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즌드 어리버리

씨즌드 어리버리 14

프로즌 헤드

2024.01.28 | 조회 1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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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퍼 매뉴얼

바다, 항해, 세일링 요트에 대한 이야기

바다와 항해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머리를 식히기 위해, 하루는 버스를 타고 몬테레이 명물 중 하나인 캐너리 로Cannery Row에 갔습니다. 옛 정어리 통조림 공장이 있던 곳입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곳에 가 보니 트럭에서 컬렉션용 수퍼카들이 하나둘 내리고 있습니다. 자동차 경매 프리뷰 광고가 있던데 경매 나갈 차들인가 봅니다. 캬- 몬테레이쯤 내려와야 전형적인 캘리포니아 그림이 나오는 것인가, 흥분됩니다. 

그러나 통조림 공장 건물들은 실망 그 자체였습니다. 가장 중요한 중앙 홀에 롯데월드 풍의 캐리비안 해적 마네킹이 전시되어 있다니 눈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이탈리아 같았으면 공간의 역사와 컨셉을 살려 기똥차게 만들었을 텐데, '재료'가 참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뜬금없이 이탈리아 건축 생각을 하며 걷고 있는데 옆에서 이탈리아 말이 들립니다. 돌아보니 아까 버스 창밖으로 봤던 사람들입니다.

우리 버스가 사람 많은 거리를 천천히 지나치고 있을 때, 수많은 인파 중에 눈에 들어온 한 그룹이 있었습니다. 그 인상이 강렬해, 옆자리에 앉은 선주에게 말했습니다: 

"저 사람들 왠지 이탈리아 사람들 같은데.."

머리카락은 없으나 아방가르드한 썬글라스에 목을 잔뜩 올려 입은 폴로티의 중년남성, 그을린 피부, 묶지 않은 긴 머리에 날씬한 몸매의 중년여성들, 그 뒤엔 자녀 세대로 보이는 소녀들이 있고, 결정적으로, 맨 앞엔 할머니 한 분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스타일도 스타일이지만 저건 이탈리아 사람이 아니면 힘든 구성이다- 라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마침 건물에서 나오자마자, 점심으로 뭘 먹을까 열띤 논의중인 이탈리아 말이 들리는 겁니다. 아까 그 사람들입니다. 이거 그냥 지나가긴 왠지 아쉽습니다

"안녕! 아까 버스 위에서 너희들을 보고 '꼭 이탈리아 사람들같다.' 라고 생각했었어." 

미국 관광 중에 웬 초면의 동양 여인이 이탈리아어로 말을 걸어오자 가족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곧 사람 많은 캐너리 로 거리 한복판에 둥글게 대화의 원이 만들어졌습니다. 아빠 로베르토, 엄마 크리스티나, 이모 프란체스카와 외할머니, 그들의 딸들.. 대가족이 여름휴가로 차 두 대를 빌려 캘리포니아-네바다 일주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너희 둘이? 정말? 그래도 운전해 주는 선장이 따로 있겠지? 아니라고? 정말?"

크리스티나는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입니다. 

"내가 보기에 너네 약간 미친거 같다. 맞지?"

할머니도 한 마디 거듭니다. 

"너희들 엄마는 이 사실을 알고 있니? 내가 너희 엄마였으면 나는 진작에 죽었을거야."

문득, 이 사람들 눈에 우리가 얼마나 무모한 모험가로 보일까 생각하니 재미있었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두려워하는 영혼들이라 생각하는데 말이죠. 어쩌면 우리가 여태까지 해 온 항해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자신감을 느끼지 못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캐나다부터 요트 타고 내려왔다고 한다면 나는 어떤 느낌을 가졌을까요? 

"근데 한국이면.. 북한, 남한?"

로베르토가 해맑은 표정으로 바보 같은 질문을 하자, 딸들이 한숨을 쉬며 아버지를 질타합니다. 10대인 딸들은 한국 문화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이탈리아에 살면서 수백 번 들은 질문인데, 시대가 바뀌긴 했나 봅니다. 

서로 맞아 맞아 맞장구를 쳐 주며 미국 식생활의 고충과 스펙터클한 스케일의 자연, 여행 루트 등에 대하여 한바탕 이야기 꽃을 피웠습니다. 오랫만에 이탈리아 사람들을 만나 이탈리아어로 신나게 수다를 떠니 타지에서 고향 사람을 만난듯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새삼, 우리 스스로에 대해 이제 자신감을 좀 가져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프로즌 헤드

조금씩 되찾아가던 자신감이 한번에 추락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올 여름 미국에 오기 직전의 한 뉴스레터에서 안전장비로서의 액션 카메라를 언급한 적이 있었습니다. 방수 케이스를 끼운 작은 카메라 덕에 잠수하지 않고도 물 밑 배 손상을 확인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레터를 읽었던 건지, 이번 구간 항해를 위해 출국하기 직전에 친구 하나가 최신형 액션 카메라를 선물했습니다. 덕분에 케이프 멘도시노를 돌다 마주친 긴박한 순간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아래 영상입니다:

케이프 멘도시노 지났을 때 영상

기상 예보로 전혀 낌새를 채지 못했고, 프로페셔널 어부 친구도 괜찮다고 했던 날인지라, 이 상황을 만났을 때 상당히 당황했습니다. 세일은 작게 줄여 놓은 상태였고, 안전장치 프리벤터도 설치가 되어 있었지만, 강풍이 너무 갑자기 일어나 메인세일 내릴 타이밍을 놓쳤었습니다. 그 강도의 바람에서 뱃머리를 바람 반대쪽으로 돌려 자이빙할 용기도, 바람 쪽으로 돌려 세일을 내릴 용기도 없어 점점 육지에 가까워지며 안절부절하고 있었습니다. 아슬아슬한 각도로 뱃머리를 유지하다 결국 메인세일이 저절로 휙 돌아가 의도치 않은 자이빙을 하게 되었지만요. 프리벤터가 없었다면 위험할 뻔했습니다. 

이렇게 메인 세일을 내릴 타이밍을 놓친 상태에서, 배가 과도하게 힘을 받으며 풍상으로 돌아가는 힘을 제어하기 어려울 때, 단둘이 어떻게 안전한 자이빙을 할 수 있었을까- 이후 만난 세일러 친구들마다 영상을 보여주며 물었지만, 명쾌한 답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프로페셔널 스키퍼 친구들 몇에게도 영상을 보냈습니다. 

우선, 충분히 시트를 풀어 메인세일을 활짝 열지 않았음을 지적받았습니다. 메인세일에 바람의 힘이 줄지 않으니, 뱃머리는 격렬히 바람 쪽을 향하려 했습니다. 그때 왜 메인세일을 열다 말았을까 혼란스러운 기억을 되새겨 보니, 세일이 종종 슈라우드에 걸려 메인세일을 중앙으로 좀 당겨 놓았던 생각이 납니다. 격한 돌풍의 충격으로 작게 줄인 메인세일의 상단 부분이 대각선 슈라우드 뒤로 넘어가 걸려, 세일이 찢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메인세일이 너무 많은 힘을 받고 있어서, 한번 열면 다시 중앙으로 돌리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이에 더불어, 제노아가 바람을 못 싣고 파닥이는 점도 지적 받았습니다. 최대한 세일의 힘을 줄이는 방향으로 조타를 한 탓입니다. 그 때문에 반대 방향 힘을 만들어 뱃머리가 도는 힘을 상쇄해야 할 제노아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알레씨아, 그것보다도..."

마지막 메세지로 인해 영상은 급 호러무비가 되었습니다.

"너 리깅 흔들리는 거 안 보이니? 풍하 쪽 슈라우드는 너무 늘어져 있고 포어스테이는 진짜 무섭게 흔들리는데."

그제야 요동치는 리깅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상황을 짧은 영상으로 접한 다른 세일러 친구들은 발견 못했더라도, 그 현장 안에 너덧 시간이나 있으며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은 공포입니다. 배 위에서 벌벌 떨면서 머리도, 눈도 얼어 버렸나 봅니다. 험악한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은 무의식이 감각을 마비시켰던 것일까요?

케이프 멘도시노를 지난 건 한참 전인데, 이제서야 뒤늦은 패닉이 찾아왔습니다. 몬테레이에 도착한 이후 조금씩 회복하던 자신감이 한 순간에 절벽 아래로 추락한 것만 같습니다. 남들은 긴박한 순간이 오면 감각이 날카로워진다던데 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이 리깅이, 이 배가 무섭고 못 미덥다는 생각에 이릅니다. 항해를 시작한 지 이미 1년이 지난 이 시점에 말이죠. 이 상태로 세일을 쓰면 위험하겠다는 생각에, 급한대로 응급 튜닝을 했습니다. 예전에, 데크와 마스트 사이에 끼우는 나무 토막이 바닥에 뚝 떨어졌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헐렁한 리깅 때문에 마스트가 흔들렸고, 그 때문에 나무 토막이 떨어졌을 것입니다. 리깅이 지지하지 못한 마스트는 흔들리며 배 구조에 무리를 주었을 것입니다. 그때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는 사실 역시 무섭게 다가옵니다. 리깅을 주제로 블로그를 하면 뭐 하나요... 좌절이 밀려옵니다. 쿨헤드를 꿈꾸었지만, 현실은 그냥 프로즌 헤드인가 봅니다.

 

출항

우리의 출항 전 영원한 숙제, 빨래에 더불어 리깅 튜닝까지 하느라 몬테레이의 마지막 날도 저뭅니다. 몬테레이 명물 17 마일 드라이브는, 아쉽지만, 다음 생애에 하기로 합니다.

다음 정거장인 산 시메온San Simeon까지 구간은 데이 세일링으로 소화하기엔 다소 긴 80해리. 깜깜한 밤중에 닻 내리는 사태를 피하려면, 여유있게 시간을 잡고 떠나는 것이 낫습니다. 그래서 새벽 2시 출항을 결정했는데, 이게 또 가슴에 돌 같은 스트레스를 줍니다. 출항이 점점 익숙하고 쉬워지는 대신 스트레스 지수가 높아지기만 하는 느낌입니다. 

계류줄을 풀고 선착장을 나서자 안개가 시작됩니다. 마리나 조명이 점점 흐릿해지더니 주변이 뿌옇게 사라져, 선주가 뱃머리에 나갑니다. 선착장에 묶인 배들 뿐 아니라 방파제 안쪽으로 닻 내린 빼곡한 배들이 잘 보이지 않아 매우 위험한 상황입니다. 

이번에도 쿨 헤드를 잠시 잊고 벌컥 화를 내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헤드라이트를 쓴 선주가 자꾸 뒤를 돌아보며 "앞에 배 보여?" 따위의 바보같은 질문을 멈추지 않았거든요. 선주의 헤드라이트 때문에 시야가 멀어버리는 황당한 상황에 더불어, 배가 보이는지 안보이는지 여부를 소리쳐 답한 뒤, '그래서, 이 중에 어느 배를 말하는 건가요?' 등으로 이어지는 문답식 대화를 이어 나가기엔 장애물들이 너무 가까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디로 가라는 거냐구요!!!"

머리가 팡- 하고 폭발해 버렸습니다. 배에서 커뮤니케이션은 필수적인 메세지만 짧고 명확하게, 밤에는 조타수의 눈을 멀지 않게 할 것. 간단히 가야 할 방향을 외치거나 손으로 표시했다면 뱃머리와 조타수 사이 10미터나 떨어진 거리에서 창의적인 문답형 대화법이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뱃머리-배꼬리 사이의 야간 커뮤니케이션을 미리 합의해 놓은 적도, 연습을 해 본 적도 없습니다. 게다가 한번 터진 분노는 머리에서 계속 폭죽을 터뜨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야간 항해에 능숙한 쿨 헤드 세일러로 거듭나는 데에는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테니, 블루투스 인터컴 헤드셋이라도 장만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빽빽하게 배로 가득 찬 방파제를 무사히 빠져나오자, 분노의 외침도, 터질듯한 긴박함도 가라앉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적막 속에서 남쪽으로 뱃머리를 돌립니다. 안개 속에서도 왼쪽으로는 해변과 도시의 불빛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우리 뱃머리 앞은 언제나 그렇듯 까만 암흑. 항구를 떠날 때마다 문명세계를 벗어나 미지의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입니다. 달도 별도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없는, 그냥 까만 색 속으로 항해해 들어갑니다. 

 

이국적인 풍경과 미역

하루 종일 바람이 없어도 너무 없습니다. 트라우마 때문에 바람이 약한 날을 선택해 출항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보에 의하면 해가 뜬 뒤 가벼운 바람이 있어야 할 날인데 NOAA도, 예보 모델들도 다 틀렸습니다. 예보보다 강한 바람도 문제지만 약한 바람은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는군요. 오늘은 갈 길이 먼데 바람은 전혀 없고, 평소보다 엔진 회전수를 높여도 4.5노트 속도가 채 나오지 않습니다. 새벽 두 시에 출항하고도, 저녁 해 지기 전에 도착 못 할까 조바심이 납니다. 

그 와중에 오토파일럿이 먹통이 되었습니다. 오토파일럿 벨트가 미끄러지거나 컨트롤러 입력값을 따르지 않는 경우는 있었어도 이렇게 완전히 죽어 버리는 건 처음입니다. 별수 없이 수동으로 조타를 합니다. 종일 뿌연 안개 속에 당당당당 엔진 소음과 함께 항해하는데 속도는 안 나고 교대로 조타까지 하니 피로를 느낍니다. 

https://www.istockphoto.com/es/foto/tiro-grande-abejón-sur-puente-california-océano-carretera-litoral-ca-1-gm1096740592-294481765
https://www.istockphoto.com/es/foto/tiro-grande-abejón-sur-puente-california-océano-carretera-litoral-ca-1-gm1096740592-294481765

왼쪽, 희뿌연 안개 사이에 구멍이 생기며 그 안으로 빅 서Big Sur의 장관이 보입니다. 몬테레이와 산 시메온 사이에 있는 해안 도로로, 드라마틱한 태평양의 절경이 유명한 곳입니다. 높은 절벽 사이를 지르는 범상치 않은 다리가 보여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이 다리 역시 명소인지 작가 사진들이 많습니다. 이 사진의 배경이 되는 그 바다 위에 우리가 항해하고 있습니다. 세일링 요트 입장에서 이렇게 똑 떨어진 수직 절벽은 반동 파도가 있고 악천후에 숨을 데 없는 난코스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오늘처럼 바다가 얌전한 날은 멋진 풍경을 선물해 주기도 하는군요. 그러나 지루한 엔진 항해에 잠시 멋진 풍경을 선사해 준 구멍은 곧 닫히고 시야는 다시 안개에 덮입니다.

http://www.californiasbestbeaches.com/san_simeon/san_simeon_beach.html
http://www.californiasbestbeaches.com/san_simeon/san_simeon_beach.html

해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호라이즌스 호는 이제 포인트 피에드라스 블랑카스Pt. Piedras Blancas에 접근하는 중입니다. 그 이름(흰 돌)처럼 색깔이 흰 바위가 보입니다. 이런 경우 흰색은 돌 자체의 색이 아니라 십중팔구 새똥입니다. 인간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새들만 가득한 바위. 이제 이 포인트를 돌아 조금만 더 내려가면 곧 오늘의 목적지 산 시메온 만에 도착합니다. 

이제 해가 지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해 지기 직전의 시간은 언제나 기분이 묘한데, 바다에 있을 때는 그 감정이 더욱 짙어지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올 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얼마 남지 않은 긴 햇볕이 남기는 슬픔과 비슷한 감정이 올라오기도 합니다. 하늘을 짙게 덮은 구름과 바다 사이 틈으로 분홍색 저녁 햇빛이 진한 색을 드리우고, 멀리 보이는 텅 빈 초원 위에는 동그랗게 다듬은 듯한 나무 한 그루가 거짓말처럼 서 있습니다. 마치 꿈 속에서 본 풍경 같아 감상에 젖어 있는데 선주의 외마디 외침이 정적을 깹니다: 

"앗, 미역이다!"

배 옆으로 엔진 냉각수 파이프같이 생긴 괴생명체가 떠내려갑니다. 얼른 갈고리를 꺼내 건지려다 실패한 선주는 아쉽다는 듯,

"저거 맛있는데 아깝다... 알라스카에서 몇 개 건져서 김치에도 넣고, 다시마처럼 그냥 씹어 먹어도 진짜 맛있던데" 

이 동네는 미역조차 스케일이 장난 아니구나.. 생각합니다. 마치 거인나라를 항해하는 난쟁이가 된 느낌입니다. 

전자 해도가 자동으로 잡은 항로는 피에드라스 블랑카스 포인트와 그 앞의 돌섬 사이로 나 있습니다. 둘 사이 거리를 재 보니 겨우 0.1해리. 멀리 돌아가는 것이 안전하겠으나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는 시간, 그 사이로 통과하면 시간을 절약할 듯해 유혹에 시달립니다. 게다가 오늘은 바람도 없습니다. 웬만하면 전자해도의 항로처럼 그 사이를 질러갈 생각으로 접근합니다.

어둑어둑한 빛, 멀리서부터 뭔가 희끄무레한 게 보이는가 싶습니다. 그런데 아니 이런, 가까이 가니 유튜브 쇼츠 영상에서나 볼만한 절벽 같은 파도가 포인트와 돌섬 사이에 치고 있습니다. 뉘엿뉘엿 해 질 녘 아득한 저녁 빛에 수직 파도 장면은 정말 공포스럽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는 전자해도가 짜 준 항로 믿고 지나갔다가 유튜브 쇼츠 영상 찍을 뻔했습니다. 

급히 뱃머리를 돌려 현장을 멀리 돌아가고 나니 이제 해가 정말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점점 다가오는 어둠에 보호자 없는 어린이가 느낄만한 불안함이 몸을 감쌉니다. 세일러로서 어른이 되는 과정인 걸까요?

아까 선주가 놓쳤다고 아쉬워하던 미역이 두어 개 더 등장합니다. 그러나 갈고리로 건지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뱃머리 앞에 배 길이만 한 괴물 해초 떼가 나타났습니다! 급히 뱃머리를 돌려 피한 뒤 가까이서 보니 돌나물 같이 생겼는데 이파리 하나가 사람 손바닥 만큼 큽니다. 그 뒤로도 괴물 해초 더미들이 계속 이어집니다. 아케이드 게임 하듯 괴물 해초 더미들을 피해 가는 사이 해가 져 버립니다.

이제 해초떼가 잘 보이지 않는 데에다, 산 시메온 만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피할 구멍이 없는 거대한 해초의 띠가 둘려 있어 별수 없이 그 위로 통과합니다.

촤르르륵-

배가 해초 위를 지나가는 소리에 눈을 질끈 감게 됩니다. 지나가기 직전, 급히 엔진을 중립에 놓으며 프로펠러가 금세 멈추어 주길 바랐으나 타이밍이 늦은 것 같습니다. 이제 완전한 어둠이 내려 더이상 해초 더미를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닻내림 구역에 접근할 때까지 두 번 더 촤르륵- 소리를 듣습니다. 그때마다 배가 느려지는 느낌도 듭니다. 제발 괴물해초가 프로펠러에 걸리지 않았기를 바랐지만 아무래도 무리한 희망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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