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즌드 어리버리

씨즌드 어리버리 17

뉴스의 현장

2024.04.07 | 조회 129 |
0
|

스키퍼 매뉴얼

바다, 항해, 세일링 요트에 대한 이야기

“격렬하게, 열렬히 자다”

눈을 뜨자마자 머리맡의 항해 수첩에 적었습니다. 자는 행위 자체가 이렇게 역동적일 수 있다니 감탄이 나옵니다. 쌓인 피로를 풀려는 몸의 적극적인 활동이 느껴지는 잠을 자고 일어났습니다. 깨어나자마자 “열심히 자느라 수고했다”고 하고 싶을 정도로 말이죠. 

서서히 잠이 깨고 정신이 좀 들자 어젯밤의 긴박했던 상황이 차츰 기억납니다. 온통 화사한 햇볕이 가득찬 배 안에서 눈을 뜬 탓에 현실로 돌아오는 데에 시간이 좀더 걸린 것 같습니다. 콕핏으로 머리를 내밀자, 한낮의 태양을 반사하는 새파란 바다가 눈부십니다. 그 위를 세일링 요트, 투어 보트, 스탠드업패들, 카약 등, 오로지 놀기 위한 수상기구들이 신나게 누비고 있는 모습이 마치 지중해를 보는 것 같습니다. 허리케인이 다 뭔가요? 날이 밝자 갑자기 다른 세상이 온것 같습니다. 

마리나 들어가는 일은 그야말로 스릴이 넘쳤습니다. 그동안 항해를 하면서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생각해볼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하지만 산타바바라 같은 인기 휴양지에 오려면 빠뜨리지 말았어야 할 중요한 정보: 오늘은 하필 토요일입니다... 들고 나는 배 교통량만 해도 엄청난데, 항구 안에서 배 피하는 법도 모르는 듯한 관광객들의 카약과 스탠드업패들이 스릴을 더합니다. 여기는 항구 내부에서도 세일 펴는 게 허용이 되는지, 그 정신 없는 와중에 세일로 항구 안에 들어가는 요트들도 있습니다. 바 크로싱이 어려웠던 북쪽 항구들과는 다른 의미에서 입항 난이도가 정말 높습니다. 

https://santabarbaraca.gov/things-do/waterfront/visitor-activities/paddling-santa-barbara-harbor
https://santabarbaraca.gov/things-do/waterfront/visitor-activities/paddling-santa-barbara-harbor

간 떨어질 뻔한 순간을 몇 차례 겪은 뒤, 그 시장통을 뚫고 무사히 주유 선착장에 배를 댈수 있었습니다. 여기 직원이 불친절하다는 리뷰가 많았는데 웬걸, 주유 내내 수다가 끊기지 않았습니다. 직원은, 계류줄을 풀고 우리 배가 선착장에서 멀어질 때까지 손 흔들며 소리쳐 인사했습니다. 

"너희들 산타바바라에서 좋은 시간 보내길 바래!" 

날씨가 화창해서 그런걸까요? 오레건과 워싱턴 사람들도 친절하고 따뜻했지만, 캘리포니아 사람들은 그에 더해 밝고 명랑한 느낌이 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만난 첫 현지인에게 환영을 받으니 기분이 좋습니다. 주유비가 많이 나와 좀 놀라긴 했지만요.

갤런당 단가도 높았지만 생각보다 주유량이 많기도 했습니다. 이번엔 엔진을 낮은 RPM으로, 고작 35시간 썼을 뿐인데도 연료 소모가 지나치게 많았습니다. 보통의 배였으면 30갤런이 채 안 나와야 할텐데 무려 54갤런, 두 배 가까이 쓰고 있습니다. 불안한 느낌이 스물스물 올라옵니다. 엔진 문제는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물가 비싼 동네의 스타트를 끊는 산타바바라의 계류비는 37피트 기준 하루 65달러. 이탈리아 인기 휴양지의 계류 비용을 생각하면 비수기 요금 정도밖에 안되지만, 허리케인이 완전히 지나갈때까지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하므로 부담이 큽니다. 지난 몬테레이에서 42피트인 LOA(부속물 포함 총길이)를 은근슬쩍 37피트라고 했다가 무안을 당한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37피트를 주장해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마리나 오피스에서 별 문제삼지 않고 자리를 준 것은 좋은데, 이번에도 35피트용 작은 자리입니다. 배를 대고 보니 앞뒤로 다 튀어나옵니다. 앞은 선착장에서 걷는 사람에게 방해가 되고 뒤는 들고 나는 배에게 방해가 될수 있는 상황. 최대한 덜 튀어나오도록, 그리고 (무엇보다) 덜 튀어나와 보이도록 배를 대각선으로 고정해 계류줄을 묶고 나니, 이제 쫓겨날 염려는 없어 보입니다.

 

엄마는 모르는 뉴스

비싼 동네에 입항해서 눈물겨운 자린고비 작전을 펴는 노력이 허무하게 허리케인 힐러리는 카테고리 4에서 2까지 내려가더니, 오늘 아침엔 1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80년만에 미국 캘리포니아에 상륙하는 허리케인으로 뜨거운 뉴스거리였던 힐러리는 이제 열대성 폭풍으로 등급이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선주의 말이 명언입니다: 

"결과적으로 배 돌릴 필요는 없었지만, 배 돌리는 게 맞았다" 

안전을 우선시한 선택에 후회는 전혀 없습니다. 허리케인을 딱 맞게 예측할 수 없다면야, '생각보다 약했네'가 '이럴줄 알았으면 피항할걸' 보다는 백배 나으니까요. 

어제의 화창한 햇볕은 자취를 감추고 오늘 산타바바라의 하늘은 잔뜩 찌푸렸습니다. 하지만 강풍이 불거나 비가 오지는 않습니다. 100마일 떨어진 LA에는 비가 쏟아지고 나무가 쓰러지고 도로에는 온통 경찰이 깔렸다고 합니다. LA에서 폭우를 뚫고 두 시간이나 운전해 우리를 만나러 온 선주의 친구 노서방이 전한 따끈따끈한 현장 상황에 의하면요.

노서방과 선주는 두 살 터울의 형 동생으로, 만나면 서로 투닥투닥 다투는듯 하지만 실제로는 가장 친한 친구입니다. 허리케인 경보에 배 타고 있는 우리를 걱정하던 노서방이 피항 소식을 듣자마자 호우경보에도 불구하고 산타바바라까지 달려온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직원을 여럿 둔 사업가다운 단호한 결단력과 계획한 바를 관철시키는 추진력은 오늘 점심 먹을 곳을 정하는 가운데에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평소 오토바이 라이딩을 즐기는 오하이Ojai라는 곳을 보여주고 싶었던 노서방과 와인으로 유명한 산타바바라의 와이너리에 가고 싶던 선주의 의견이 충돌했습니다. 중요한 항해 아젠다 중 하나였던 나파밸리Napa Valley 와이너리 방문이 무산된 만큼, 선주는 산타바바라 와이너리라도 꼭 가고 싶었습니다. 끈기의 화신 철인답게, 포기하지 않고 와이너리에 가고 싶다는 의사를 지속적으로 표하자, 노서방은 전략을 바꿔 나에게 캐스팅 보트를 주기로 합니다.

"알레씨아는 와이너리가 좋아요 아님 오하이에 한번 가 보고 싶어요?"

"오하이..에 가볼까요 그럼?"

갑작스레 와이너리가 좋냐는 질문을 받으니, 순간 와이너리 단체투어하는 미국 관광객들의 인상이 떠올라 오하이를 선택하고 맙니다. 이로써, 선주가 밴쿠버에서 출항하던 시절부터 '캘리포니아 가면 꼭 가겠다'며 벼르던 와이너리 방문은 또한번 무산이 되고 셋은 오하이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가벼운 비 속에 언덕을 올라가는 도로를 달려 조그만 동네 오하이에 도착합니다. 주말이면 꽤 붐비는 곳이라는데, 비 덕분인지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노서방이 자주 찾는다는 쉬크한 식당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자리에 앉을 수 있었습니다. 조용한 음악, 비 오는 창밖,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며 여유롭게 브런치를 즐기는 손님들 사이에 앉아 있으려니 험난한 배 위의 생활이 먼 나라 이야기 같습니다.

'역시 미국은 고급 식당도 샌드위치구나' 생각하며 이제 막 나온 샌드위치를 한 입 물려는 순간 아스팔트 뚫는 천공기 소리가 두두두- 하고 귀청을 때립니다. 순간 머리를 스친 생각은 '미국도 주말에 공사를 하나' 였습니다. 이 생각은 그로부터 2초 뒤 본격적으로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하는 모션과 인지부조화를 일으켰습니다. 의자에 앉은 채로 몸이 좌우로 쏠리고 천장에 매달린 펜던트 전등은 부딪힐듯 크게 흔들렸습니다. 식당 가장 안쪽에 앉아있던 연세 지긋한 손님 무리가 시선을 출구에 고정한 채 빠른 동작으로 식당을 빠져나가고, 맞은편에 앉은 노서방이 다소 얼빠진 표정으로 전화기를 들어 '지금 지진 났는데 거긴 어때?'라고 LA 집에 전화할 때까지도 인지부조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지진..? 옆자리에 있던 선주가 보이지 않습니다. 

선주는 하필 그 타이밍에 화장실에 갔다가 인지부조화의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돌아서자마자 좁은 화장실 안이 흔들리기 시작하는데 그 순간 머리를 스친 생각이, 

"분명 여기는 육지인데 왜 배가 흔들리지.." 

였다고 하는군요. 순간적인 땅멀미인줄 알고 벽을 짚었는데 진동이 심하자 반사적으로 화장실 문을 벌컥 열었다고 합니다. 아까 거동조차 불편해 보이던 노인 손님들이 절도있는 발걸음으로 흔들리는 식당을 나서는 모습을 보고서야 지진이 일어났구나 깨닫고 놀랐다고 합니다. 

막상 지진이 닥치니 대피 생각은 커녕, 이게 지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도 시간이 걸리더군요. 모든 진동이 가라앉은 뒤, 식당 직원이 여기서 고작 3마일 떨어진 진원지에서 발생한 5.0 지진이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몇 시간 후 한국 뉴스를 통해 바로 그 오하이에서 5.1 지진이 일어났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너희 엄마였으면 난 벌써 피가 말라 죽었을거야."

몬테레이에서 만난 이탈리아 할머니의 말이 귀에 맴돌았습니다. 한국의 집에서 편안히 소파에 앉아 저녁뉴스를 보고 있을 우리 엄마는 내가 며칠전 뉴스에 나온 허리케인 힐러리 때문에 피항을 하던 중에 오늘 뉴스에 나온 오하이라는 동네에서 밥을 먹다 지진을 만났다는 것을 전혀 모른다는 사실은 참 다행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남부 로스앤젤레스(LA) 북서쪽에 있는 오하이에서 현지시간 20일 오후 2시 41분쯤 규모 5.1의 지진이 발생했다고 미 지질조사국(USGS)이 밝혔습니다.진앙은 오하이에서 남동쪽으로 7㎞ 떨어진 지점, 대도시 LA에서 약 95km 떨어진 곳으로... (중략) ...이들 도시를 포함한 캘리포니아 남부 지역에는 열대성 폭풍 '힐러리' 상륙에 따른 호우주의보가 내려진 상태로 계속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폭풍우 경보에 더해 이날 오후 지진 발생 알림까지 휴대전화 긴급재난문자로 발송되면서 주민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7752701

 

폭풍우가 지나간 자리

선주와 와이너리냐 오하이냐 투닥투닥 하다 오하이에 가서 지진에 놀라고 산타바바라로 돌아온 노서방은,

"차 있을 때 뭐 필요한 거 없어?" 

라며 친절하게 묻습니다. 선주는 사양도 하지 않고 수퍼마켓을 주문합니다. 

밴쿠버에서 고무보트 타고 다니며 수퍼 장을 본 이후로, 자가 운송수단이라는 것을 동원한 시장 보기는 처음입니다. 시 외곽의 크나큰 미국 대형수퍼의 규모와, 무게 걱정 없이 마음껏 필요한 것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크게 감동시켰습니다.

정신없이 카트에 물건을 담으며 종횡무진 수퍼마켓을 활보한 우리를 무사히 배까지 바래다 주고 LA 집을 향해 느즈막히 출발한 노서방에게서 한참 뒤에야 전화가 왔습니다. 가는 길은 더욱 난리도 아니었다고 하더군요. 비가 너무 많이 와 도로 상황이 매우 위험했던 데에다, 집에 도착하니 큰 나무가 쓰러져 있었다고 합니다. 허리케인 힐러리가 세력이 약해져 열대성 폭풍으로 바뀌긴 했지만 진로를 틀지 않고 LA를 관통한 만큼 피해가 컸습니다.

산타바바라에도 늦은 시간 비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새벽 2시경에는 배가 무섭게 흔들리고 바람에 흔들리는 할야드가 알루미늄 마스트를 때리는 소리가 요란했습니다. 아무래도 이 바람에 대각선으로 배를 묶어 놓은 게 불안해서, 계류줄을 고쳐 매고 할야드도 소리가 나지 않게 조치했습니다. 영향권 밖에 있다는 산타바바라에서도 이렇게 무섭게 바람이 부는데 LA에 있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봅니다. 막상 허리케인 세력이 약화되자 산타바바라 계류비가 아까운 마음이 살포시 머리를 들기도 했지만, 이 곳으로 피항한 게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자기 일처럼 강한 목소리로 우리가 이 곳에서 피항하도록 밀어붙인 장피에에게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그리고 장피에처럼 다양한 기상 자료를 찾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갖고 싶어집니다. 

힐러리는 바하 캘리포니아의 최남단 카보 산 루카스Cabo San Lucas 에 상륙해서, 바하 캘리포니아를 따라 올라오며 멕시코에서는 사망자를 냈다고 합니다. 주로 대서양과 접한 동부 해안에서 발생하는 허리케인이 태평양 쪽의 바하 캘리포니아에 상륙한 것도 예외적인 상황이고, 특히 미국 캘리포니아를 향해 북상한 것은 84년만에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최근의 전 지구적인 기상이변과 관련이 있는 걸까요?

https://www.costcotravel.com/Cruises/Offers/NCLBLIMEX20231031
https://www.costcotravel.com/Cruises/Offers/NCLBLIMEX20231031

카보 산 루카스를 목표로 남하하고 있는 우리는 호라이즌스호를 미국-멕시코 국경 바로 밑의 엔세나다Ensenada에 남겨두고, 허리케인 시즌이 끝나는 3개월 뒤까지 한국에서 기다린 뒤 돌아와 남하를 계속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힐러리에 한바탕 놀라고 나니, 허리케인 안전지대라던 엔세나다가 과연 올해도 안전한 것일까 의심이 들기 시작합니다. 배를 멕시코 대신, 더 북쪽에 있는 LA에 올려놓고 가는 옵션도 고민을 해 봐야할듯 합니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며 주체할 수 없는 행복한 감정이 밀려옵니다. 그렇다면 항해를 LA까지만 하면 쉴 수 있다는 얘기 아닌가요.. 빨리 이 항해를 끝내고 싶은 마음만 간절합니다. 

폭풍우가 지나간 하늘
폭풍우가 지나간 하늘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스키퍼 매뉴얼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 2024 스키퍼 매뉴얼

바다, 항해, 세일링 요트에 대한 이야기

뉴스레터 문의 : info@easysailing.kr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 서초구 강남대로53길 8, 8층 11-7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070-8027-2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