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런스의 과학

복원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2024.10.06 | 조회 1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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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퍼 매뉴얼

일요일 오전 9시에 읽는 바다, 항해, 세일링 요트 이야기(격주 발행)

안녕하세요 구독자님,

스키퍼 ABC 벌써 아홉 번째 글이군요. 이 시리즈는 ‘어리버리 항해기’를 보충하는 해설편 격의 기획으로, ‘부담 없이 누구나 항해기 속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돕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항해기에는 가끔 생소한 용어들이 출몰하고, 세일링 요트의 원리를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시작할 때는 나름 믿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스키퍼 매뉴얼 초기 구독자들만 아시는 비하인드 스토리이지만, 이전에 ‘알아두면 쓸모있는 요트의 과학’이라는 뉴스레터를 운영한 적이 있습니다. 세일링 요트의 과학적 원리 20가지를 선별해 심혈을 기울여 글을 썼지만, 수요가 거의 없는 컨텐츠였음을 깨닫고 책으로 묶으려던 계획을 접었죠. 그때 썼던 글들을 이번에 스키퍼ABC 시리즈에서 재활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읽어보니 너무 어려워 건질 만한 내용이 많지 않더군요.

세일, 요트 용어, 항해등, 인테리어까지는 그림의 도움을 받거나 항해기 일부를 인용하는 방식으로 무난하게 다시 쓸 수 있었으나, 드디어 올 게 왔습니다. 요트의 밸런스, 즉 균형은 ‘설명조' 글의 숙명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스키퍼ABC 취지상 빠지면 안 되는 내용입니다. 어디서 시작할지 막막해 다시 철 지난 옛 글을 꺼내 보았습니다. 너무 멀리 나간 내용은 과감히 정리하고 비장의 무기 호두껍질을 투입하니 읽을 만한 글이 된 것 같습니다. 스키퍼 매뉴얼 극초기 구독자님들에게는 익숙한 그림들이 나올 것입니다. 

안정성은 배가 외부 힘에 의해 균형을 잃었을 때 원래 상태로 돌아가려는 능력입니다. 안정성의 핵심 요소 중 하나가 복원력입니다. 배를 기울이는 힘에 대항해, 기운 것을 바로 세우려는 힘입니다. 선박 사고 뉴스에서 많이 듣는 단어죠. 복원력이 낮은 배는 일찌감치 드러눕고 쉬이 일어서지 못해 배가 뒤집어지거나 배 안에 물이 들어오며 가라앉게 됩니다. 오늘은 복원력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시칠리아의 보석이라 불리는 시라쿠사Siracusa, 지금은 이탈리아 땅이지만 기원전 3세기엔 그리스였다고 합니다. 이곳에 아르키메데스라는 수학자가 살았습니다.

어느 날, 선물 받은 순금 왕관의 진위를 의심하던 왕은 아르키메데스에게 철저한 진상조사를 명합니다. 부담스러운 난제를 안고 욕조에 들어간 아르키메데스가 물이 흘러넘치는 것을 보고 '유레카!'를 외치며 뛰어나갔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대체 뭘 발견했던 걸까요?

아르키메데스가 발견한 것은 부력입니다. 물에 잠긴 물체는 그 물체가 밀어낸 물의 무게만큼의 부력을 받습니다. 물에 잠긴 물체가 밀어내는 부피만큼 물이 넘쳐흐르고, 흘러넘친 물의 무게를 재면 물에 잠긴 물체의 무게와 같다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위 사진은 이스라엘 하이파에 있는 아르키메데스 동상이라는데요, 굳이 귀중한 왕관을 들고 욕조에 들어가는 것도, 시대를 앞선 사각 대리석 욕조를 쓰는 것도 사실과 다른 것 같지만(그리고 아르키메데스는 대머리) 결정적으로 아르키메데스가 부력을 발견하려면 체중만큼 온전히 물에 잠기도록 아래 그림처럼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일단 발이 닿지 않아야 아르키메데스를 물에 가라앉히려는 중력과 위로 띄우려는 부력이 어디서 평형을 이루는지를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이 평형 상태에서 아르키메데스 턱부터 발끝까지 물에 잠긴 부피는 흘러넘친 물의 부피와 같고, 이 넘친 물의 질량은 아르키메데스의 체중과 같습니다.

아래의 그림처럼 앞으로 엎드리면 물에 잠기는 부위(?)가 바뀌지만 물에 잠긴 부피(체중)는 변하지 않습니다. 

왕이 준 왕관을 머리에 써 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머리 부분의 중력이 커졌기 때문에 균형을 이루려면 중력을 떠받치는 부력도 머리 쪽이 커져야 합니다. 부력이 커지려면 많이 가라앉아야 하므로, 무거운 왕관을 쓰면 머리 부분이 더 깊이 가라앉습니다. 

배꼬리에 무거운 고무보트를 매달거나 뱃머리에 추가 물탱크를 설치하는 등의 변경에 신중해야 하는 이유는 그 배에 적합하게 설계된 무게중심이 바뀌면서 아르키메데스의 머리처럼 한쪽이 더 가라앉을 염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가벼운 배일수록 상대적으로 그 영향이 크겠죠. 

어느덧 익숙해진 호두껍질 소환합니다:

물에 떠 있는 호두껍질은 물에 가라앉으려는 중력과 호두껍질을 물 밖으로 밀어내는 부력이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만약 엄지공주가 탑승한다면 물에 가라앉는 힘이 커지고, 호두껍질이 물속에 더 많이 잠긴 만큼 물 밖으로 밀어내는 힘도 덩달아 커집니다. 그 상태로 새로운 균형점을 찾습니다.

만약 무거운 엄지공주가 탑승한다면 물에 가라앉을 수 있는 호두껍질 부피에 한계가 있으므로 가라앉고 말 것입니다. 무거운 엄지공주에게는 더 큰 호두껍질이 필요했습니다.

무거운 배일수록 물에 많이 잠기고 물에 많이 잠길수록 부력이 커집니다. 배의 무게를 ‘무게’가 아니라 ‘배수량’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배수량(排水量)은 한자 그대로 ‘물을 밀어내는 양’이라는 뜻입니다. 영문 용어 displacement도 같은 개념입니다.

무거운 배는 많은 물을 밀어내고, 그만큼 더 깊이 물에 잠깁니다. 가벼운 배는 적은 양의 물을 밀어내기 때문에 수면 위로 더 많이 떠 있습니다.

엄지공주는 안전하지 않습니다. 엄지공주가 한쪽으로 치우치면 왕관을 쓴 아르키메데스 머리처럼 호두껍질이 한쪽으로 기울고 말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파도가 치거나 개념 없는 모터보트가 물살을 일으키며 지나가도 호두껍질은 뒤집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본능은 어서 바닥에 엎드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엄지공주가 바닥에 엎드려 버틴다면 호두껍질이 쉽게 기울지 않고, 기울더라도 다시 원 위치로 돌아오기 쉬워집니다.

아래는 시멘트가 굳은 드럼통의 단면입니다.

 

아래쪽에 무게가 집중된 드럼통은 오뚝이처럼 다시 원 위치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무게 중심이 아래쪽에 있을수록 복원력이 커집니다.

물 밑으로 길게 내려온 세일링 요트 킬의 가장 아래쪽에 무거운 물질이(주로 납) 달려 있는데, 이는 무게중심을 낮추어 복원력을 높여줍니다. 드럼통의 복원력과 같은 원리입니다. 

이번엔 엄지공주가 호두껍질이 아니라 김치통 안에 앉아있는 상황을 상상해 봅시다.

김치통은 쉽사리 기울지 않습니다. 바닥이 평평해서만이 아닙니다. 김치통의 한쪽 끝을 누르면 기운 쪽이 더 많이 물에 잠기게 됩니다. 물에 잠긴 부피에 좌우 비대칭이 생기죠. 부력에도 비대칭이 생깁니다. 그래서 물에 더 많이 잠긴 쪽은 더 큰 힘으로 떠올라 김치통을 바로세우게 됩니다. 

선체의 형태는 한쪽으로 기울면 물에 잠기는 쪽의 부력이 비대칭적으로 커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 부력의 차이로 인해 배가 다시 일어서려는 힘이 생깁니다. 김치통과 같은 원리입니다. 선체가 넓고 평평할수록 김치통 효과로 인한 복원력이 커집니다. 

세일링 요트의 경우 배를 기울이는 힘은 주로 세일에서 옵니다. 따라서 복원력이 큰 배는 큰 세일을 장착할 수 있고 복원력이 작은 배는 세일의 크기가 작아야 배가 지나치게 눕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이상은 세일링 요트가 물 위에 그냥 떠 있을 때의 안정성이고, 요트가 움직일 때 생기는 안정성도 있습니다. 움직이는 자전거가 넘어지지 않듯, 빠르게 움직이는 요트가 정지한 요트에 비해 안정성이 높습니다. 다음 레터에서 계속하겠습니다. 

 

어리버리 항해기 첫 편부터 브런치스토리에 연재하고 있습니다. 원래 뉴스레터에 연재했던 내용을 영문 책으로 편집하면서 바꾼 부분이 상당히 많아, 이걸 다시 한국어로 번역하느라 일을 두 번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월수금 발행하니 의도치 않게 바쁜 번역가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bumbling

브런치스토리에 어리버리 항해기 1,2구간을 연재할 계획입니다. 마지막 3구간 항해를 할 때는 엔진고장이나 악천후 등으로 오랫동안 항구에 머문 적이 없어 항해기가 없는데요, 항해수첩의 기록을 바탕으로 재미있는 걸 기획 중입니다. 조만간 알려드릴께요. 

편안한 일요일 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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