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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링 요트의 방향들

2024.07.14 | 조회 1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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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퍼 매뉴얼

일요일 오전 9시에 읽는 바다, 항해, 세일링 요트 이야기(격주 발행)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누구나 삶에서 부딪히는 장애물이 있죠. 저에게는 그게 바로 방향을 잘 못 잡는 겁니다. 걸을 때도 네비게이션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해요. 반면, 길눈이 유난히 밝은 제 친구는 해와 그림자의 방향으로 무의식 중에 동서남북 방향을 파악한다고 해서 저의 부러움을 샀습니다. 최근 남반구의 호주로 이주한 뒤엔 해 방향이 달라서 시스템 혼란을 겪고 있다고는 하지만요.

그래서 큰 나침반이 눈에 잘 띄는 위치에 있는 배는 그 자체로 호감을 줍니다. 나침반이 있다면 실시간으로 내가 가는 방향을 지도 위에서 떠올려 볼 수도 있습니다. 구제불능 길치에겐 흔한 경험이 아니죠. 

나침반은 보통 조타수가 보기 편한 위치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나침반이 보이지 않는 곳에 있어도 세일링 요트에서 방향 때문에 애 먹을 일은 별로 없습니다. 세일링 요트는 바람을 타고 가기 때문에, 바람이 방향의 기준이 되어 주기 때문입니다. 나침반이 안 보이거나 방향 감각이 좀 부족해도 바람이 부는 방향은 누구나 즉시, 그리고 착오 없이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세일링 요트의 '방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여름 저녁, 어리버리 항해 3구간을 함께 시작한 멤버인 선주, 고문과 함께 남해의 한 해변 모래밭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해가 진 직후의 하늘엔 분홍색 구름이 수를 놓았고, 동쪽 하늘엔 반달이 떠 있었습니다. 바다에서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알레씨아: "정말 아름다운 석양이다.. 바로 근처에 살면서도 해변에 나와 한잔 할 생각을 못했었네. 바람 때문인지 여긴 저녁 시간인데도 모기가 없나봐요?"

고문: "바람 때문에 없습니다."

선주: "나는 간지러운 것도 같은데"

알레씨아: "그건 땀 흘리고 아직 안 씻어서 그런거예요."

셋은 바다를 향해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파도 치는 붉은 바다의 아름다움에 넑을 잃었습니다. 오른쪽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왼쪽 다리 허리 옆구리가 간지러운 느낌이 확실해졌습니다. 고문도 맨발을 긁기 시작합니다. 설마 하고 만져보니 모기 물린 자국이 왼쪽 다리 허리 옆구리에 가득입니다.  

알레씨아: "헐.. 풍하 쪽만 모기한테 다 뜯겼어요!"

선주: "바람 때문에 모기 없대서 방심하고 있었잖아! 풍상에서만 못 무는 건가보다."

알레씨아: "모기향도 갖고 왔는데.. 돗자리 풍상 쪽에다 켜 놓을걸..!"

세일링 요트에서 쓰는 각종 외계어 중 '풍상'과 '풍하'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용어입니다. 강의 상류와 하류와 같은 개념이죠. 대부분의 세일링 용어가 외국어인 반면, 이 두 단어는 유용하게 쓰이는 우리말입니다. 아래는 좀 더 보편적인 세일러들의 대화입니다: 

"항구 들어가려면 풍하로 내려가자"

"데크에 나갈 땐 항상 풍상 쪽에서 나가야지!"

"풍하 쪽 리깅 흔들리는 거 보이니?"

'바람 위쪽(풍상)'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 쪽, '바람 아래쪽(풍하)'는 바람이 불어 나가는 방향을 칭합니다 바람 부는 방향에서 좀 더 먼 쪽으로 뱃머리를 돌릴 때엔 '내려간다'라고 하고 바람 가까이로 접근할 때엔 '올라간다'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배에서 자주 듣는 또다른 용어, '스타보드starboard'와 '포트port'는 배의 특정 측면을 지칭할 때 사용됩니다. 

세일링 요트는 좌우가 대칭입니다. 배의 중심선을 기준으로, 뱃머리 쪽을 바라보는 사람의 오른편은 스타보드, 왼편은 포트라고 부릅니다. 배나 말하는 사람의 방향이 바뀌어도 헷갈리지 않습니다. 즉, 조타대에 서 있는 스키퍼가 다급하게 

"오른쪽!!!"

..이라고 외쳤을 때 뱃머리에서 지금 막 작업을 마치고 콕핏으로 돌아오다 스키퍼와 눈이 마주친 사람의 오른쪽과 스키퍼의 오른쪽이 달라 헷갈릴 염려가 없다는 말이죠. 찰나의 순발력과 협업이 중요한 험한 바다에서 헷갈린다는 건 곧 죽음이었으니까요. 

태초에 선박에는 배 중심선에 러더가 없었습니다. 대신, 오른쪽 뱃전에 조타용 노를 두고 사용했습니다. 대부분 오른손잡이였기 때문에 자연스레 오른쪽이 조타steering하는 쪽이 되었고, 여기서 '스타보드starboard'라는 명칭이 유래되었습니다. 베네치아의 곤돌리에레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https://liveinitalymag.com/the-gondolas-of-venice/
https://liveinitalymag.com/the-gondolas-of-venice/

배의 크기가 커지면서 조타용 노도 함께 커졌습니다. 이로 인해 노가 없는 반대편에 배를 정박하는 것이 훨씬 쉬워졌습니다. 항구에 정박한 방향으로 화물을 실어야load 했기 때문에, 이쪽을 '라보드larboard'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라보드'와 '스타보드'는 발음이 비슷해 비바람이 심하고 파도가 칠 때 혼동을 일으키기 쉬웠습니다.

이러한 혼란을 줄이기 위해 '라보드'는 나중에 '포트port'로 변경되었습니다. 왼쪽 뱃전으로 화물을 싣고 내리기도 했지만 정박할 때에 항구 쪽으로 대는 것 역시 왼쪽 뱃전이었으니까요. 

'왼쪽'과 '오른쪽'이 말 하는 사람의 방향에 상대적인 것과 달리 스타보드와 포트는 뱃머리를 기준으로 늘 일정하기에 의사소통에 명확합니다. 

스타보드와 포트 덕에 조타하는 사람과 데크에 나갔다 돌아오는 사람 사이 방향이 헷갈릴 염려는 없어졌지만, 단순히 '오른쪽'과 '왼쪽'보다 더 자세한 방향을 가리켜야 할 때가 있습니다.

"으악, 한 시 방향에 게통발 있어!"

"아홉 시 방향에 고래 두 마리"

"네 시 방향 수평선에 연기 안 보여?"

수평선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에서는 방향의 기준으로 삼을만한 주변 배경이 없습니다. 뱃머리를 열 두시로 놓은채 이렇게 배 주위의 특정 방향을 가리킬 필요가 있을 때, 시간 방향을 이용하면 정확한 소통을 할 수 있습니다. 

열 시 방향
열 시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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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쉬posh'라는 단어 들어보셨나요? 뼈대 있는 럭셔리, 졸부는 도달할수 없는 상류층 같은 뉘앙스를 가지는데요, 옛날에 요트 관련 책의 서문을 읽다 이게 배에서 유래된 여러 단어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P.O.S.H.'는 'Port Out, Starboard Home'의 약자입니다. 

19세기 인도를 식민지화한 영국은 대형 증기선을 타고 아프리카 대륙을 따라 아래의 경로로 인도를 왕래했다고 합니다. 

항해는 여러 날이 걸렸고, 부유한 승객들은 장기간의 여행을 더 쾌적하게 보내기 위해 선실의 위치에 신경을 썼습니다. 영국에서 출발하는 배에서 스타보드 선실을 잡으면 강렬한 태양과 망망대해밖에 볼 게 없는 반면, 포트 선실은 태양 반대쪽에 있어 선선하고 멀리서나마 육지가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유한 승객들은 유럽에서 인도로 향하는 여정 동안 포트 선실을 선호했습니다. 그리고 인도에서 영국으로 돌아올 때는 반대로 스타보드 선실을 선호했습니다.

이로 인해, 나갈 때는 포트(Port Out), 돌아올 때에는 스타보드(Starboard Home)의 앞 글자를 딴 P.O.S.H 선실은 상류층 여행객이 선호했던 선실로 자리 잡았습니다. 원래는 항해 중 부유한 사람들의 고급스러운 여행 취향을 나타내던 '포쉬'가, 시간이 흐르면서 '고급스럽고 세련된' 것을 일상생활에서도 지칭하는 단어로 자리 잡았습니다.

낯선 세일링 용어들은 옛날 옛적의 배에서 유래한 경우가 많습니다. 

옛 사각형 세일은 뒷바람을 가장 좋아했지만, 어느 정도 옆바람도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세일을 바람 방향에 따라 돌리면 되는 일이었죠. 

위 그림에서처럼 바람이 오른쪽에서 불어올 때는 사각형 세일의 오른쪽 아래 귀퉁이를 뱃머리 쪽에 묶고, 왼쪽은 배의 뒤쪽으로 향하도록 합니다. 그러면 세일이 자연스럽게 오른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받는 방향으로 고정됩니다. 

뱃머리 쪽에 고정된 세일 아랫단 귀퉁이를 택tack이라고 부르는데, 이 경우 오른쪽이 택이 됩니다. 배에서는 오른쪽과 왼쪽 대신 '스타보드'와 '포트'를 사용하므로, 위 그림의 배는 스타보드 택으로 항해하는 중입니다. 

반면, 아래의 배는 포트 택으로 항해 중입니다. 

바람이 포트 쪽에서 불어올 때, 사각형 세일 아랫단의 포트 쪽 귀퉁이를 뱃머리 쪽에 묶고 스타보드 귀퉁이는 배의 뒤쪽을 향하도록 합니다. 이렇게 하면 포트 귀퉁이가 택이 되어, 포트 방향 바람을 잘 받는 방향으로 세일이 고정됩니다. 

택이 되지 못하고 뒤쪽으로 돌아간 귀퉁이에 연결된 라인은 시트sheet라고 불립니다. 시트 역시 요트 타다 보면 자주 들리는 단어 중 하나입니다. 시트는 세일의 모양과 각도를 조절하여 바람을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항해 중에 세일을 조절할 때 대부분 시트를 사용하여 모양을 잡습니다.

이렇게 택을 스타보드에서 포트로, 혹은 포트에서 스타보드로 바꾸는 작업에서 태킹tacking이라는 용어가 유래되었습니다.

택은 두 가지 방법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지난 뉴스레터에서 살펴본 대로 바람을 앞에 둔 채로 뱃머리를 돌려 바꿀 수도 있지만, 바람을 배 뒤쪽에서 받는 상태에서 배꼬리를 돌려 택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태킹'이라고 하면 전자를 말합니다. 배 뒤쪽에서 바람을 받는 상태에서 택을 바꾸는 것에는 자이빙jijbing/gybing이라는 별도의 용어를 사용합니다. 뒷바람에서 택을 바꾸는 프로세스가 다르고 안전에 특히 주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음 뉴스레터는 자이빙에 대한 이야기로 만나요!

아참, 아침식사 초대 아직 유효합니다. 유연한 일정을 위해 구글 폼을 만들었으니 이 링크로: https://forms.gle/pj7jocLuzhUFaCvZ6

그럼, 편안한 일요일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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