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디 서의 사적 리뷰 | 2022년의 레트로

TMI.FM의 DJ 랜디 서 | 대중음악은 언제나 세상의 단면을 반영합니다. 특히 이 분야의 여성들은 아티스트로서, 제작자로서 혹은 팬으로서 다층적인 생각의 지점을 건드리곤 합니다. [랜디 서의 사적 리뷰]는 국내외 여성 아티스트의 음악을 소개하고, 거기서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순간을 짚어봅니다. 

2022년의 케이팝 역시 지난 몇 년 간 트렌트처럼 ‘레트로’의 해였다. 과거 한시절을 모방하며 즐거워하거나 아름다워하는 조류가 계속 되었다. 큼직하게 보면 80년대와 그전의 미국 문화 (예: 넷플릭스 시리즈 ‘기묘한 이야기(Stranger Things)’의 영향, 디스코 리바이벌 등) 유행이 드디어 저물고, 이제는 90년대 세기말과 2000년대가 ‘레트로 트렌드’를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12월 16일에 열린 KBS 가요대축제의 주제어 ‘Y2K’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올해를 빛낸 케이팝 스타로는 신인으로는 드물게 대상격의 상들을 거머쥔 아이브, 멤버 재정비 이후 공격적인 기획력과 메시지로 더 강해진 (   )아이들, 10년의 그룹 활동을 앤솔로지 앨범으로 정리하고 솔로 활동으로 2막을 시작한 방탄소년단의 멤버들, 오랜만에 완전체로 컴백한 지난 세대 걸그룹들 (소녀시대, EXID, 카라, 2NE1, 마마무 등) 등이 떠오른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가장 큰 인상을 받은 두 팀을 꼽자면, 상반기는 작년부터의 활약을 쭉 이어간 에스파, 그리고 하반기에는 여름과 겨울에 모두 분명한 존재감을 뽐낸 뉴진스를 꼽고 싶다.

(당분간) 흩어진 ‘메타버스’의 꿈

올해는 유독 상반기와 하반기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코로나 팬데믹의 엔데믹 전환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전 장기화, 한국 내 정권 교체, 그리고 뒤따라온 경제 변화 등이 반영된 듯 하다. 상반기까지는 2021년 하반기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 지속 되었다. 코로나 팬데믹이 생각보다 장기화 되면서 이번에야말로 진짜 ‘메타버스’의 세상이 오려나 하는 기대가 최대치로 부풀었던 때다.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한 암호화폐나 NFT도 ‘4차 산업 혁명’이란 이름으로 함께 묶였다.

2021년 하반기에 본격적으로 떠오른 에스파의 ‘Next Level’이나 ‘Savage’는 이와 적절하게 발을 맞춘 케이팝이었다. 아예 게임 속 세계를 상정하고 음악조차 그 게임의 주제곡처럼 다루는 방식과 그에 어울리는 비주얼 작업은 팬데믹으로 그 존재감이 더욱 강해진 디지털 세계를 상징하는 듯 했다. 이원화된 세계, 그러니까 전염병을 피하려 집안에 격리된 우리의 현실과, 비교적 자유로이 왕래하며 소통할 수 있는 웹의 세계 중 후자 말이다.

에스파가 처음 등장했을 때는 그 유리감이 진입 장벽으로 작용했지만, 이들의 매력적인 무대와 ‘Next Level’, ‘Savage’의 히트는 게임 그래픽 같은 이세계의 거부감을 서서히 지워주었다. 게임을 거의 하지 않는 내게는 이 감각의 변화가 2022년 가장 놀라운 경험 중 하나였다. 대중음악 기획이 패러다임 변화에 동력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며 신기하기도, 프로파간다로서의 기능을 절감하며 두렵기도 했다.

에스파의 미학은 90년대 세기말 ‘사이버’나 ‘테크노’로 소환되던 대중문화, 번쩍이고 차가우며 속도감 있던 것들을 상기시켰다는 점에서 ‘레트로’이기도 하고, 그 당시 인터넷이 불러올 사회 변화의 기대가 반영된 ‘퓨처리즘’을 ‘메타버스’ 등의 ‘4차 산업 혁명’의 기대감과 등치 시켰다는 점에서 동시대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미래적이라고까지는 느껴지지 않았다. 결부된 (혹은 함께 연상 되는) ‘4차 산업 혁명’ 자체의 아이러니 때문이었다.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또 한 번의 산업 혁명이 필요하다는 건 다들 동의하는 바다. 지구 자원은 고갈 되어가고, 기후 위기는 도미노처럼 진행 중이며, 인류는 (일부 국가나 산업을 제외하고는) 저성장 중이니 말이다. 그러나 ‘4차 산업 혁명’의 아이디어들은 팬데믹이 한창이었던 그 짧은 기한 안에 존재의 필요성을 완전히 증명해내지 못했다. 사명까지 바꾼 메타(구 페이스북)는 여전히 고전 중이고, 암호화폐 시장에는 5월에는 루나코인 파동이, 11월에는 FTX 파산이 이어졌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애초의 하입(hype)이 작위적으로 쌓아올린 ‘억텐’이 아니었나 하는 의심도 커졌다. ‘메타버스’와 가까운 위치에 있었던 에스파의 음악과 애스테틱은 지금의 난리통에 조금 거리를 두어야 할 필요가 생겨버린 듯 하다.

그렇다고 지금 에스파의 위치가 위태롭다고 보기는 어렵다. 6월에 내놓은 ‘도깨비불’은 상반기 케이팝 중 단연 돋보이는 수작이었고, 7월에 발매한 미니앨범 [Girls]는 걸그룹 최초 초동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며 4세대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위에 언급했듯 패러다임 변화에 어떤 동력을 더할 수 있음은 이 팀이 설득력 있는 방법론을 갖고 있다는 증표다. 연말인 지금, 에스파는 자연스럽게 다음을 기약하고 있는 것 같다. 이번 달에는 레드벨벳과 팀으로 컬래버레이션한 캐롤 싱글을 내놓았고, 멤버 중 2명이 참여하는 레이블 유닛 갓더비트가 내년 초 컴백을 예고하고 있다.

‘하이틴’의 정체–21세기 인터넷 비주류 문화

7월은 뉴진스가 데뷔한 달이기도 하다. 이 팀 역시 ‘레트로’라는 키워드 없이 설명하기 힘들다. 뉴진스 기획은 근 3~4년간 ‘하이틴’이라는 단어로 두루뭉술하게 케이팝을 떠돌던 그 애스테틱을 드디어 구체화 시켰다. 이전에도 하이틴을 표방한 걸그룹 콘셉트는 적지 않았다. 베이비티 상의와 테니스 스커트, 프레피한 체크 무늬, 헬로키티나 마이멜로디 같은 산리오의 캐릭터 상품, 조악하게 만들어져 오히려 키치하게 느껴지는 알록달록 플라스틱 액세서리 등은 케이팝 뿐만 아니라 1020 여성층이 향유하는 여러 대중문화 속에서 ‘하이틴’이라는 이름으로 사랑 받았다. ‘클루리스’ 같은 90년대 틴 무비에서 비롯된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은, 출처가 어디인지 불분명한 유행이었다.

뉴진스를 보며 최근 몇 년간의 하이틴 레트로 유행은 다름 아닌 웹2.0 시대의 인터넷 문화에서 기인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도트 그래픽도, 네온 컬러도, 90년대에서 직송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2000년대와 2010년대 소셜미디어가 폭발적인 영향력을 키워갈 즈음 그 안에서 각자 무리를 지어 주류와는 다른 대안 문화를 만들어내던 사람들의 추억에서 길어왔을 가능성이 커보인다.

미국을 비롯해 21세기 초 한차례 불황이 훑고 지나간 서구권의 대중문화는 예술이나 문화 고관심군의 취향을 만족시키기에는 다소 황폐했다. 이중 컴퓨터 사용에 밝았던 이들은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아카이브 속에 뛰어들어 20세기의 좋은 것을 디깅해내고 재조립했다. ‘클루리스’ 같은 영화는 그중 극히 일부였다. 2000년대 말 텀블러나 핀터레스트 등 이미지 중심의 SNS에서는 90년대 틴 무비 뿐만 아니라, 8비트 게임, 버블시대 일본의 시티팝, 아니메, 로파이 트랙, 알렉사 청 등으로 대표되는 복고적이면서도 프레피한 패션 아이템 등이 과거로부터 재발굴되어 예술적인 아이들 혹은 ‘힙스터’들의 재료가 되었다.

이후 2010년대는 이 위에 계속 해서 과거의 대중 문화를 쌓아올렸다. 대표 플랫폼이 텀블러에서 트위터로 이동하며 이미지 뿐만 아니라 짧은 텍스트 위주의 정보나 서사, 그로 인한 감수성도 유행을 타거나 전염 되었다. 이 시기 한국 웹에서는 기무라 타쿠야 주연의 일본 트렌디 드라마, 나카모리 아키나 같은 쇼와 시대 아이돌, 대만 뉴웨이브 영화 등의 팬도 보였다.

웹2.0 시대의 인터넷 문화는 모방의 대상이 몇 년도에서 왔는지를 거의 묻지 않고 게걸스럽게 소화해냈다. 해외에서는 한국의 ‘하이틴’ 유행을 ‘Y2K’ 같은 것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여기엔 Y2K 시절로부터 직접 온 것도 있고, 그 이후의 시간선에서 과거를 끌어다 즐기던 사람들을 경유해 도착한 것도 있다. 그 구분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의 1020 인구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시대는 그게 몇십년대인지 굳이 알아야 할 필요 없는 과거의 언젠가일 뿐이고, 지금 내 마음에 든다면 나를 표현하는 데에 활용하면 그만이다.

뉴진스가 재연하는 레트로는 복제의 복제, 시뮬라크르의 시뮬라크르다. 팝컬쳐의 시뮬라크르라는 점은 어떤 ‘콘셉트’를 갖고 기획된, 비교적 분명한 레퍼런스를 갖고 있는 거의 모든 케이팝에 해당된다. ‘드림걸스’를 콘셉트로 했던 원더걸스의 ‘Nobody’, ‘써니’를 콘셉트로 했던 티아라의 ‘Roly Poly’, 007 시리즈 (어쩌면 그 패러디인 ‘오스틴 파워’) 를 모티프로 했을 소녀시대의 ‘Hoot’ 등 말이다.

그러나 2022년의 뉴진스는 이전에 온 케이팝들보다 내밀한 인상을 준다. 모두가 알았던 주류 팝컬쳐 아닌, “나만 알던”’ 비주류 인터넷 문화를 따르기 때문 아닐까. (설사 그 인터넷 문화가 과거의 주류 문화를 따랐다 하더라도, 나만 아는 인디 문화라 여겼지만 내 생각보다 널리 알려져있었다 하더라도, 당시에는 그 착각 속에 즐거워했으니 큰 상관은 없다) 뉴진스의 레트로는 2000년대와 2010년대의 인터넷 힙스터 문화를 경유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 시절 인터넷 문화에 깊이 경도됐던 사람들을 불러모은다.

나 역시 이때 사람이라 뉴진스에 열광하다 주위를 둘러보면 ‘다 아는 사람이구먼’ 같은 기분이 느껴져서 머쓱하다. 뉴진스가 선보이는 작품에서는 지난 10~20여년간 인터넷을 통해 문화력 (혹은 덕력)을 쌓아온 이들이 저마다의 추억으로 소중하게 여기는 대중문화의 파편들이 엿보인다. 이를 조심스럽게 모아 빛나는 모양으로 정성껏 재배열한 것까지가 기획자의 솜씨고, 천진하게 소화해내는 것은 뉴진스의 능력이다.

별일이 없는 이상 2023년에도 레트로 유행은 계속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재연할 과거가 곧 바닥날 것 같기도 하다. 팬데믹으로 인한 시간 여유, 그리고 틱톡으로 유통된 과거 패션의 초고속 유행은 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 과거를 부지런히 디깅하게 했다. 올해 연말 무대에는 있지의 유나가 트루릴리전의 로라이즈 청바지를 입고 2000년대 말에 발매된 이효리의 ‘U-Go-Girl’을 불렀다. 2010년대까지 탈탈 털고 나면, 그 다음에는 무언가 전위적인 것이 등장할 수 있을까? 새로운 기술의 등장이나 사회의 격변 없이도 그게 가능할까? 궁금함 속에 2023년을 기다려본다. 🎧 DJ 랜디 서 | rndy.s.music@gmail.com 

📻 에스파 - 도깨비불

📻 뉴진스 - Dit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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