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디 서의 사적 리뷰 | FLO로 보는 영미권 걸그룹의 흐름

TMI.FM의 DJ 랜디 서 | 대중음악은 언제나 세상의 단면을 반영합니다. 특히 이 분야의 여성들은 아티스트로서, 제작자로서 혹은 팬으로서 다층적인 생각의 지점을 건드리곤 합니다. [랜디 서의 사적 리뷰]는 국내외 여성 아티스트의 음악을 소개하고, 거기서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순간을 짚어봅니다. 

데스티니스 차일드와 TLC를 좋아한 사람이라면 분명 이 그룹의 음악을 좋아하지 않을까. 요즘 틱톡과 트위터를 중심으로 영국의 알앤비 걸그룹 플로(FLO)의 인기가 뜨겁다. 90년대와 2000년대 (이하 Y2K) 미국의 걸그룹 알앤비를 재연한 사운드와 메시지가 그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플로, 영국과 미국의 걸그룹 특성을 섞다

플로는 풍성한 알앤비 하모니에 바람 핀 애인을 쫓아내는 가사를 매치한 데뷔곡 "Cardboard Box"가 바이럴 되면서 주목 받는 신인으로 급격히 떠올랐다. 9월에는 "Not My Job"을 추가해 지난 7월 발매했던 데뷔 EP [The Lead]의 확장판을 내놓았고, 10월 7일에는 미국 ABC의 심야 토크쇼 [Jimmy Kimmel Live!]에 음악 게스트로 출연해 미국 방송 데뷔를 이뤄내기도 했다.

영국 가수가 미국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이 그리 큰 일인가 싶을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그렇다. 아델과 같은 영국 가수도 미국의 [Saturday Night Live] 방송 출연 등으로 커리어에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는 분명 그룹에게 큰 랜드마크다. 어쩌면 2010년대의 리틀 믹스(Little Mix)를 대신할 2020년대 영국 대표 걸그룹이 될지 모른다는 예측들이 분분하다. 마침 리틀 믹스는 올해 공식적인 활동 중단(Hiatus)에 들어간 참이었다. 그래서 플로의 부상이 이들과의 바톤 터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플로는 영국과 미국의 걸그룹 특성을 모두 품고 있는 흥미로운 팀이다. 우선 이들 음악은 영국의 백인 걸그룹 팝 보다는 미국의 Y2K 시절 흑인 알앤비 걸그룹의 그것과 더 가깝다. 멤버들도 흑인 혹은 흑인과의 바이레이셜 혈통이다.

뮤직비디오에 모토로라 레이저 폴더폰을 등장시키는 등 그 시절 애스테틱 구현에도 꽤나 진심이다. 2000년대 중반에 영국의 가수 에이미 와인하우스나 아델이 미국의 흑인 음악인 소울과 그 때의 패션을 들여와 세계적인 인기를 얻은 것을 연상 시킨다. 그러면서, 완전히 미국적인 팝 시스템에서 제작된 팀은 아니라, 그룹 내의 케미스트리는 영국 보컬 그룹이나 밴드들 쪽 분위기와 더 가까워보인다.

트리오 중 두 명인 스텔라 퀘리즈마(Stella Quaresma)와 르네 다우너(Renée Downer)는 같은 학교 친구 사이고, 오디션으로 들어온 조자 더글라스(​​Jorja Douglas)도 비슷한 또래라 금세 친해졌다고 한다. 음악의 대부분은 유명 작곡가이자 싱어송라이터인 엠엔이케이(MNEK)가 프로듀싱 했다. 오픈리 게이인 그는 평소에도 걸그룹 음악을 좋아했다며, ‘내가 제작하지 않았어도 난 분명 이 팀 덕질을 했을 거다’라고 애정을 밝히기도 했다.

스파이스 걸스: 남자애들에게 지고 싶지 않은 여자애들

미국은 일반적으로 그룹보다는 솔로 가수 중심의 시장이다. 50년대부터 대중적인 인기를 끈 두왑 장르에서 볼 수 있듯, 미국식 보컬그룹은 주로 주 멜로디를 부르는 한 명과 코러스를 담당하는 나머지로 구성 되었다. 이후 그룹이 궤도에 오르면 제작자들은 가장 인기 있는 (주로 주 멜로디를 담당하는 센터) 멤버를 솔로 가수로 재데뷔 시켰다. 잭슨 파이브의 마이클 잭슨, 수프림스의 다이애나 로스, 데스티니스 차일드의 비욘세, 엔싱크의 저스틴 팀버레이크 등, 미국엔 그룹 활동을 발판으로 초대형 스타가 된 가수들이 많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타 멤버들의 호소나 감정적인 갈등을 가십 거리로 소비하기도 한다. 영국이라고 안 그런 것은 아니지만, 미국 시장은 이런 전개가 좀 더 노골적이고 패턴화돼있다. 미국 대중들도 그 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2000년대에는 푸시캣돌스(Pussycat Dolls), 그리고 2010년대엔 피프스 하모니(Fifth Harmony)가 비슷한 길을 따랐다.

영국의 걸그룹 하면 스파이스 걸스(Spice Girls)를 빼놓을 수 없다. 당시 90년대 초반 영국은 테이크댓 같은 보이밴드의 인기가 뜨거웠다. 스파이스 걸스는 이들과 비슷한 10대 초반 여성 팬층을 겨냥해 탄생한 팀이었다. 그래서 ‘보이밴드에 대항하는 걸밴드’, ‘남자애들에게 지고 싶지 않은 여자애들’이라는 주제가 팀 기획의 큰 골자였다.

멤버 개개인에게는 실제 성격에 따라 ‘스포티(Sporty)’, ‘ 포쉬(Posh)’, ‘베이비(Baby)’ 같은 별명이 부여되었고, 스타일링이나 무대 매너, 그리고 무대 밖의 평소 모습들이 이를 반영했다. 개성 강한 소녀들이 한 팀으로 뭉쳐 ‘걸 파워(Girl Power)’를 외치는 모습은 전세계 나이 어린 여성 팬들에게는 마치 학교에서의 자신들 또래 친구 그룹의 모습처럼 다가왔다. 한 명의 센터를 중심으로 같은 유니폼을 입고 무대에 서던 미국식 걸그룹과는 달리, 스파이스 걸스는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아이들이 모여 친구가 되고 ‘원 팀’이 된 콘셉트를 셀링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스파이스 걸스라고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98년 ‘진저(Ginger) 스파이스’ 제리 할리웰이 탈퇴했고 이후 멤버 간의 불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남은 멤버들이 차례로 결혼과 임신, 출산을 겪으며 스파이스 걸스는 2001년 자연스럽게 해체했다. 그러나 이들이 일으킨 센세이션은 역사에 길이 남았다. 소녀 팬들을 결집 시킨 20세기 최고의 걸그룹으로 말이다.

90년대 말 미국은 스파이스 걸스의 인기를 ‘원 팀’으로서의 걸그룹 모델로 수입하기보다는 제작자의 영향력이 극대화된 미국식 틴 팝의 부흥기로 삼았다. 90년대 말 브리트니 스피어스,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맨디 무어 등 솔로 걸 팝 가수들이 연이어 데뷔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 TLC, 데스티니스 차일드

스파이스 걸스가 마음대로 뛰어노는 여자 아이들을 그려냈다면, 브리트니 스피어스로 대표되는 솔로 걸 팝 가수들은 대체로 ‘섹스어필 노래를 부르는 순결한 금발 소녀’로 기획되었다. 스파이스 걸스의 주 타깃층이 10대 초반의 여성 팬이었던 것에 비해, 미국 걸 팝 가수의 타깃은 (10대 여성도 있었지만) 소녀의 섹스어필을 보고 싶어하는 전연령 남성층을 포함했다. 남성 팬들과 섞이기 불편했던 10대 여성 팬들은 보이밴드나 에이브릴 라빈 등 여성 팬 위주의 팬덤으로 자연스럽게 이탈하기도 했고, 언론의 표적이 되는 자기의 우상을 보며 함께 마음 고생 하다 팬심을 접기도 했다. 그나마도 모두 솔로 가수였다. 여성 팬을 겨냥한 백인 걸그룹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때였다.

90년대 미국에서 걸그룹의 명맥을 잇고 있었던 것은 백인 위주의 팝 장르보다는 흑인 위주의 힙합 알앤비 장르였다. TLC와 데스티니스 차일드가 대표적이다. 이들 음악은 여성으로서의 자기를 중요하게 여기는 메시지를 담았다. 허세 떠는 남자의 플러팅을 망설임 없이 거부하거나("No Scrub"), 경제적으로 얹혀있으면서도 뻔뻔하게 구는 남자친구를 고발하거나("Bills Bills Bills"), 화려한 외모와는 상반되이 나약해지는 내면에 집중하거나("Unpretty"), 내 돈 주고 사서 내가 누리니 빚진 게 없다("Independent Women Pt.I")는 등의 가사들은 2세대를 거쳐 3세대로 분화해나가는 당시 페미니즘 조류를 반영하고 있었다.

이들의 타깃층은 주로 미국의 젊은 흑인 여성 팬이었다. 그러나 때마침 진행되기 시작한 세계화 속에서 여러 나라의 젊은이들이 이들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특히 TLC는 한국의 디바나 S.E.S 등 1세대 걸그룹의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안타깝게도, TLC는 2002년 리사 ‘레프트 아이’ 로페즈의 이른 죽음으로 멤버 셋 중 한 명을 잃으며 팀의 동력을 크게 잃었다. 또, 데스티니스 차일드는 제작과 트레이닝 등에 깊이 관여한 비욘세 부모의 특혜 제공이나 잦은 멤버 교체 등이 워낙 화제가 되었기 때문에 팀으로서의 끈끈하고 긴 서사를 보여주지 못 했다.

2000년대부터 최근까지의 미국의 백인 위주 팝 걸그룹을 떠올려보면, 하나의 팀이라기 보다는 레이블에서 묶어준 일시적인 모임이라는 인상이 강했다. 제작 단계에서부터 그렇게 구성이 되었고, 발표하는 음악들도 여느 솔로 가수가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모양새였다. 2003년 데뷔한 푸시캣돌스는 아예 댄스 위주의 팀으로 기획 되어 노래는 멤버 여섯 명 중 한 명만이 불렀다. 히트하기는 했지만 거의 모든 관심을 보컬 멤버인 니콜 셰르징거가 독식하게 되었다.

결국 이들은 인지도 차이에서 갈등을 겪다가 2009년께에 무기한 활동 중단과 해체를 맞았다. 2012년 미국에서 영국의 원 디렉션, 리틀 믹스와 비슷한 방식으로 조직된 (TV 오디션을 통해 발탁 되어 사이먼 코웰과 계약했다) 걸그룹 피프스 하모니 역시 2016년 메인 보컬인 카밀라 카베요가 탈퇴하며 솔로 가수로 전향했고, 팀은 2018년 무기한 활동 중단에 들어갔다.

새로운 걸그룹과 그 팬들

미국 시장에는 팀으로 진득한 서사를 이어나간 걸그룹이 많지 않다. 대체로 성공적인 팀이 나오면 당연히 가장 돋보이는 한 명이 솔로 커리어를 시작할 것으로 기대한다. 제작하는 입장에서도 그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 솔로 가수가 훨씬 흔하고, 성공시의 보상도 크기 때문이다. 가십 미디어는 걸그룹 내의 ‘캣파이트’ 보도에 바쁘다.

이런 환경에서는 걸그룹 멤버 당사자들도 끈끈해지기가 쉽지 않다. 회사가 팀을 오래 매니징 해주지 않을 것 같으니 기회가 있을 때 혼자라도 도약해야 한다는 생각이 클 수 밖에 없다. 반면 영국은 스파이스 걸스라는 모델이 있기 때문일까, 미국보다는 팀 자체로 프로모트 하고 또 사랑 받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리틀 믹스는 올해 활동 중단을 선언하기까지 10년을 꾸준히 활동했다. 최근까지 의미 있는 커리어로 롱런하는 그룹들을 보면 영국 출신 밴드들이 많은 것도 영국 팀들의 이런 차이에 한몫 하는 것 같다.

팀이 오래 지속 되려면 팀으로서의 그 그룹을 사랑해주는 탄탄한 팬덤이 필요하다. 팀의 결속은 당사자들의 일이기도 하지만 팬들에게 그런 콘셉트와 이미지, 서사 등을 어떻게 전달할지도 중요하다. 물론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런 마음과 의사가 제대로 전달 되면, 팬들은 누구보다 질긴 사랑과 지지로 보답한다.

오랜 시간 쌓인 사회의 통념 상, 의리나 우정은 마치 남성의 영역인 것처럼 여겨진다. 반대로 여성은 시기나 질투와 묶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정을 지속하려면 쌍방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 자기 감정을 잘 살펴 질투를 다스리고 화합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은 성별과 무관한 진리다.

걸그룹은 우정과 화합을 위한 노력에 더해 사회의 통념적 편견을 극복해야 한다는 이중의 미션을 떠안는다. 그러나 요즘은 그런 노력을 팬들이 알아보고 지지해주는 추세다. 여기서 케이팝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케이팝은 워낙에 그룹 형태의 가수가 많은 씬이다. 팀 활동기에는 하나 같이 영원한 우정을 말하지만, 그중에는 갈등으로 와해 되는 팀도 있고, 긴 시간 함께 하기 위해 노력하는 팀도 있다. 흩어져서도 지속적으로 만나며 가족처럼 의지하는 팀도 존재한다. 보이그룹도 그렇지만, 조건이 좀 더 어려울 걸그룹들도 이를 해내고 있다.

플로는 걸그룹의 미래가 될 수 있을까?

요즘은 소녀시대, EXID, 마마무 등 서로 다른 회사로 흩어졌음에도 본인들의 의지로 완전체 음반을 내고 활동까지 하는 팀이 늘고 있다. 연말에는 카라도 컴백이 예고 되어있다. 스파이스 걸스가 2007년 화해하고 리유니언 했을 때의 감동도 컸지만, 이미 이어진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교류를 놓지 않고 안부를 챙기는 케이팝 걸그룹들의 모습은 국경을 넘어 여러 나라 걸그룹 팬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플로는 이런 분위기 속에 데뷔하는 팀이기 때문에 더 큰 기대를 받고 있다. 국적 불문 젊은 여성들에게 어필하는 연애 주제 가사, 미국 아닌 영국이라는 결성 환경, Y2K 음악이나 패션이 한창 각광 받고 있는 요즘 트렌드 상의 이유도 모두 중요하다.

그러나 플로가 더욱 기대 되는 이유는, 지금 웹 기반 팬 문화의 토양이 이전과는 다른 걸그룹의 미래를 이미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인기를 얻으면 만만치 않은 팬덤의 조직으로 이어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덧붙이기로는, 인종 따위의 요소가 이들의 성공 가도에 장애물이 되지 않기를 바라본다. 📻 DJ 랜디 서 | rndy.s.music@gmail.com 

📻 FLO - Cardboard 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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