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구독자님,
핸드폰 신호가 없는 외딴 섬 이사벨라에서 스타링크 잠깐 켜고 소식 전합니다. 작년, 카보 산 루카스에서 3박 4일 강풍을 뚫고 도착했을 땐, 반대편 산블라스 쪽에선 겨우 40마일 떨어진 거리라 생각보다 외딴 섬이 아니라며 실망도 했는데, 핸드폰 안 터지는 걸 보니 외딴 섬이 맞습니다.
오랜만에 맑은 물에서 맘편히 눈 뜨고 수영하고 목욕도 하고 나니, 역시 이사벨라 섬으로 돌아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드라마틱한 바위섬에 하얗게 부딪치는 파도와 푸른 물도 장관이지만, 이 곳은 무엇보다 새들의 고향. 곧 아침식사를 마치고 새들을 만나러 섬에 오를 계획입니다. 지금 제 머리 위로 군함조, 펠리컨, 갈매기 등이 떼지어 날고 있습니다. 작년에 봤던 어설픈 새끼 새들도 이제 어른이 되어 저 무리에 끼어 있겠죠?
올해에는 주로 짧은 데이세일링만 하고 있는데, 여기 오는 여정은 좀 길었습니다. 아직 북서풍이 부는 시기, 바람을 거슬러 북서쪽 55마일을 항해해야 했거든요. 몇날 며칠씩 연속해 항해하던 작년에 비하면 짧은 거리지만, 이번엔 그때처럼 입에 칼 물고 하는 항해 컨셉이 아닌만큼 부담은 좀 있었습니다. 해류와 바람을 거슬러 가야 하는 데에다 아직 해가 짧아 야간항해를 하기로 했습니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종일 항해하는 게 힘들어서 내린 결정이기도 했고, 이제 야간항해에는 도가 텄다는 자신감도 한몫 했습니다.
그러나 웬걸, 무섭더군요.
파도와 바람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바하 캘리포니아 반도가 방파제 역할을 해 주어 큰 파도는 없는 바다이고, 바람은 오히려 너무 없어서 밤새 엔진 소음이 고충이었으니까요. 문제는 달이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일정이, 달 없는 날 야간항해를 하게 되었거든요. 해 진 뒤 남아있던 마지막 빛까지 완전히 사라진 시간은 고작 저녁 일곱시 좀 넘은 시간. 뱃머리는 완전한 암흑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어렴풋이 수평선이라도 좀 보이면 덜 무서울텐데 완전한 어둠을 뚫고 가자니 겁이 덜컥 났습니다. 이 정도로 빛이 없으면 거리감과 공간감이 사라지며 배가 공중에라도 떠있는듯 불안한 기분에 휩싸입니다. 종종 저 멀리 좀 희뿌연 빛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망망대해에 희뿌연 빛이라니, 긴장을 했다가 그게 곧 반사되는 별빛임을 깨달았습니다. 오죽 빛이 없었으면 바다에 반사되는 별빛이 보였을까요...
이런 암흑 속에서는 콕핏에 한 사람만 남아있기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2주 가까이 항해중인 배에 물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엔진은 엔세나다 이후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었고, 데크에서 갑자기 돌발상황이 생길만한 날씨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더군요. 그래서 저녁 7시부터 시작하려고 했던 3시간 교대를 밤 11시가 되어서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불안한 마음에 교대 시간도 2시간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역시 지나친 자신감은 금물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고작 땡볕항해 좀 피하려고 야간항해를 하다니.. 동시에, 어휴 작년엔 어떻게 그 강풍 속에 며칠씩 야간항해를 했을까 신기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일 년만에 작년에 얻은 경험들이 죄다 리셋되어 버린 건 아닐까요?
이 항해를 시작하기 전, 매년 여름 크루즈를 함께하던 배 선주 친구가 올해 스키퍼를 맡아줄수 있겠냐고 물었습니다. 그렇잖아도 슬슬 지중해로 돌아가 세일링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던 참에요. 하지만 망설임과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삼 년 동안 태평양의 거친 바다를 항해하며 그동안 익숙하다고 자신하던 것들을 의심하고 새로 배우며 겪은 경험들이, 지중해 항해 경험을 리셋해 버린 건 아닐까 걱정이 됩니다. 그만큼 두 바다가 다르고, 필요한 역량도 다른데 내가 다시 지중해에 돌아가서 배와 크루들을 책임지는 역할을 맡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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