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즌드 어리버리 13

새벽 세시, 일어나 콕핏에 앉아 차를 한 잔 마신 뒤 출항 전 루틴을 마치고 닻을 올립니다. 날이 갈수록 길어지는 출항 전 루틴: 엔진룸 열어 엔진오일과 냉각수 점검, 트랜스미션 오일 점검 뒤에도 전진 한번, 후진 한번. 그 전에는 섣불리 닻을 올리거나 계류줄을 풀 수 없습니다. 

새벽인데 추위가 훨씬 덜한 느낌입니다. 하프문 베이의 닻내림 구역은 마리나와 함께 방파제 안쪽에 있어, 이틀 밤 흔들림 없이 쉴 수 있었습니다. 근처 마리나를 밝히는 불빛 덕에 깜깜한 시간에도 맘편히 닻을 올릴 수 있는 것 역시 고마웠습니다. 늘 흔들리는 배에서 잠 못 이루다가 암흑 속에서 닻을 올리곤 했는데 이제 드디어 좋은 날이 오는걸까요?

방파제를 나서고도 한동안 왼쪽 해안의 불빛이 우리를 안심시켜 줍니다. 사람이 켜 놓은 불빛이 보이면, 그 불빛이 아무리 멀리 있더라도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곧 문명 세계의 흔적은 사라지고 호라이즌스 호는 뱃머리의 암흑을 향해 나아갑니다.

산 너머 산

멘도시노 영향권을 드디어 벗어났지만, 아직 넘을 산이 하나 더 있습니다. 서부 해안이 급격히 동쪽으로 후퇴하며 태평양이 산타 바바라 해협과 만나는 지점, 그 뒤로 남캘리포니아 도시들이 시작되는 모서리 포인트 컨셉션Pt. Conception입니다. 

이 곳을 기준으로 마치 기후대가 변하듯이 드라마틱하게 따뜻해져, 포인트 컨셉션을 돌면서 실시간으로 옷을 하나 둘 벗어던지게 된다고도 하더군요. 강한 바람과 큰 파도, 여러 해류가 만나는 경계로 악명이 높아, 최대한 바람이 적은 날을 골라 해가 없을 때 돌아가는 것이 정석이라고 합니다. 

포트 브랙에서 출항 전 우리의 계획은 이랬습니다:

예보상 가장 바람이 약한 화요일 오전에 포인트 컨셉션을 돌기 위해 만만찮은 거리를 항해하면서도 단 하루도 여유가 없는 일정입니다. 그러나 화요일을 놓친다면 다음 기회의 문이 열릴 때까지 또다시 일기예보 앱을 강박적으로 확인해야 할 참이었습니다. 야심찬 3박 4일 첫 야간항해 계획을 포기한 뒤에도, 지연된 일정에 대한 조바심과 미련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나 봅니다. 

어제 아침, 하프문 베이에서 한 밤 자고도 피로와 메스꺼움이 여전했지만 하루라도 늦어지면 모든 일정이 어긋납니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세수도 안 한 채로 오일스킨에 몸부터 집어넣었습니다. 그런데 선주는 오일스킨 입기를 거부하고 앉아있었습니다. 며칠 씻지 못해 떡진 머리, 아직 멀미가 남았는지 흐릿한 눈.. 그 몰골을 보니 도저히 '조금만 더 견디고 출항하자'고 할 수가 없겠더군요.

선주를 내려다보며 "이게 대체 무슨 재미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돈 받고 배를 배달하는 항해도 아닌데 무얼 위해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걸까요. 동생 결혼식 때문에 한달 뒤 한국에 가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긴 하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하루 더 쉬고, 포인트 컨셉션은 다음 바람 없는 날을 기다려 다시 일정을 짜는 것으로 계획을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출항을 굳이 깜깜한 새벽 세 시에 한 이유는 오전부터 맞바람이 예고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나다를까 해가 뜨자 뱃머리 정면에서 맞바람이 시작됩니다. 엔진 출력을 높여 보지만 4노트 속도가 채 나오지 않습니다. 항로를 조금 변경해 세일이 바람을 받게 해 봅니다. 

'뒷바람은 사람은 편하지만 배가 힘들고, 맞바람은 배는 편하지만 사람이 힘들다'는 말이 있습니다. 호라이즌스 호는 편하겠지만, 그 위에서 스프레이후드도 없이 바람을 노필터로 맞으며 항해하는 우리는 참 힘듭니다. 스프레이후드는 아스토리아 난봉꾼이 망가뜨렸지만 촉박한 일정 탓에 수리를 미루고 있었습니다.

항해가 싫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다가 너그러운 면 없이 너무 가혹하기만 한 것이 원망스럽습니다. 

여기 좀 보라고

선주가 고래를 발견합니다. 북미 태평양 연안에서는 돌고래보다 고래와 만나는 일이 더 흔한 일 같습니다. 이제 어디 가서 고래는 좀 봤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도 있을 터였습니다. 

그런데 고래가 한 마리도, 두 마리도 아니고 열 마리 가까이 이 쪽을 향해 줄 맞추어 다가오는 광경은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넋을 놓고 바라보다 어느 순간, '언제까지 다가올 것인가'라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고래의 먹잇감이 아니고, 고래는 똘똘하니 우리 배와 부딪힐 염려도 없을 터였지만 막상 저 거대한 생명체들이 멈추지 않고 떼로 다가오자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등 뒤에서 푸욱- 하고 공기 뿜는 소리가 들립니다. 고개를 돌리니 콕핏에서 채 10미터가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 막 입수하고 있는 고래 등이 눈에 들어옵니다. 

"으악, 빨리 엔진 켜요 엔진! 엔진!"

반겨 주는 것은 고맙지만 가까이 하기엔 너무 거대한 고래 친구들... 기겁을 하고 달아난 뒤에야 정신이 듭니다. 처음 만났을 때에도 그랬지만, 일정에 골몰해 조바심을 낼 때 고래 친구들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인상 그만 쓰고 지금 여길 좀 보고 즐기라는 메세지를 전하려는 듯이요. 

몬테레이

몬테레이는 쑥 들어간 큰 만 안에 위치해 있습니다. 만 안에 진입하니 파도가 잔잔해지고 바람이 강해졌습니다. 하늘은 파랗고 햇살은 부서질 듯 화창했습니다. 젖은 담요처럼 몸을 누르고 있던 피로가 사라지고, 요 앞에서 몇 바퀴 좀 돌고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환경에 기분이 밝아집니다. 아니나다를까 만 안에는 수많은 요트들이 세일을 활짝 펴고 바람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지중해에서나 보던 가볍고 빠른 배들이 많이 보이니 반가운 마음이 듭니다. 과연, 이제 남쪽으로 내려오니 바다 환경이 좋아지는 건가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몬테레이 마리나 입구를 통과한 이후 주유 선착장까지 가는 길은, 마치 물개들의 장충체육관에 입장하는 케이팝 스타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수백 수천 마리의 물개들이 물 위에 기둥을 박고 서 있는 목조 건물 아래 그늘에 숨어 호라이즌스의 입항을 환호하고 있었습니다. 단체로 꽥꽥거리는 소리가 동굴 안에서처럼 메아리를 만들며 울려퍼지자,

"장난 아니다 여기.."

라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아무래도 여기서 조용히 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주유 선착장에 배를 대는데 줄을 잡아 준 사람이 우리와 같은 타야나 37피트 선주입니다. 선주는 몬테레이 사람인데, 샌프란시스코와 이 곳 사이에서만 항해를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밴쿠버에서 내려왔다고 하니,

"와우, 정말 멀리서 왔구나!"

이제 우리가 밴쿠버에서 왔다고 하면 놀라는 사람들을 만나는구나, 새삼 신기합니다.

"여기까지 왔으면 90%는 다 한거야!"

정말? 정말로 우리가 90%를 해낸 걸까요?

"포인트 컨셉션이 다음 고비라고 하던데, 거긴 어때?"

"너희들이 여태까지 한 것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기후도, 마리나 분위기도 휴양지 느낌이 확 납니다. 등 뒤로 햇볕이 뜨겁습니다. 잠바를 벗어던지고 주유를 하던 선주는, 이 정도면 반바지도 입을 수 있겠다며 흥분합니다. 참고로, 우리가 몬테레이에 도착한 것은 무려 8월, 여름 옷은 1년 넘게 서랍 깊숙한 곳에서 꺼내 본 적이 없습니다. 

기름값은 캘리포니아 주 세금까지 포함해서 오레건의 정확히 두 배였습니다. 지출에 주의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물가 비싼 곳들이 계속 이어집니다. 몬테레이 역시 이름난 관광지인데, 특히 해안선을을 따라 펼쳐진 멋진 경치와 골프장 사이를 도는 해안도로 17마일 드라이브17 Mile Drive가 명물이라고 합니다. 유명한 휴양지이지만 다행인 일은, 시에서 운영하는 마리나의 계류비는 그다지 비싸지 않습니다.

마리나 계류비는 배의 길이당 과금이 되기 때문에, 예약할 때 배 길이를 묻습니다. 타야나 37은 37피트 배이지만 뱃머리 앞과 배꼬리 뒤에 붙은 부분까지 합치면 42피트나 됩니다. 하지만 예약할 땐 늘 시치미를 뚝 떼고 "37피트요."라고 하곤 했죠. 

그런데 이번엔 공간이 좀 심하게 작습니다. 두 번이나 후진을 한 뒤에도 선착장 기둥을 한 번 박고 겨우 계류에 성공했습니다. 체크인을 하려니, 제복을 입고 눈빛이 예리한 하버마스터가 콕 집어서 'LOA'를 묻습니다. LOA(Length Over All)은 뱃머리 앞 부분과 배꼬리 뒷부분까지를 포함한 기술적인 용어라 대충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이미 어렵게 계류했는데, 어떻게 좀 안될까요?"

퇴짜를 맞고 별수 없이 45피트용 계류장으로 옮깁니다. 괜히 거짓말하다 들킨 것 같은 민망함은 배꼬리에 나타난 해달들이 달래줍니다. 두 마리나 우리 배꼬리 뒤쪽에서 한참을 뱅글뱅글 돌며 귀엽게 놉니다. 

과정이야 어쨌든 배를 묶고 나자 드디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포트브랙에서 출항한 이후 처음으로 진정한 휴식을 취할 수 있을듯한 느낌입니다. 며칠간 몬테레이 구경을 하며 쉴 생각을 하니 너무 좋습니다. 

마리나를 둘러보니 이제야 내가 상상하던 캘리포니아 느낌이 좀 나는 것 같습니다. 이전엔 90%가 어선, 10%가 오프쇼어용 튼튼하고 무거운 세일링 요트들 구성이었습니다. 우리 호라이즌스 역시 이 10%의 카테고리에 들어가는데요, 튼튼해 보이는 올드 스타일 선형, 장비들이 과하게 많은 데크와 함께 전반적으로 좀 지저분한 특징이 있습니다. 반면, 여긴 상당수의 배가 가볍고 빠르고 재미있는 세일링 요트입니다. 드래곤dragon처럼 익숙한 데이세일러 모델들도 만나니 마치 이탈리아 마리나에 온 것 같습니다. 

"여기 배들 생긴 걸 보니 이 동네는 바다가 험하지 않은가 봐요."

기대에 부풀어 선주에게 말했습니다.

입항 루틴

밤. 밖의 조명이 어둡습니다. 요즘 미국 치안이 좋지 않다던데 이렇게 모르는 도시에서 밤거리를 다녀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맥주 한 잔 하며 그동안의 긴장을 풀겠노라는 의지가 두려움을 이겼습니다. 

마리나를 나서니 물개들의 괴성에 '어휴..'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그동안 마리나 안에서 물개들을 많이 보았지만 이 정도의 물개밀도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자는 놈, 수영하는 놈, 소리 지르는 놈, 재채기하는 놈.. 가까이 가니 심지어 일년 쯤 씻지 않은 사람 냄새도 납니다.

오토바이와 수퍼카 핸들 컬렉션을 벽에 걸어놓은 쉬크한 술집에 들어가 바에 앉습니다. 바로 옆엔 빗자루 같은 속눈썹에 타이트한 원피스를 입은 두 여자와 힙합 모자를 쓴 두 남자가 앉아 술을 마시고 있습니다. 몬테레이에 오니 인종 구성도 확 바뀐 느낌입니다. 중남미 출신 사람들이 백인 숫자를 뛰어넘습니다. 바텐더 역시 멕시코 출신인 듯 이들과 스페인어로 농담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물가 역시 차이가 확연합니다. 맥주 한 잔에 무려 10불. 요상한 고구마튀김을 주문한 것을 후회하며(음식만은 변함없이 역시 미국) 먹고 있는데 바로 옆 화장실 통로 쪽에서 고성이 들리더니 후추통이 우리 접시 옆으로 떨어집니다. 곧 바닥에 엉켜 격렬한 몸싸움을 하는 사람들은, 앗, 옆자리에 있던 속눈썹 두명입니다. 곧 힙합모자들이 합세합니다. 3차로 몸을 던지는 그룹은 이들을 뜯어말리는 바텐더들입니다. 그 액션에 조금의 망설임이나 자비가 없습니다. 

이렇게 여러 명이 바닥에 엉킨지 몇 분 만에 싸이렌 소리가 들리더니 경찰이 뛰어들어옵니다. 싸운 양 팀을 분리시킨 뒤 개별 인터뷰를 하는 경찰, 손에 푸른 니트릴 장갑을 끼고 화장실 복도에서 현장 감식을 하는 경찰, 밖에 보니 경찰차가 무려 세 대나 번쩍번쩍 불을 밝히며 서 있습니다. 그간 미국을 여행하면서도 미국의 경찰 파워를 실감할 일이 없었는데, 실제로 보니 그 신속한 출동과 전문성에 감탄이 나옵니다. 

다시 평화를 되찾은 술집에서 마저 맥주를 비우고 계산을 하려니 아까 체육인처럼 몸을 던져 몸싸움을 말리던 바텐더가 윙크를 합니다. 

"오늘 공짜 쑈는 맘에 들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