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이번엔 주로 가까운 바다에서 짧은 세일링을 했는데, 그래서인지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오늘은 이 항해에서 인연이 닿은 친구들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4세부터 부모님과 배에서 살다 지금은 자신의 가정을 배에서 이루고 사는 친구, 신혼 직후 배에서 살기 시작하여 네 자녀를 출가시키고 빈배(?)증후군을 극복 중인 커플 모두 정확히 아래와 같은 워딩을 쓰더군요.
"그 뒤 다시는 땅으로 돌아가지 않았지."
본인들은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던진 말이었지만, 그 자연스러운 표현에서 그들이 '바다에서 사는 사람들'임을 느끼게 했습니다.
배에서 생활하는 사람을 리버보드liveaboard라고 하는데요, 저나 선주처럼 일정 기간 항해를 위해 배에서 생활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육지의 집을 팔고 아예 배로 이사와 바다에 사는 것을 말합니다. 북미와 멕시코에서 새로웠던 점 중 하나가 장거리 세일러들 대다수가 리버보드라는 점이었습니다.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가장 많았지만, 더 다양한 형태의 리버보드들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게 내 11번째 배야
산블라스 마리나의 퇴근 시간은 흡혈파리 헤헤네가 정합니다. 헤헤네들이 슬슬 깨어나기 시작하는 오후 네 시. 이날도 육상계류장에 올라가 있는 호라이즌스 호를 물에 내릴 준비를 하다 퇴근하던 길, 역시 퇴근 중인지 차에 짐을 싣고 있는 그링고 커플과 마주쳤습니다. 그러나 이때 말을 건넨다고 섣불리 걸음을 멈추었다가는 금세 헤헤네에 에워싸이게 마련이라, 눈인사만 하고 지나쳤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풍기는 외모가 왠지 파워보트 선주 같았던 탓도 있구요.
알고보니 우리 배에서 멀지 않은 세일링 요트 사람들이었습니다. 게다가 작업대까지 제대로 차려놓고 열 군데도 넘는 선체 블리스터(blister, 선체 표면에 발생하는 수포 형태의 손상이나 변형)를 직접 수리하고 있는 배였죠. 때마침(?) 호라이즌스 호에도 블리스터 문제가 생겨 조언을 구하러 찾아갔습니다. 환한 웃음으로 반겨준 이 친구들은 캐나다에서 온 타냐와 에디라고 했습니다.
꼭 그링고 파워보트 선주같은 외모와 우렁찬 목소리의 에디. 그러나 선체를 두드려 소리를 내며 관찰하는 포스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러더 부분의 블리스터를 보여주니 호라이즌스 호 전체를 꼼꼼히 두드려 점검해 주고, 소리만으로 러더 구조도 파악을 하더군요. 알고 보니 지금 수리중인 배가 무려 11번째 배인, 세일링 요트 매니아였습니다.
전문가에게 받은 처방전이 있었지만 제품을 못 구해 발을 동동 구르던 차, 에디 덕분에 임시처치를 하고 마음을 놓을 수 있었습니다. 블리스터를 제거하다보니 러더 힌지가 노출됐고, 이 상태로 배를 내리면 안된다는 결론을 내리려던 차였거든요(그 먼 멕시코까지 가서 배도 못 타고!). 뿐만 아니라 게이지 없이 대충 감으로 조인 리깅도 봐 주고 계획 중인 항해 계획에도 조언을 해 주었습니다. 에디와 타냐가 없었으면 이번에 항해를 하지 못하고 돌아왔을 수도 있었죠.
타냐와 에디는 우리처럼 캐나다에서 미국 서부해안을 거쳐 멕시코까지 내려온 뒤, 하와이와 알라스카를 거쳐 캐나다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거리로 보면 태평양 횡단과 맞먹는 대장정이죠. 그 배가 젊은 시절부터 요트 매니아였던 에디의 열 번째 배였다고 합니다. 열 번째 배는 은퇴하지 않고, 매년 여름 캐나다에서 활약을 하고 있다는군요. 꿈꾸던 '로망'을 추구하다 고생 끝에 멕시코에 도착하고 진이 빠진 대부분 초보 세일러들이 멕시코에서 배를 팔려고 애쓰는 것과 달리 말입니다.
멕시코에 급매로 나오는 배가 많다는 걸 아는 에디는, 멕시코에서 좋은 가격에 배를 한 척 더 사 수리중이었습니다. 이 배는 겨울 시즌에 따뜻한 멕시코 해역에서 활약할 예정입니다. 많은 은퇴한 캐나다인들이 철새처럼 추운 겨울은 따뜻한 나라에서 보내고 날씨가 좋아지면 캐나다로 돌아오는데, 에디와 타냐는 배 두 척으로 은퇴 캐나다인의 라이프스타일을 실현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다 세일러
월수금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 사이, 육상 계류장에 올라가 있는 호라이즌스 호에는 청아한 목탁 소리같은 게 들립니다.
딱. 딱. 딱. 딱.
일정한 간격의 돌 쪼는 소리.
우리 옆 배의 브렌틀리가 선체를 쪼는 소리입니다. 헤헤네 방지를 위해 후드티에 긴팔 긴바지로 무장하고 하루 종일 같은 자세로 정을 칩니다. 어렸을 때 교과서에서 읽은듯한 '방망이 깎던 노인' 이야기가 세월의 두께를 뚫고 떠오르더군요.
브렌틀리의 배는 어마무시한 '페로 시멘트ferro-cement' 배입니다. 네, 건축 공사 현장에서 많이 보는 그 철근과 시멘트요... 물에 떠야 하는 배에 상상하기 어려운 재질이지만 나름의 장점이 있어 한때 많이 만들었습니다. 저도 책에서만 읽었지 실제로 보는 것은 태어나 처음이었어요. 워낙 오래된 책이라 요트 재질 중 하나로 다루긴 하지만 읽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 매번 건너뛰는 챕터였죠.
각종 히피 배와 요상한 개조를 한 '이국적인' 배들이 많은 이 곳에서도 페로 시멘트 세일링 요트의 존재감은 단연 사람을 압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한 구석에서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시멘트 표면을 쪼아내는 브렌틀리의 장인정신이란...
그라인더로 선체를 갈면 너무 매끈해져 안티풀링 페인트가 안 붙을까 염려해, 무려 정과 망치를 선택했다는 브렌틀리는 남아프리카 출신 젊은피입니다. 이렇게 독특한 배를 타는 사람들 대부분 스스로를 특별한 세일러라고 여기는 것과 달리, 브렌틀리는 본인이 '어쩌다 배를 사게 되었다'고 합니다. 미국에 거주하던 중 여자친구와 바다가 보이는 멕시코 해변에 집을 한 채 샀고, '바다가 코앞인데 우리도 배나 사 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미국 워싱턴주에서 배를 샀다고 합니다. 이전에 세일링 경험이 있던 것도 아니구요.
남아프리카에는 11개의 공용어가 있고 브렌틀리는 네덜란드어에서 유래한 아프리칸Afrikaans이 모국어라고 합니다. '배나 사볼까'라는 묘한 악센트의 말과 머리에 떠오르는 거친 북미 서부 태평양 사이 괴리감이 느껴졌습니다. 한술 더 떠, 벤틀리와 여자친구는 누구나 항해를 만류하는 10월이나 되어 출항을 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 진짜로 가벼운 마음으로 출항했구나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브렌틀리는, 위험한 겨울 시즌에 항해를 무사히 마친 데에는 페로 시멘트 배의 공이 컸다고 말했습니다. 배가 원체 무거워서, 바다가 아무리 험해도 묵직하게 제 갈길을 가 주었다고 합니다. 길이는 호라이즌스 호와 큰 차이가 없어 보였는데 무게가 세 배 가까이 나가더군요. 물론, 정박지에서 오랜 시간 기다리더라도 꼭 안전한 날씨를 기다려 출항하기도 했다지만요.
브렌틀리의 바닷가 집은 산 블라스에서 차로 한 시간 이내에 있어, 회사 출근하듯 여자친구와 월수금-화목토 교대로 와서 하루 여덟 시간씩 정을 치고 퇴근한다고 합니다. 이번에 우리가 호라이즌스 호를 내려 여행을 마치고 다시 산블라스 마리나에 돌아가니 여전히 석공의 도를 닦고 있더군요. 선체를 다 쪼려면 앞으로 몇 달은 더 걸릴 거라고 하네요.
그정도 뚝심이면 뭘 해도 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더군요. 그래서 젊은 나이에 일찌감치 은퇴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신나게 쓰다보니 글이 너무 길어져서 두 번의 뉴스레터로 나누었습니다. (너무 긴가요?) 타냐, 에디와 브렌틀리가 파트타임 리버보드라면, 다음주 일요일에 소개할 친구들은 수십년동안 배에서 살고 있는 풀타임 리버보드들입니다. 부모를 따라 배에서 삶을 시작한 크리스찬, 배에서 자녀 넷을 낳고 출가시킨 조니와 가이의 이야기를 들려드릴께요.
편안한 일요일 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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