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버리 로그: LA

LA도착, 출항 준비

2023.11.26 | 조회 2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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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퍼 매뉴얼

일요일 오전 9시에 읽는 바다, 항해, 세일링 요트 이야기(격주 발행)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남해를 떠나 차를 타고 북쪽으로 올라오다 보니 눈이 쌓인 곳도 있더군요. 서울에서는 오리털 파카를 입고 다녀야 했습니다. 오랜만에 추위를 경험하고 보니(작년 겨울은 브라질에서 피난) 겨울 바다에서 항해를 재개해야 할 일이 걱정되기 시작했습니다. LA는 춥지 않은 기후라지만, 한여름에도 바다에선 오리털 잠바와 헤어질 수 없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죠.

그런데 여기 오니 낮 기온이 무려 28도를 찍는군요. 우리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오리털 잠바를 벗고도 땀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렌트카 사무실까지 가는 셔틀 버스 안에 겨울옷 차림인 무리는 우리밖에 없는 것을 보니 한 편으로는 마음이 놓이더군요. 배에 도착해 반팔 티셔츠로 갈아입으니, 다시 여름을 되찾은 것 같은 기쁨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미션 완료

비수기 11월인데도 비행기는 만석이었습니다. 13시 30분 이륙, 이코노미석 좁은 좌석에서 가능한 오만가지 자세를 바꿔가며 열 시간 넘은 비행 후 착륙이 가까워져 올 때쯤, 도착하면 할 일을 수첩에 적어 내려가 보았습니다. LA에는 오전 7시 착륙 예정이니 그때부터 온전한 하루의 일정을 소화해야 했습니다. 한국 시간으로는 새벽 2시부터 하루를 다시 시작하는 셈이죠.

도착하자마자 호텔에 체크인하고 깨끗한 침대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보통의 여행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비행이 길어도 가자마자 쉴 수라도 있으면 얼마나 편할까요. 비행기 타고 가 시작하는 배 여행의 어려운 점 중의 하나가 이것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배에 도착하자마자 배에 널어놓은 물건들을 정리하고, 물탱크를 채우고, 대략의 청소를 하고 그날 밤 잠자리를 만드는 일까지는 마쳐 놔야 비로소 쉴 수가 있습니다.

정리 안 된 좁은 배에서 다리 뻗고 몸을 뉠 수 있는 잠자리를 만들기 까지의 여정은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작년 7월엔 선주가 장거리 비행 후 대중교통으로 밴쿠버 외곽의 마리나에 도착한 뒤, 1년간 온갖 식물과 곤충 생태계가 창궐한 된 배를 정리하다가 병이 났다고 합니다. 올 7월, 아스토리아에 올려놓은 배에 10개월 만에 돌아갔을 때도 물과 화장실을 쓰지 못하는 데에다 위험한 사다리 타고 오르내리느라 며칠 고생을 했었죠.

그래도 시행착오와 함께 노하우도 쌓였는지, 이번엔 비교적 수월하게 잠자리 만들기까지의 미션을 무난히 완료했습니다. 일단 배를 마리나에 계류시켜 놓았기에 출입에 어려움이 없었고, 물탱크만 채우면 바로 사용이 가능한 상태였습니다(하지만 긴 시간 배를 사용하지 않을 때 육지에 올려놓는 것이 배 건강에는 좋습니다).

염화칼슘(물먹는 하마 원료)을 대용량 포대로 구매해, 여기저기 담아 놓았던 것도 열일을 했더군요. 양동이, 페트병 등 담아놓은 통마다 물이 차 있었습니다. 배를 물 위에 놓았어도 이 염화칼슘을 설치하니 습하지 않았고, 곰팡이도 거의 피지 않았더군요.

다이소에서 사 쟁여 놓고 쓰는 압축 비닐도 열일을 했습니다. 특히, 도착하자마자 퀴퀴한 침대 시트를 빠느라 세탁실에서 꾸벅꾸벅 졸아야 하는 시간이 세이브 되니, 만사가 수월한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호라이즌스호 진료 중

이번 3구간의 뉴스는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우리 호라이즌스 호의 공식 기술 고문을 맡아 주었던 친구의 합류입니다. 대대로 배를 짓던 선주 집안 출신이자, 30년 경력의 마린 엔진 전문가, 무엇보다도 본인이 능숙한 뱃사람인 고문이 합류한다는 의사를 밝혔을 때,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았죠. 그 사이 몇 가지 이벤트들이 있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결국은 셋이 LA 땅을 밟으니, 이보다 기쁜 일이 없었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고문은 호라이즌스의 엔진을 점검하고 있습니다. 그동안의 의심쩍은 엔진 문제들이, 아무래도 포트 앤젤레스에서 케이씨와 라이언 놈들이 엉터리로 일을 땜질해 놓은 탓인 것 같습니다. 실수도 아니고, 뻔히 아는 문제들을 대충 덮어놓고, 혹은 손이 잘 닿지 않는 곳의 나사를 조이다 만 채로 놔둔 녀석들이 

"내가 몇 년 전 은퇴하고 이 회사 차리기 전까지 어부여서 잘 아는데, 당신들 이 엔진으로 멕시코까지 절대 못 가요."

라는 악담 따위나 했다니... 그 멋진 유니폼과 공구 캐리어가 아깝습니다. 우리가 곧 떠날 배라는 생각으로 직업 정신을 배반한 거라면, 포트 앤젤레스의 웨이드 할아버지에게 죄다 일러야겠습니다.

포트 앤젤레스에서 부란자 수리 후 배에 기름 냄새가 가득 차는 증상, 흰 연기가 나는 증상, 연료 소비가 지나치게 많았던 현상 등이 하나하나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고문이 새로운 문제들을 발견해 낼 때마다 등골이 서늘합니다. 이 엔진을 가지고 무사히 여기까지 온 거였군요.

최근 아는 사람에게 진료받기 위해 남해에서 의정부까지 국토종단을 한 일이 떠올랐습니다. 전문지식의 벽 뒤에서 과잉 진료를 하는 일부 의사들에 대한 불신으로,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자꾸 지인들의 병원만 찾게 됩니다. 국적 불문하고 바가지요금이 횡행하는 요트 수리도 비슷한 맥락에 있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우리처럼 떠돌아다니는 세일링 요트는 별수 없이 연고 없는 곳의 메카닉들을 불러 수리하게 되는데, 지식수준이 낮을수록 이들의 선의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트 시스템에 대한 낮은 지식수준 탓에, 고문과 선주 사이에서 공중에 날아 다니는 대화들을 이해하지 못함을 매우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이만큼 살아 있는 고급 정보도 없을 텐데 말이죠. 이런 안타까운 마음이 게으름을 넘어서면, 각 잡고 공부를 시작하게 되더군요. 아마 이번 구간 항해가 끝나면 요트 시스템을 제대로 공부하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항해 중 뉴스레터의 방향

작년 처음으로 스키퍼 역할을 맡기 전에는 오랜 시간 다른 스키퍼 책임 아래의 배를 탔는데요, 스키퍼가 기록하는 공식 항해 로그와 별도로 개인적으로 항해 노트를 만들어 다녔습니다. 요트 자켓에 쏙 들어가는 사이즈 수첩에 새로운 걸 배울 때마다,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혹은 심심할 때 꺼내 끄적이곤 했습니다. 

내지 구성이 개선에 개선을 거듭해서 북토크 기념품으로 드린 것이 최신 버전인데요, 같은 수첩을 이번 항해에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리버리 항해기도 이 수첩의 메모를 바탕으로 복기하여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2구간 항해를 미처 정리하기 전에 새로운 이야기들이 시작되게 되었네요. 멘도시노의 고비를 넘기고도 그에 못지않은 고생의 산을 두어 번 더 넘어 LA에 도착하기까지 스토리가 많은데 말이죠.

항해기에 드는 시간이 만만한 게 아니라서 고민이 시작됩니다. 항해 끝날 때까지 쉬었다 여유가 생기면 다시 시작할까 - 하지만 오래된 이야기들은 새로운 이야기들에 덮여 끈 놓친 풍선처럼 날아가 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발행 압박이 있어야 계속해서 쓰게 될 텐데 말이죠. 

이번 남해 파티에서 독자님들을 직접 뵈며, 매주 메일로 만나는 뉴스레터의 가치를 다시 깨닫게도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식 항해기가 아니라 간단한 항해 근황 정도를 전하는 형식이라도 매주 발행에 마음이 기웁니다. 부담 없이 그때그때 항해 수첩에 간단히 적는 메모 정도를 상상해 봅니다. 내용은 부실해도 생동감은 좀 있지 않을까요?

앞으로 '씨즌드 어리버리 - 2구간 항해기'와 '어리버리 로그 - 3구간 항해 근황' 두 가지 형식으로 매주 발행을 시도해 보려고 합니다. 일요일 오전 9시, 많은 성원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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