연은 지금까지 아이들의 작업 뿐만 아니라 CLC에 제공한 ‘No’ 같은 곡이나 솔로 EP의 트랙 등을 통해 이 같은 주제를 끊임없이 탐구해왔다. 팀명 '아이들(I들)'에서도 보이듯, ‘나’로서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은 데뷔 때부터 이 팀의 중요한 테마였다. 단순히 셀프 프로듀싱 아이돌이라 해서 쉬이 만들어질 만한 주제는 아니다.

데뷔한지 4년, 특히 지난 1년 2개월의 완전체 공백은 아직 라이징 스타의 위치였던 아이들에게는 큰 위기였다. 아직은 거론하기 조심스럽지만, 멤버 수진이 학창 시절의 잘못을 계기로 무기한 활동이 중지 되었고, 올초 탈퇴가 결정되었다. 그의 카리스마가 팀의 퍼포먼스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의 난 자리를 메꾸는 작업이 이번 컴백의 무엇보다 중요한 포인트가 될 거라 예상했다.

이번 앨범은 아이들의 첫 풀렝스 앨범이자 팀 재정비 이후의 첫 음반이고, 중요성도 절박함도 높았다. 그러나 아이들이 들고 온 주제는 여전했다. ‘나’로 존재하고자 하는 이의 투쟁 말이다. 다만 ‘나’를 히로인 외적인 존재로 정의하는 프레임에서 이야기의 주도권을 빼앗아오겠다는 선언을 했을 뿐이다.

'1theK: 아이돌등판'에서 소연은 가면을 쓰고 총을 든 아이들의 콘셉트 사진을 두고 이렇게 설명했다.

복면을 쓴 가상의 조직 아이들이 훔치고자 하는 것은 ‘내’가 어떤 모습이든 ‘나’인채로 주인공일 수 있는 자격이다.

존재, 감각, 투쟁

본래 한번 유명세에 오르고 나면 유명인은 끊임 없이 자신을 둘러싼 이야기의 주도권을 두고 대중 혹은 미디어와 경쟁해야만 한다. 조금은 비약적인 비유일지 모르겠지만, 비욘세 같은 아티스트마저 그렇다.

사생활을 미디어로부터 철저히 숨겼던 그는 남편 제이지의 외도에 바로 반응을 내지 않았다. 대신 긴 시간을 들여 자기 감정과 가족의 역사, 그리고 흑인들의 삶을 소화해 앨범 [Lemonade]로 답해냈다. 자기 인생의 이야기를 가십지의 기사로, 거리의 쓰레기가 될 운명으로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내 이야기의 주도권은 내가 쥐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물론 아이들은 비록 그보다 훨씬 어리고 짧은 경력의 아이돌 팀이다. 그러나 이들도 마찬가지로 세간의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어디쯤에 위치하는지 감각하고 그 주도권을 얻고자 투쟁한다. 이야기의 흐름을 자신들 쪽으로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창작자로서 엄청난 능력이다. 아이들에게는 이 힘이 있다. 소연이 좋아한다는 만화 [원피스]처럼, 이들은 한 배를 타고 이야기의 흐름이란 파도를 탄다. | 랜디 서 (대중음악 해설가)

※ 수요일 코너 안내 (이제부터 매주!)

매주 수요일 저녁에는 4명의 필자들이 돌아가며 글을 씁니다. 월 1회 연재라고 보시면 됩니다. (물론 사정에 따라 주기나 내용이 달라질 수도 있답니다~;;;)

1) 핑크블러드의 덕질 에세이: 요즘 덕질은 '포카'가 핵심인데요, 이걸로 도대체 뭘 어떻게 할런지보다, 이 판에 막 빠져든 사람의 기쁨과 슬픔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저는 엄청 궁금했어요. ㅋㅋ 

2) 랜디 서의 사적 리뷰: '시사인'과 '위버스 매거진', '아이돌로지'에 글을 쓰고, 저와는 '360리뷰'를 진행한 랜디 서 평론가가 주목하는 싱글/앨범에 대한 리뷰입니다. 좀 더 입체적으로 음악을 감상할 계기가 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3) 임희윤의 북유럽 음악: 동아일보 문화부의 임희윤 기자가 쓰는 북유럽 음악에 대한 칼럼입니다. 대중적이지 않은 북유럽의 메탈이나 재즈, 팝을 가지고 장르부터 앨범 아트웍에 이르는 광범위한 얘기를 합니다. 어디가서 아는 체 하기 좋은 내용이 아닐까(ㅋㅋ) 싶네요. 

4) 강남규의 영화 이야기: <지금은 없는 시민>의 저자 강남규님이 쓰는 영화/드라마/웹툰 리뷰입니다. 특히 저는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써달라고 졸랐습니다. ㅎㅎ 크리에이터든 비즈니스든 혹은 콘텐츠든 뭐가 됐든 결국 함께 사는 게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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