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즌드 어리버리

씨즌드 어리버리 19

요트보다 호텔이 좋은걸

2024.04.21 | 조회 1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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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퍼 매뉴얼

바다, 항해, 세일링 요트에 대한 이야기

엔진 문제로 일정이 많이 늦어졌던 작년 오레건 주, NOAA(미 국립해양대기청) 직원으로부터 겨울엔 바다가 험하기 때문에(이보다 더요?) 항해가 매우 위험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배를 육상 계류장에 올려놓고 일 년 가까이 쉰 뒤, 여름에 항해를 재개했습니다. 반면, 멕시코는 허리케인 시즌이 완전히 끝나는 11월 이 되기 전에는 본격적으로 항해를 할 수 없습니다. 북쪽 바다에선 험하다고 피하던 겨울 바다가, 남쪽에 오자 더 안전한 바다가 됩니다. 이제 우리의 급선무는 겨울이 올 때까지 세 달 동안 호라이즌스호를 안전하게 놓아둘 곳을 찾는 것입니다. 

바다에 접한 대도시인만큼 LA에는 수많은 마리나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며칠 단기 계류만 가능할 뿐, 장기계류는 다들 꽉 차 있었습니다. LA 현지인들도 수년간 대기자 명단에 올려놓고 기다리는데 외지인이 삼 개월 배 놓을 자리를 며칠 안에 찾는 일이 과연 가능은 할까요? 곧 자리를 비워줘야 할 마리나 델 레이에서의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그렇다고 길바닥에 나앉을 수도 없는 호라이즌스 호를 어떻게 해야 할지 조바심이 납니다. 

 

우리좀 받아줘요

절박한 마음으로 종일 배 안에 머물며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한 세일링 커뮤니티에서 '윌밍턴Wilmington'이라는 이름을 접했습니다. 

"윌밍턴엔 웨이팅 필요 없이 바로 자리가 있길래 즉시 예약했어. 어디냐면 LA 산업항구 바로 옆이야. 동네 자체는 범죄율 높은 걸로 평이 안좋지만 관리자가 상주해서 마리나 안은 안전해. 가격은 비교불가로 좋고, 배를 단순히 '저장'하는 목적으론 더할 나위 없었어."

동네는 후졌으나 가격 저렴, 마리나 안은 안전, 대기 필요없고 '저장'에 최적. 딱 우리의 목적에 맞는 곳이라 눈이 번쩍 띄었습니다. 우리는 마리나에서 입출항을 하며 세일링을 즐기는것 보다는 한국에 갔다 돌아오는 11월까지 배를 단순히 '저장'할 곳을 찾고 있었으니까요. 호라이즌스 호를 어디 다리 밑에라도 묶어두고 가야 하나 좌절하던 마음에 한 줄기 빛이 비치는 것 같습니다. 

'윌밍턴 마리나'로 검색을 해 보니 전문적인 웹사이트에, 시설이 좋고 큰 마리나인듯 했습니다. 전화를 걸어 정보를 알아보니, 그러나, 조건이 굉장히 까다로웠습니다. 통상 장기 계류 계약에 보험증이나 선박 등록증 등이 필요한데요, 이 곳은 12개월 이내의 서베이 레포트까지 요구했습니다. 서베이 레포트는 요트의 상태를 점검한 보고서로, 엔진, 선체, 전기 시스템 등을 전문가가 살펴보고 안전 여부를 확인해 발행하는 레포트입니다. 주로 배 사고 팔때 만드는 문서로, 계류 계약에 요구하는 경우는 처음입니다. 호라이즌스 호 역시 배 구매할 때 의뢰했던 수년 전의 레포트가 있을 뿐입니다.

1980년 건조된 배라고 하니, 그렇다면 레포트가 있더라도 불가능하다며 차갑게 퇴짜를 놓습니다. LA의 높은 월세 때문에 상태 안 좋은 싸구려 배를 구매해 마리나 비용만 내고 집 대신 사용하려는 사람들을 피하기 위한 정책인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집세를 아끼려고 배 생활을 하는 게 아니다, 캐나다에서 멕시코까지 항해 중에 허리케인 시즌을 피하려는 것이다, 우리 배는 애정으로 관리하는 배이다 설명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다소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LA에서는 호라이즌스 호처럼 오래된 배는 계류장을 못 찾을 수도 있는 것인가. 산디에고까지 가서 찾는다 한들 LA와 다를 것인가.. 

이 마리나는 지점이 여러 개 있는듯 해, 다른 지점들에 전화를 걸어 시치미를 떼고 똑같은 문의를 했습니다. 수 차례 이 '지점'들에 전화를 돌린 이후에야 윌밍턴이 마리나 이름이 아니라 LA 외곽의 한 도시 이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서울과 안양처럼요. 즉, 이 '지점'인줄 알았던 곳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각기 다른 마리나였던 것이죠. 인터넷 검색을 계속하다 보니 이 마리나들 분위기가 좋다는 평을 많이 접합니다. LA 항구 입구까지 먼 길을 항해해야만 태평양에 나갈 수 있긴 하지만 가격이 저렴하고 진짜로 배를 즐기는 선주들이 많은 데다가 서로를 돕는 문화가 있다고 합니다. 정보를 찾을수록 매력적인 동네 같은데 문제는, 윌밍턴마저 전화를 하는 족족 모두 만석 소식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이제 가기 싫다고 샌디에고를 제외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닌 것 같습니다. 범위를 넓혀 샌디에고는 물론 이미 지나온 벤츄라 등을 포함, 포인트 컨셉션에서 멕시코 국경 사이에 있는 모든 마리나들의 목록을 만들어 A4용지에 써 내려갔습니다. 혹시라도 놓친 곳이 있을새라 전자해도를 확대해 남캘리포니아 해안에 있는 마리나들을 이 잡듯이 뒤져 목록을 만드니 A4용지 두 장이 찹니다. 

그 뒤엔 전화를 걸어 만석을 확인하는대로 목록에 줄을 죽죽 그어 지워 내려갔는데 이제 단 세 곳만 살아남았습니다. 두 곳은 35피트 자리라 우리 호라이즌스 호에게는 약간 작습니다. 그나마 그 중 하나는 월 계류비가 한 달 3000불이 넘습니다. 3개월이면 무려 9000불.. 이 곳 역시 미련 없이 볼펜으로 죽죽 그어 지워버립니다. 다른 하나는 몇 차례 통화 후, 우리 배가 너무 커서 안 되겠다며 최종적으로 거절을 했습니다. 마지막 하나는 샌디에고 남쪽의 출라 비스타Chula Vista 마리나로, 우리와 비슷한 루트의 배들이 대부분 이 곳에 몇 달씩 배를 놓는 것 같았습니다. 

A4용지 두 장을 꽉 채운 목록의 마리나들에 전화를 하고 거절당하는 것을 반복하며 패배감이 커졌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패배감을 이겨내고 더 적극적으로 해결책을 찾아보기로 결심했습니다. 37피트 호라이즌스 호가 선석에 비해 너무 크다며 거절했던 윌밍턴의 마리나에 한번 더 부딛혀 보기로 했습니다. 차를 렌트해서 마리나 주소로 찾아가, 주인의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어떻게든 졸라 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차를 렌트하려고 보니 가장 저렴한 차종 중 하나가 ㅌㅅㄹ... 게다가 빨간색 차를 받았습니다. 

"역시 캘리포니아라 다르구나!" 

푸른 하늘, 쏟아지는 햇볕, 건조하고 따뜻한 캘리포니아의 바람.. 기존의 로빈슨크루소 룩에서 벗어난 우리는 모처럼 문명인의 복장을 하고 문명인의 전기차를 타고 파노라마 썬루프 밖으로 휙휙 지나가는 해변 도시의 높은 야자수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윌밍턴의 마리나를 향해 씽씽 달렸습니다. 오늘, 왠지 예감이 좋습니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
영화 '캐스트 어웨이'

 

윌밍턴

옛날 구로공단이 이런 느낌이었을까요? 인적 없는 회색 아스팔트와 끝없이 쌓여 있는 컨테이너들, 복잡한 스카이라인을 이루는 발전소 철탑과 연기... 심지어 티비 뉴스에서나 보던 쉐일가스도 끼익 끼익 녹슨 팔을 올려가며 시추를 하고 있었습니다. 인간 멸종 뒤 기계가 정복하는 지구의 모습이 이렇게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이 곳은 엄청난 물동량을 자랑하는 LA항구의 백스테이지 같은 곳인 것 같습니다. 갑자기 도로에 차단기가 내려오더니 컨테이너를 실은 기차가 지나가기 시작하는데, 컨테이너 뒤의 컨테이너 뒤의 컨테이너.. 끝이 없습니다. 10분이 넘는 시간 차단기 앞에서 멍때리다 보니 한껏 멋부리고 빨간 차를 몰고 들뜬 기분으로 엉덩이가 들썩들썩한 우리 모습이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가 사람들이 잘 오는 곳은 아닌가보다'라는 깨달음을 얻고 드디어 기차길을 건넜습니다. 

마리나들이 모여있는 구역에 가니 한 마리나 건너 다른 마리나. 우리가 이미 전화를 걸었던 마리나 이름들도 보입니다. 다들 규모가 작고 영세해 보였습니다. 인터넷 검색으로 나오지 않던, 처음 보는 이름들도 꽤 보입니다. 지금 가고 있는 마리나를 설득하는 데 실패하면 이 곳들을 하나하나 다 방문해서 어떻게든 자리를 하나 얻어내고야 말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마리나에 도착합니다. 

입구 안으로 들어서니 아담한 마리나 사무실 앞마당 오른쪽으로 까페가 보입니다. 수많은 인터넷 검색 중에 읽었던 "특히 그 마리나 카페 있는 곳 근처가 분위기가 좋다"던 리뷰가 떠오릅니다. 야외 테이블에서 수다 떠는 사람들, 파라솔 그늘, 화창한 날씨. 작지만 깨끗한 시설.. 마음이 환해집니다. 어떻게든 이 곳에 호라이즌스 호를 데려오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 번 합니다.

마리나 사무실. 다행히 사장도 자리에 있습니다. 최근 전화 통화 내용을 상기시킨 뒤, '하지만 미안한데...'라는 말이 나올 틈을 미처 주지 않고 곧바로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드러누웠습니다. 우리의 절박하고 안타까운 현재 상황을 설명한 뒤, 자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마리나를 설득시키기 위해 고심해 준비해 간 멘트도 쏟아부었습니다: 

"우리는 지구 반대편의 한국에 갔다가 3개월 뒤에나 돌아올 거기 때문에 아주 구석진 위치도 전혀 문제가 없고, 혹시나 수심이 살짝 낮더라도 우리 배는 튼튼한 풀킬이니까 물 빠졌을 때에도 견뎌낼 수 있어." 

이번에도 상대가 말할 찰나를 허하지 않고 미리 챙겨둔 어리버리 항해기 1탄 책을 들이밀며, 

"우리가 지금 이 항해기 2탄을 쓰는 중인데 너희 마리나가 등장할꺼야!" 라는 세일즈로 마무리했습니다. 

마리나 주인보다는 대학 교수같은 점잖고 신중한 분위기를 풍기는 토니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런데 37피트라도 실제 LOA는 더 길지 않니?" 라고 묻습니다. 

 

요트 해븐

이 마리나의 이름은 요트 해븐Yacht Haven, 요트의 안식처라는 뜻입니다. 배를 3개월간 저장만 하겠다는 멘트의 효력이었는지, 우리의 절박한 눈빛에 토니의 씨맨십이 발동했는지, 우리는 요트 해븐에 자리를 얻는데 성공합니다. 고맙게도, 우리 배에게 적당한 자리를 내 주기 위해 다른 배를 옮기는 번거로움도 감수한 것 같습니다. 안 될것 같던 LA에서 마리나 찾기에 성공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천하를 얻은들 이보다 기쁠까 싶은 마음도 듭니다. 

https://www.rpvca.gov
https://www.rpvca.gov

마리나 델 레이에서 나와 윌밍턴까지 가는 20여 마일 짧은 길조차 편안한 세일링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이번에도 트랜스미션 오일로 인한 패닉으로 항해를 시작했죠. 늘 하듯 오일을 넣고 전진 후진 테스트 뒤 계류줄을 풀었는데 또다시 전진이 먹통이었습니다. 이번엔 바람도 세게 불고 있었습니다. 하염없이 바람에 밀려 떠내려가다 옆 선착장에 가까워지자 조타대를 돌리고 있는 힘껏 후진해서 최대한 안쪽으로 배꼬리를 들이민 후, 카우보이처럼 계류줄을 공중에 날려 가장 가까운 클리트를 포획함으로써 위기에서 벗어났습니다. 간담이 서늘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다행히 LA에 배 놓을 자리를 찾아서 이 상태로 더 항해를 안 해도 된다는 것이, 다시한번,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어쩌다보니 오후 늦게 항해하게 되었기에 강풍도 만났습니다. 이번에도 팔로스 버디스Palos Verdes의 튀어나온 절벽 지형을 지난 직후였죠. 이제는 미리 대비할 수 있었습니다. 메인세일을 내리고 제노아도 조금만 편 상태로 바람 맞을 준비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A항 앞에서 입항을 위해 배를 돌려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니 그 손수건만하게 열어놓은 제노아로도 배가 무섭게 기울더군요. '미친' 바람이라는 말이 절로 나왔습니다. 이게 늘 일어나는 정상적인 상황인가 궁금해 토니에게 물어보니, 그 바람을 이 동네에선 '허리케인 걸치Hurricane Gulch'라고 부른다는군요. 일년 중 가장 더운 이 때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한밤의 발전소 갬성
한밤의 발전소 갬성

배를 묶고 샤워를 하자마자 노서방 커플이 마리나로 찾아왔습니다. LA 현지인임에도 이 동네에 와본 적이 없다는 이들은 컨테이너 기차가 지나가는 차단기 앞에서 한 시간 가까이 서 있었다고 하더군요.

밤중의 산업지역 분위기, 컨테이너를 줄줄이 싣고 가는 기차의 경적소리, 멀리 보이는 발전소 불빛.. 그 한 구석의 아늑한 마리나. 선주는 기분을 낸다며 모처럼 오래된 기름등에 불을 붙였습니다. 그동안의 긴장이 풀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친구들과 노란 불빛 아래 콕핏에서 술 한잔 함께 하는 시간의 행복은 표현할 수 없습니다. 

허리케인으로 비가 쏟아지는 일은 없었지만, 꿈에 그리던 호텔 숙박도 했습니다. 집 없이 배에서 사는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 일주일에 3일 이상 마리나 숙박을 금지하는 마리나 정책 덕(?)이었죠. 바삭한 침대시트와 레버를 누르면 한번에 내려가는 화장실, 목욕 가방 싸 들고 가지 않아도 되는 샤워실... 꿈에 그리던 순간입니다. 이제 세일링 요트보다 호텔이 좋은 것 같은데 어쩌지 하는 걱정은 삼개월 뒤로 미루기로 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어리버리 항해기 2탄입니다. 그 뒤, 한국에서 무사히 동생의 결혼식을 치르고 남해에서 독자님과 만나는 자리도 만들며 가을을 지낸 뒤 10월말에 LA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그 이후에 일어나는 LA-멕시코 이야기들은 생생한 라이브 항해일기 '어리버리 로그'로 이어졌습니다. 그 중 첫번째 로그는 여기.

이로서 어리버리 항해기는 마무리가 됩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나요?

다음 뉴스레터는 항해 중에 유용하게 쓴 스마트폰 앱에 대해 쓸 예정이예요. 그리고 앞으로 한동안은 항해를 정리하는 내용, 항해를 하며 배운 내용 등을 담을 예정이예요. 그리고 격주로 발행을 하려고 합니다. 

저는 두 달 간의 이탈리아 일정을 마치고 이달 말에 한국에 간답니다. 조만간 또 남해에서 뭔가 재미있는 일을 꾸밀 수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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