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퍼 ABC

균형의 예술

feat. 스테이세일의 덕목

2024.10.20 | 조회 1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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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퍼 매뉴얼

일요일 오전 9시에 읽는 바다, 항해, 세일링 요트 이야기(격주 발행)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벌써 가을이 깊었습니다. 여름이 비인간적으로 더워서 지리산 같은 곳에 살아야 하는 건가 생각도 했었는데요, 역시 겨울 추위 걱정 없는 남해가 좋을 것 같아 요즘 정착할 집 찾기에 한창이랍니다. 

지난 레터의 주제는 '멈추어 있는 배의 균형'이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이번에도 토끼굴에 빠져 글을 썼다는 자괴감이 드네요. 다른 사람들에게 전혀 와닿지 않는 글을 쓰고는 혼자 흥분할 때마다 저를 현실로 끌어내려주는 사람이 바로 선주입니다. 선주는 숫자와 논리를 본능적으로 싫어하고 과학적인 개념에 깊은 거부감을 품고 있어, 저와 정 반대의 성향입니다. 이번에도 선주의 혹평 덕에 정신을 차리고, 오늘 레터는 최대한 일반적이고 단순한 내용으로 줄여 보았습니다. 선주와 저 사이의 완충 지점에서 균형 잡힌 글이 나오지 않을까요.

오늘은 높은 마스트에 큰 세일을 달고 움직이는 세일링 요트의 안정성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가 보겠습니다. 

 

물속의 날개

비행기는 공기를 가르며 나아가고, 잠수함은 물을 가르며 나아가는데 세일링 요트는 공기와 물, 두 가지 다른 물질을 동시에 이용합니다. 위로는 바람의 힘을, 아래로는 물의 저항을 받으며 균형을 유지합니다. 세일은 공중에 떠 있는 날개와 같습니다. 그런데 물속에도 날개가 있습니다. 

배가 멈추어 있을 때 물은 별 저항을 받지 않고 배 주위를 자유롭게 이동합니다. 그러나 배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킬과 러더 주위에 ‘흐름’이 생기기 시작하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킬과 러더의 단면을 보면 비행기 날개의 단면과 비슷한 모양인데요, 세일이 공기 중의 날개라면, 킬과 러더는 물속에 있는 날개와 같습니다.

배가 빠르게 움직이면 날개 주변에 강한 물살이 생깁니다. 이 물살이 비행기 날개처럼 힘을 만들어 배가 옆으로 밀리는 것을 막아주고 안정성을 높여줍니다. 어마어마하게 큰 세일과 균형을 이루기엔 사이즈가 너무 작지 않냐고요? 물은 공기보다 밀도가 800배나 높아 흐르면서 만드는 ‘힘’도 더 세답니다.

움직일 때 발생하는 공기 날개의 힘과 물속 날개의 힘 사이의 균형으로 인해 요트의 안정성이 높아집니다. 만약 속도가 느려지거나 멈추면 배는 더 불안정해집니다. 자전거가 느려지면 불안정해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파도가 심하게 울렁이는 바다에서 세일을 펴고 빠르게 항해하는 세일링 요트는 파워보트에 비해 훨씬 안정적입니다. 반면, 파도는 심한데 바람이 없는 바다에서는 베테랑 세일러도 멀미의 추억을 만들기 쉽습니다. 세일러들이 어떻게든 세일을 내리지 않고 배의 속도를 높여 보려고 최선의 노력을 하는 이유죠.

 

철수와 영희의 시소

배를 기울이려는 힘은 높은 곳에 달려 있는 세일에서 나오고, 배를 다시 바로 세우려는 힘은 물아래쪽 선체의 깊은 곳에서 나옵니다. 배가 일정하게 기운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누우려는 힘과 일어서려는 힘이 자연스럽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뜻입니다. 적절한 각도로 기울어 앞으로 나아갈 때 세일링 요트의 성능이 최대가 됩니다.

바람이 너무 강하면 배가 지나치게 드러누운 상태에서 균형점을 찾습니다. 세일링 요트가 너무 기울어 있으면 그 안에 머무는 사람들도 힘이 들지만 속도가 느려지고 조타도 자꾸 한쪽으로 치우치게 됩니다.

지나치게 드러누운 요트 대처법에는 몇 가지가 있는데, 세일링 요트를 시소에 탄 철수와 영희와 비교하면 직관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1번: 영희가 좀 뒤에 앉는다 → 배를 바로 서게 하는 무게중심과 킬이 좀 더 아래쪽에 위치한다면 배가 바로 섭니다.

2번: 영희가 체중을 늘린다 → 혹은, 배 아래쪽의 무게가 더 나간다면 역시 배가 바로 서겠죠.

3번: 철수가 체중을 줄인다 → 세일의 면적을 줄여 바람이 미는 힘을 줄이면 배가 바로 섭니다.

4번: 철수가 좀 앞에 앉는다 → 혹은 세일을 더 낮은 곳에 달아도 배가 바로 서게 됩니다.

크루즈 중에 취할 수 있는 만만한 조치는 3번과 4번입니다.

세일을 접거나 말아서 바람을 맞는 면적을 줄이는 것을 '축범reefing'이라고 합니다. 호라이즌스 호의 경우, 제노아는 앞단을 조금 말아서 크기를 줄이고, 메인세일은 아랫단을 접어 붐에 묶어 놓음으로써 줄입니다.

말아서 줄이는 세일
말아서 줄이는 세일

 

붐에 묶어서 줄이는 세일
붐에 묶어서 줄이는 세일

두 방법 모두 세일의 면적을 줄일 뿐 아니라 세일의 삼각형이 전체적으로 아래쪽으로 내려가게 하므로 세일의 중심이 낮아지는 효과를 냅니다. 즉, 철수가 체중을 줄일 뿐 아니라 좀 앞에 앉기도 하는 효과를 한꺼번에 내는 것입니다.

축범을 하는 대신 사이즈가 작은 세일로 갈아 끼우는 방법도 있습니다. 혹은, 작은 세일이 이미 장착되어 있는 배도 있습니다. 뱃머리의 큰 세일 뒤쪽에 작은 세일이 하나 더 달려있는 세일링 요트를 커터cutter라고 합니다. 

타야나 37
타야나 37

호라이즌스 호(타야나 37피트)도 커터입니다. 호라이즌스 호는 뱃머리에 큰 제노아가 장착되어 있고, 그 뒤쪽에 작은 스테이세일이 있습니다. 세일의 힘이 많이 필요할 때 두 개를 다 펼칠 수 있고, 바람이 너무 세거나 바다가 불안정할 때 작은 스테이세일 하나만 펴고 항해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균형의 예술

한 번은 건조된 지 오래되고 손이 많이 바뀐듯한 배에 초대돼 경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바람이 점점 강해지자 어느 순간 조타수가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조타대를 풍상으로 꺾은 채로 침로 유지를 하고 있었는데 더 이상 혼자 힘으로는 버티기 어려워진 것이었습니다. 결국 장정 둘이 조타대에 매달려 침로 유지에는 성공했으나 배는 점차 뒤처져갔습니다. 이 배에는 무슨 문제가 있었을지 추정해 봅시다.

아래는 항해 중인 배를 위에서 내려다본 그림입니다. 배는 적절히 기운 상태로 전진하고 있으며, 세일은 바람의 힘을 받고 있습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물속에서는 물살이 만들어내는 힘이 균형을 맞추어주고 있습니다.

헤드세일을 내려 뒤쪽의 메인세일만 혼자 일하게 하면 세일이 힘 받는 지점이 뒤쪽으로 치우치게 됩니다. 바람이 뒤쪽을 누르니 뱃머리가 자꾸 바람을 향하는 방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반대로 메인세일을 내리고 앞쪽의 헤드세일 혼자 일하게 하면 바람에 앞쪽만 눌리는 배는 풍하 방향으로 자꾸 돌아갑니다. 

물 위의 날개 세일과 물 아래 날개 킬에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세일은 축범이나 각도 조절로 힘을 바꿀 수 있는 반면, 킬은 고정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 차이를 조타로 보완해 침로를 유지합니다. 하지만 조타대를 과도하게 사용하면 저항이 커져 배가 느려집니다.

장정 둘이 조타대에 매달려야 했던 요트는 뱃머리가 강하게 풍하로 돌아가려는 힘에 저항하고 있었습니다. 바람의 힘이 앞쪽에 크게 치우쳤던 이유는 새로 맞춘 메인세일에 문제가 있어 바람을 제대로 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조타대와 싸우기보다는 세일 균형을 맞추는 것이 좋습니다. 

축범해도 바람을 받는 중심점이 바뀝니다. 특히 큰 세일을 작게 줄일수록 변동이 심하겠죠. 이때 스테이세일이 빛을 발합니다. 스테이세일은 배의 중심에 가까이 위치해 있어 뱃머리 균형을 잡기에 유리하고, 갑작스러운 돌풍에도 안정적입니다. 아무리 작게 줄여 놓은 헤드세일도 돌풍에게 따귀를 맞는 순간 뱃머리가 순간적으로 돌아가는 충격을 받습니다. 반면, 뱃머리 끝에 달린 집이나 제노아보다 중앙에 위치한 스테이세일은 같은 바람에 따귀를 맞아도 돌아가려는 힘이 작습니다.

다른 세일 모두 내리고 작은 스테이세일 하나만 사용하면 낮고 안정적인 지점에서 바람의 힘을 받으므로 요트의 안전성을 크게 높입니다. 어리버리 2구간, 캘리포니아의 거친 바다에서 쌓인 트라우마로 얻은 항해거부증을 극복하게 해 준 공신 중 하나가 스테이세일이었습니다. 거센 바다에서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야간 항해에서도 스테이세일에 대한 믿음으로 헤쳐나갈 수 있었거든요. 

이번 편은 선주에게 어떤 평을 들을지 궁금하군요. 구독자님은 어떻게 읽으셨나요? 사실 풀킬과 핀킬요트의 차이, 파도에 대응하는 조타 등 주제가 몇 개 더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어리버리 항해기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 개념으로 다루기엔 너무 전문적인 내용 같더군요. 그래서 '스키퍼 ABC' 시리즈는 여기서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스키퍼 매뉴얼과 함께한 시간이 벌써 3년이 되어갑니다. 덕분에 책 한 권을 꼭꼭 씹어 완독 했고, 성공적으로 스키퍼 데뷔도 했고, 그 사이 긴 항해를 준비하며 공부도 많이 했습니다. 순전히 뉴스레터 덕분에 쓰게 된 여행기는 다듬어 책으로 준비 중입니다. 현재는 브런치스토리에 연재 중이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한번 들러보세요. (여기에서 읽기)

남해에서 북토크와 파티를 하고 돌아가 마지막 구간 항해를 시작한지 곧 1년이 되는군요. 아직 항해기가 없는 미국 LA부터 멕시코 산블라스까지 구간은 뉴스레터로만 가능한 형식의 프로젝트를 해볼 계획입니다. 11월 초에 공지할께요. 

당분간은 굵직한 항해나 요트 관련 프로젝트 계획이 없어 스키퍼 매뉴얼에서 지속적으로 다룰만한 소재가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나누고 싶은 항해 경험이나 요트 이야기가 있으시다면 연락 주세요. 앞으로 한동안 저는 한국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하는 일에 집중할 계획입니다. 멋진 집을 찾으면 집들이겸 파티도 한번 하겠습니다. 

그럼, 편안한 일요일 보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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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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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붐바야

    0
    8 days 전

    안녕하세요. 저는 세일링을 시작한 지 이제 1년 된 초보이고 거제도에 살고 있는 구독자입니다. 한국에서 요트는 대회 아니면 관광상품 위주라 세일링에 대한 정보가 아쉬운 상황에서 ‘스키퍼 매뉴얼’의 글은 아주 친절한 선배의 조언처럼 감사하게 느껴집니다. 한국에 정착하실 곳을 찾으신다니 더 반갑습니다. 정박할 공간(마리나)이나 접근성(교통) 그리고 주변의 인프라 등이 남해보다는 통영/거제가 좋은 편이고 특히, 앞으로 함께 해야 할 ‘요트’와 ‘사람’들이 통영/거제 주변에 훨씬 더 많으므로 통영/거제에 한 표 던집니다. 충분히 알아보시고 최상의 선택을 하실 테니, 어느 지역에서 어떤 방식이든 한국 정착을 응원하고요. 더 많은 사람과 더 많은 요트가 ‘스키퍼 매뉴얼’의 은총을 받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늘 감사합니다~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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