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즌드 어리버리

씨즌드 어리버리 16

허리케인에 흔들리는 갈대

2024.03.31 | 조회 1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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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퍼 매뉴얼

바다, 항해, 세일링 요트에 대한 이야기

아무래도 징조가 좋지 않아서, 구원투수 장피에에게 메세지로 이 예보 그림을 보내며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NOAA 예보에 이런 이상한 게 보였는데, 그 때문인지 요즘 예보가 휙휙 변하는 느낌이야. 내일 새벽에 닻 올리고 나가려고 했는데, 날씨 안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떠나는 게 나을까?"

장피에는 다소 일반적인 조언을 해 주었습니다.

  1. 일반적으로, 이렇게 불쑥 튀어나온 지형은 5해리 이상 널찍이 떨어져서 도는 법.
  2. 포인트 컨셉션은 바람이 약한 밤이나 아주 이른 아침에 지나는 게 안전.
  3. 일기 예보란 원래 참고만 하는 용도.
  4. 포인트 컨셉션 돌 때는 예보된 풍속에 안전계수 2를 곱해서 고려.

며칠째 우리는 포인트 컨셉션을 내일 낮 지나는 일정에 맞추어 항해를 이어 오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강한 지역은 해풍의 영향이 더해지기 전인 이른 시간 지나가는 편이 안전하지만, 며칠 전 예보에 의하면 내일은 바람이 거의 없는 날이었습니다. 예보가 맞다면 낮시간에도 별 문제가 없겠지만, 일기예보가 급격히 변하는 추세가 불안합니다. 장피에의 말처럼, 일기예보를 절대 신뢰하는것 보다는 예보가 빗나가더라도 안전하도록, 그 지역을 항해한 세일러들의 일반적인 조언을 따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포인트 컨셉션을 아침에 지나려면 닻 올릴 시간도 별수없이 앞당겨야 할 것입니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채널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미주 한인 요트클럽 회장님. 최근 한인 이민 120주년을 맞아 이민 1세대 선조들의 항로를 거슬러 올라가는 태평양 횡단 프로젝트를 마치고 LA로 돌아가 계셨습니다. LA에서 출항, 태평양을 횡단해 한국에 도착하는 9,500여마일, 93일간의 대장정이었죠. <관련기사> 

"근데 월요일 여기 비 예보가 있는데..."

읭? LA에도 여름에 비가 오나요?

“요즘 기상이변때문에 아주 이상해요. 오늘밤이라도 빨리 출항하면 이틀 항해하고 토요일이면 LA에 바로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 

스프레이후드도 없고, 해치에서 물도 새는 호라이즌스호는 항해는 물론이고 닻 내리고 쉬는 데에도 비가 문제가 될 터입니다. 비 오기 전에 빨리 항구에 들어가는 게 상책입니다. 그러나, 다음 항구 산타바바라에서 며칠 발이 묶이느니, 야간항해를 감수하더라도 LA까지는 가서 퍼지는 게 나아 보입니다. LA에서는 할 일도, 만날 사람도 많아 여러 날 체류할 계획이었거든요. 그렇다면 아래와 같은 일정이 최적인 것 같았습니다: 

  1. 산루이스오비스포 금 00:00 출발
  2. 포인트컨셉션 금 11:30 지나기
  3. LA 토 11:00 도착

오늘밤 자정으로 출항을 앞당기고 나니 또다시 출항 스트레스가 도집니다. 이 심란한 마음은 언제쯤 평화를 찾을까요? 이 와중에도, 강풍 속에 바닷물로 데크 청소를 하고 있는 선주의 무던함이 부럽습니다. 비장한 마음으로, 마모된 오른쪽 제노아 시트를 간신히 교체하고 정리를 하니 벌써 해가 집니다.

 

허리케인보다 빨리

몇 시간이라도 눈을 붙이려고 침대에 누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장피에로부터 다시 메세지가 왔습니다. 이번엔 메세지의 톤이 좀 다릅니다:

"네가 본 이상한 바람이 힐러리Hilary인 것 같은데?"

"읭? 바람이 이름도 있어?"

장피에는 NOAA의 허리케인 경보 페이지 링크를 보내줍니다. 허리케인이라니... 잠이 확 달아납니다.

바하캘리포니아 남쪽에 접근중인 허리케인 힐러리
바하캘리포니아 남쪽에 접근중인 허리케인 힐러리

“굉장히 특이한 경우야. 나라면 가장 가까운 항구에 빨리 들어가겠어.”

여기서 가장 가까운 항구는 우리가 이미 지나쳐 온 모로 베이Morro Bay. 장피에르는 모로 베이 마리나에서 허리케인이 지나갈 때까지 숨어 있다 나오라고 조언합니다. 하지만 애먼 곳에서 며칠을 낭비하는 안타까움에 더해, 이미 지나온 길을 맞바람 헤치고 돌아가야 하기에 영 내키지 않았습니다. 상황을 보니, 내일까지는 허리케인이 상륙할 가능성이 매우 낮습니다. 요트클럽 회장님 말씀대로, LA까지 논스탑으로 빨리 항해해서 피항할 시간은 있는 것 같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출항하려니 서글프다”

선주도 출항 스트레스를 느끼나 봅니다. '서글프다'는 표현이 웃기면서도 서글픕니다. 

밤 11시 20분 기상해, 정확히 자정에 출항합니다. 40분 만에 출항 준비를 마치다니, 둘 다 군기가 바싹 든 것 같습니다. 고요한 어둠 속에 닻을 올립니다. 6시간만 어둠을 버텨 내면 해가 뜰 것입니다.

바람이 세다는 예보는 아무래도 틀린 것 같습니다. 몇 번이나 세일을 폈다 내렸다 했지만, 우리의 조급한 마음에 비해 속도가 너무 느려, 엔진을 끌 수가 없습니다. 최대한 이른 시간에 포인트 컨셉션을 지나야 하니까요. 하지만 지난 뒤에도 특별히 바람이나 바다가 거세지 않습니다.

"뭐, 별 거 없잖아?"

드디어 마음을 놓고 엔진을 끕니다. 포인트 컨셉션 뒤에 숨어 있다는 복병도 없었고, 오늘 밤새 항해하고 LA에 내일 오전 도착하는 일정이니, 좀 늦어져 봐야 낮 시간에 입항할테니까요.

앞서 이 곳을 항해한 세일러들의 말대로, 정말 포인트 컨셉션을 돌아 동쪽으로 나아가니 날씨가 확 더워집니다. 조심스레 제 2의 피부 오리털 잠바를 벗어봅니다. 항해 중에 오리털 잠바를 벗는 것이 처음입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아직 이른 것 같습니다. 다시 제2의 피부를 착용합니다.

지글지글 햇볕이 매우 강합니다. 바람은 서서히 세져, 오후 4시가 되자 배 속도가 6노트를 넘습니다. 아니나다를까, 파도 역시 존재감을 과시하기 시작합니다. 파도가 북쪽의 바다만큼 높지 않은데도 왜이렇게 힘이 드는 걸까 생각해 보니, 방향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두 개의 다른 방향에서 오는 파도의 세기가 서로 엇비슷해서, 파도끼리 교차하는 지점 가까이에서 맞을 때마다 배가 트위스트를 추는것 같은 과격한 움직임을 냅니다. 배에 탄 우리도 별수 없이 그때마다 트위스트를 출 수밖에요.. 

오후 여섯시, 이제 바람도 지나치고 파도도 지나칩니다. 왜 무난히 지나가는 날 없이 바다에만 나오면 이 고생일까요. 해가 지고 나면 여기에 어둠까지 추가해서 밤새 항해할 생각을 하니 까마득합니다. 이때 요트클럽 회장님이 주신 정보가 생각납니다. 이 지역은 바람이 아주 셀 때도 해안 쪽으로 가까이 붙으면 할만 하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주옥같은 정보를 주는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 든든합니다.

뱃머리를 해안 쪽으로 돌리고 이 바람과 파도가 좀 진정되기를 기대합니다. 곧 밤이 올테니 이 해풍의 영향도 서서히 줄 것입니다. LA까지만 고생하면 한 일주일쯤 푹 퍼져 쉴수 있습니다. 비 새는 배에서 지내느니, 비 오는 동안은 호텔에 며칠 묵으며 오랜만에 문명의 혜택을 누릴 계획입니다. 바삭바삭하고 깨끗한 시트가 깔린 드넓은 침대에 대大자로 누워 팔다리를 맘껏 휘두를 생각을 하니 저절로 힘이 납니다. 

 

대범한 한국인과 신중한 유럽인

밤 10시 30분, 핸드폰 메세지 알림. 장피에입니다.

"상황이 안 좋아졌는데.. 너 이거 확인했지?"

출항 이후에도 태풍 예상진로를 수시로 업데이트 했지만, 바람이 세 진 오후 네 시부터는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 바하 캘리포니아에서 LA를 향해 올라오던 허리케인이 동쪽으로 진로를 틀며 태평양으로 빠져 나가는듯 했는데, 장피에가 보낸 그림을 보니 다시 LA를 정조준하며 관통할 태세였습니다.

장피에는, 허리케인이 LA를 지날 확률은 50%, 반면 산타바바라는 10% 미만이라며 산타바바라에 피항할 것을 종용합니다. 그리고 허리케인 관련 정보와 각종 기상 예보 소스의 링크들도 무더기로 보냅니다. 기상을 잘 아는 사람들은 이런 걸 다 파악하고 항해를 하는구나- 내 기상 지식이 부족하다면, 도움을 요청할 장피에 같은 베테랑의 존재가 이토록 중요한 것이구나 생각이 듭니다. 자기 일도 아닌데 이렇게 발 벗고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장피에가 참 고맙습니다. 

메세지로 연신 보내주는 자료들을 보니 무서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처음으로 우리는 야간항해 준비가 되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고, 날씨도 이 정도면 할만 하다고 생각하던 참이었기에 아쉬움이 컸습니다. 시원하게 내리는 비를 핑계로 호텔에서 널브러져 쉬고픈, 마음 한 구석의 작은 소망도 포기하기 어려웠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항해를 둘로 나누어 두 번 고생하느니, 무리해서라도 LA까지는 도착한 뒤 맘편히 퍼지고 싶은 마음도 너무나 간절했습니다. 그래서 바보같은 질문을 하게 됩니다. 

“마리나에 묶어놔도 위험한걸까”

질문을 하면서도 장피에가 어떤 답을 할 지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만에라도 하나 진짜로 허리케인이 LA에 도착한다면, 배들이 '손상'이 아니라 '파괴'될거야. 카리브에서 한번 봤는데, 마리나에 배 위에 배가 쌓여 있었어."

몇년 전에 지나가다 본, 대형 파워요트 하나가 작은 바위섬 위에 올라타고 있는 광경이 뇌리에 스쳐 지나갑니다. 나폴레옹의 유배지로 유명한 엘바 섬Isola d'Elba에 가던 길이었습니다. 그 엄청난 재난이 지나간 흔적에 혀를 차며, '배를 타더라도 저런 꼴은 평생 볼 일이 없게 해야지'라고 했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지금, 안전을 위한 선택을 주저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일정 최적화에의 욕구인가, 호텔의 바삭한 침대시트인가. 

이때 마침, 우리는 산타바바라 항구 앞을 막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계속 진행하든, 배를 돌리든 빠른 결정이 필요했습니다. 조급한 마음에 다시 요트클럽 회장님에게 연락을 해 보았습니다. LA는 허리케인이 오는 곳이 아니므로, 산타바바라에 피항하느니 한시라도 빨리, 비보다 먼저 LA에 도착하는 것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흔들리는 마음은 다시 장피에에게 의견을 물었습니다. 장피에는 강력히 반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메세지를 계속 보내며 산타바바라로 회항하겠다는 확인을 요구했습니다. 혹여나 우리가 야간항해를 강행할까 걱정이 되었나 봅니다. 장피에와 회장님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우리는 어떤 선택이 좋은 것인지 혼란스러웠습니다. 안전이냐 효율이냐. 산타바바라냐 LA냐. 어쩌면 신중한 유럽인과 대범한 한국인의 성향 차이 같기도 합니다. 

 

신중한 한국인들

어둠이 깔린지도 이미 한참이 지난 시간, 전자해도에 미리 찍어둔 점을 향해 천천히 움직입니다. 출항 전에 비상시 피항할 만한 곳들을 조사한 후 죄다 전자해도에 저장해 놓았던 덕에, 닻 내릴 계획이 없던 산타바바라 앞바다에서도 차분하게 쉴 자리를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정면의 육지 쪽에서 나오는 빛이 많은 가운데, 그 앞의 바다에는 앵커라이트도 없이 어둠 속에 닻 내리고 있는 배들이 많아 주의가 필요합니다. 선주가 뱃머리에서 손전등으로 열심히 전방을 탐색했지만, 오랫동안 방치된듯 보이는 작은 배 하나와는 거의 부딪힐뻔 하기도 했습니다. 생각보다 닻내림 구역이 넓고, 항구에 들어가는 뱃길과 구분이 되어 있지도 않아 위험했습니다. 무엇보다 불꺼진 다른 배들이 잘 보이지 않는 게 큰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초벌(?)로 닻을 우선 내리고, 정지한 배 위에서 침착하게 손전등으로 주위 배들을 비춰본 후, 이보다 나은 위치를 전자해도에 찍어 놓고 다시 닻을 내렸습니다.

이제 오늘밤은 여기서 자고, 내일아침 날이 밝는대로 항구 안으로 들어갈 계획입니다. 긴장이 풀어집니다. 내일 아침까지 이제 허리케인 걱정은 그만. 배는 흔들렸지만 곧 곯아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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